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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민중문화이야기

글쓰는 것이,글 읽는 것이 가장 좋은 인간 의식의 채널......

by 마음대로다 2018. 3. 14.

글쓰는 것이, 글 읽는 것이 가장 좋은 인간 의식의 채널.......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은 자연으로 돌아가고, 글을 좋아하는 사람은 도시에 산다는 말이 있다. 없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한국 사람들이 일본 신사를 참배하는 것이 싫었던 것은, 우상의 이진을 섬기다가 죽는 자기의 짧은 생이 싫어서 그랬을 수 있다. 우리가 미야자키 하야오를 좋아하다가, 싫어하다가,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마음이 종적을 찾지 못하는 것도, 이유가 아예 없진 않은 것이다. 사람들이 비싼 차를 타고 과속하는 것은, 인간이, 자기애에 걸쳐, 과속할 때만 튀어나오는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아직 상대성 이론을 모를 때인 것이다. 그렇다고 절대성 이론을, 그것의 상대성 이론을 깨달은 것도 아니다. 그러니, 그 처음의 소공자와 소공녀는 얼마나 살기가 어려운 것일까? 주자가 도시를 좋아했다가, 시골을 좋아했다가, 자연을 좋아했다가, 익스트림 스포츠를 좋아했다가, 정글의 법칙을 좋아했다가, 지고지순을 좋아했다가, 아무나 좋아했다가, 좋아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가 하면, 주자와 별 상관 없는 자기들은 짜증이 나는 것이다. 그것은 친구 같고, 그것은 서울 같고, 그것은 애증 같고, 그것은 별과 같고, 그것은 주자 같고, 그것은 당산 같고, 그것은 당연히 합정 같고 그렇다. 죽었다는 것은 감각이 죽었다는 것에서 예시가 되고, 살았다는 것은 이성이 살았다고 별로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는다. 감각이 살아날 때, 살았다는 느낌을 받는 것이다. 오늘 장안에 화제, 아내가 사라졌다라는 영화를 종로에서 보았다. 나는 조금 짜증이 났다. 내게는 이상한 친구들이 있는 것이다. 영화를 좋아하는지, 형사 영화를 좋아하는지, 아니면 정말 형사인지 알지 못할 냄새를 피운다. 우리들은 페이소스를 좋아한다. 어째서 대학 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제작에서 막히면 페이소스를 찾게 될지 모른다. 씨네21에서도 그렇다. 뭔가 한국 사람인 것 같은 키높이에서,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그런 식의 중국집도 문전성시를 이뤘는데, 또다시 유지나, 하재봉, 한신대? 독문과 출신 아무개의 글에서 페이소스 같은 것을 발견하면, 우리들의 세포는, 위로를 얻고, 진리에 다시금 진입하는 것 같고, 누구도 위로를 얻을 수 있는, 그런 전단지라도 받은 것 같은 것이다. 페이소스라는 것이 그것이다. 페이지. 가수도 있었지 않은가? 전단지를 받고, 몇 개, 집에 가서, 산골, 극단적인 시멘트 블럭하우스, 아니면 보편적인 비닐하우스, 불을 피우고, 아파트 집에 가서, 꼴라주라고 하면, 그 사람은 분명 타락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들의 악몽은 대게, 자기가 타락하는 것이고, 그것은 전단지와 관련이 있다. 그래서 전단지를 잘 보고, 식당을 알게 되고, 학원을 알게 되고, 그런 경험이 한 번이라도 있는 사람은, 묘한 기쁨을 얻는 것이다. 다 그럴 수 없기 때문에, 꼴라주를 하게 되는 것이고, 엄밀히 말하면 거의 모든 회화 예술이 꼴라주라고 해도 좋은 것이다. 그것을 하고 나면, 우리는 페이소스, 그러니까 그리스 용어로 파토스를 얻는 것이다. 그것이 그렇게, 우리 구약학 교수의 교재성 교재, 이름이 하나님의 파토스, 참 그와 같은 강의의 목소리가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대게 케리그마적인 목사님의 소리만 아는데, 신학생들은 신학과 교수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파토스에서 주인공이, 사울이었을 것이다. 사울왕이 되었는데, 그것의 부족한 시간을 썼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것이 다니엘서에서의 칠판에 쓰여졌던 것 같은, 착시, 부정확한 기억으로서의 꼴라주가 너무나 좋은 것이다. 우리는 페이소스를 얻는다. 나의 이 말에 사람들은 페이소스를 얻을 것이다. 얼른, 빨리, 그것의 효과를 얻는 사람이 있고, 누군가 요원한 그 사람을 끌어당겨 주어야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대게의 서울 인문학도들은, 그와 같은 독재적 성경을 실감하지 못한다. 자기들 교수들도, 로고스, 그리고 파토스 그 정도의 언급은 할 줄 안다 할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의미의 근친성에서 헤맬 줄 아는 사람들이 서울에는, 각종 지하철 권역 대학에서, 허다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공 형사가, 다른 주인공 피의자에게 담배를 청할 때, 주인공 피의자가 손을 떨었던 것은, 별 내용 없는 장일선 교수의 그와 같은, 구약 선택 과목으로서의, 책 제목을 알아서일 것이다.

 

영화는 대게 영화주의자들이 본다. 그들의 국적은 옛날에는 미국이었고, 기적과 같이 중국이나, 일본이었고, 프랑스였고, 이제는 한국이 되는 기가 막힌 정신의 현상학 속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처럼, 영화주의자가 아닌 사람도, 주인공 피의자가 물에 빠지는 장면처럼, 영화를 보는 때가 있는 것이다. 그런 때는, 너무나 마음이 슬플 때이다. 그것이 서로 절묘하게 들어맞을 때이다. 그렇게 없는? 마누라가 보고 싶었고, 다시금 서울극장에서 나와, 교보문고까지, 신라시대 탑돌이를 하는 화랑처럼 걸어보았다. 마음이 그윽하였고, 다시금 서쪽 하늘의 노을이, 잘 지어진 광화문 근처의 고층빌딩에 꼴라주가 되어 있는 것이었다. 너무 세상을, 한글을 갖고, 사각형을 그리다보니, 별다른 자리가 없는 대도, 진심으로 거기에 어린아이처럼 붙어 있는 것이었다. 마누라가 저녁 불을 켜고 있었고, 그렇다면 남편은 안정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런 안방으로 버스를 타고 다녔고, 차도, 경찰차도, 멋진 사람들이, 남녀들이 바쁜 걸음을 걷고 있었다. 영화주의자가 아닌데도, 영화를 보는 때가 있고,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닌데도, 그와 같은 영화를 보면서 세포를 얻어내는 슬픈 지혜의 시간이 있는 법이다. 영화가 지금 장안의 화재라고 하는데, 영화주의자가 국적이 한국이 되는 것이 이제는 많이 습관이 되는 것 같으다. 원래 영화가 있다는데도, 사람들의 이구동성이 다 그렇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