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반민중문화이야기

계산에서의 무에 관한 연구: 어제 역사저널 그날을 보고

by 마음대로다 2018. 5. 28.


계산에서의 무에 관한 연구: 어제 역사저널 그날을 보고






무는 너무 빠른 계산을 갖고 있다. 그것은 어린아이가 처음부터 슬픈 클래식을 끼고 사는 것과 비슷하다. 여자는 남자를 보면, 군사부일체로 여기기 좋아하는 것처럼, 남자도 마찬가지, 쿠데타라도 일으켜서, 전쟁에서 총을 맞고 죽고 싶은 것처럼, 처음이고 혼자이며, 계급이 더러워서 그렇지, 내 아이들에게 야마하 빵이라도 한 덩이 줄 수 있는 것이 생기면, 운을 향해 돌진하고, 도박하고 싶은 마음 뿐인 것이다. 그것은 여자도 마찬가지. 처음에는 그들이 건립한 우주 하나 뿐인 오아시스가 아깝고, 생명처럼 여겨져서 그렇지, 자기 작은 두뇌에도 계산이 명확하게 들어오는 일이 생기면, 어느 낭떠러지에서도 떨어질 수 있고, 폭탄을 가슴에 품고 첨성대처럼 죽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문명이, 이런 숱한 클래식한 주제들을 딛고, 계단으로 건립하고, 때로는 그 계단에서 하늘로 사라지는 길을 걷다가, 드디어 지금에 이르른 것이다. 


존재와 착한 마음이 대결하여, 어느 것이 관념적으로 우위인가 하는 것이 그것일 것이다. 장자의 잡편에도 나오는 내용이다. 착한 마음은 무수한 사람들이다. 그렇게 의사소통이 되는, 알 수 없는, 그리고 보이지 않는 집인 것이다. 존재는 그나마 발꿈치를 제하는 것으로서, 착한 마음을 어떻게 해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랬더니, 온 몸이 적당히 잘린 것들 투성일지라도, 백의 착한 마음, 천의 착한 마음, 만의 착한 마음이 기억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기록에 남기지 않으면, 다시 처음부터 인간은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원래 그렇게 지음을 받았다면, 인간이 그와 같은 길을 가는 것이 무슨 잘못이고 대수이겠는가 우리는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임진왜란도 그렇다. 한번 관심을 갖게 되면, 도저히 잊혀지지 않고, 굉장히 멋진 계단 위에서, 사라질 수도 있는, 사라의 즐거운 위기가 도래하는 것이다. 


문희를 닮은, 그러나 요즘 사람처럼 몸매가 아름다운, 여자를 우연히 만나, 남산 그 아름다운 계단에서 가위바위보 놀이를 한다고 해보자. 때로는 한번 보고 지금껏 보지 못한 한젬마를 다시 만나, 이제는 더러운 육체끼리, 부싯돌이라는, 시적 소재 밖에, 남은 것이 없는 사람으로 질주를 한다고 해도, 사람들에게는 죽은 사람에게 부장품으로 함께 넣어줄 수 있는 쌀쌀한 우산 정도는 되는 것이다. 가위바위보를 하고, 고통스럽지 않게, 진 사람이 하늘 나라로 가고, 이긴 사람이 천당으로 가는. 우산을 편 사람에게, 제국 팽창의 기억이나, 조선을 침공했던 길의 파노라마가 얼마든지 내보일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주자학으로 보면, 엉터리 양명학, 양명학의 시작은 바로 주자학이 양명학이라는, 혹은 주자학이 다른 주자학에 의해서 양명학으로 분류되는 시간일 것인데, 처음부터 그렇다면 양명학으로 시작하는 것들의 시간은 어떻게 된다는 것인가? 제아무리 순수 양명학적 물리학을 찾으려고 해도, 반대의 관점에서 보면, 반드시 주자학으로 귀결되게 되어 있다. 어쩌면 유학이라는 말이, 사자의 유언에 관한 학문이라는 나의 해석이 가장 들어맞는 것일텐데, 우리들의 생명은 그렇게 곽한구로 집결되는 것일 수 있는 것이다. 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이 도량형을 통일한 것이었다 하는데, 선조의 몽진이라는 천혜의 소재가 그렇게 시도때도 없이 들어맞는 것이 되는 것이다. 서양의 문학이나 철학, 예술이나 음악 등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우리가 몽유병에 걸린 사람처럼, 그렇게 팔도를 돌아다녔다고 하면, 어느 누가 서양 정신이 서양에만 있고, 그와 같은 선조에게는 없다 할 수 있겠는가? 선조가 아무런 결실 없이, 다만 그런 마음 속의 곽한구만을 보고, 행여 왕된 신분에서 무언가 하나 기여할 수 있겠는가? 마음만, 마음만, 부담스러운 작품 몇 개를 두고 하나님이 갸륵하게 보고는, 그러나 마음만 받겠다고 하는 사람이 되었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에게 과연, 위대한 동도서기가 없는 것이겠는가? 


하필, 오늘 예보도 없는 비가 내려서, 생각이 가중되었다. 나는 별 생각이 없었으나, 워낙에 사람들이 슬픔에 젖어서, 나보다도 역사저널 그날의 내용을 두고, 해석학적 침투가 이뤄졌는지 모를 일인 것이다. 신발이 낡아, 금방 젖는데, 선풍기를 크게 틀고 그 앞에 두니, 마치 비오는 날, 옛날 프로펠러 비행기를 타고, 중국으로, 몽고로, 태국으로 돌아다니는 느낌이 든다. 마음이 급한 것이다. 마음이 급한 사람 중에, 진실로 급하고, 진실로 착하고, 진실로 생산적인 사람이 있는 것이다. 대부분은 공연히 급하고, 약간 거리두기가 있고, 다만 클래시컬하고, 조금은 셰익스피어리언하는 법이다. 내 젊었을 때 그랬던 것 같다. 너무 빨리, 클래식 슬픈 음악이 좋았고, 지금껏, 거대한 함선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사물은, 악마의 것이다. 그것이 다시금 인간의 소유가 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간이 되기 위해서는, 말 그대로 시간이 많이 걸린다. 얼마나 문명은 많은 사물을 가지고 있는가? 내가 차마 셀 수가 없다. 얼마나 문명은 갑자기 먹을 것을 많이 풀어, 다만 먹는 것으로써 소설을 만드는 짓을 차단하고 있는가? 진짜 맑고, 정확하게, 배고픈 듯한 무공과 함께, 아주 맛있게 먹었던 것이, 그 옛날 강감찬 장군의 살수대첩만 같다. 성경을 가지고도 지옥을 갈 수 있고, 그것은 아름다운 차를 갖고도, 차마고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조총에 열등하였고, 일본이 조총에 훌륭한 국가의 기미를 보였다. 우리에게 원시적인 머쉰건이 있었다는 것을 제하더라도, 일본 왜구의 한국 침략이라는 것이 더 이상 없는 일이 되고, 문화적인 몽유병에 걸려 한국으로 마지막 여행을 떠나는 일이 차단된 뒤에, 그와 같은 시간 안에서, 부지런한 상호노력으로써, 그 중간을 맞춘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모른다. 그것은 신의 경지와 같아서, 마치 아름다운 친구 두 사람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존재가 되고, 한 사람은 '무'가 되는 시간이, 마치 태초의 울릉도와 독도처럼, 인간에게는 가능한 것이다. 그렇게 일본을 아름다운 언덕으로 하나되게 하는 일이 그렇게 어려웠는데, 조총 하나로, 조총이 악마의 소유였기 때문에, 갑자기 일본이 사탄의 소유가 된 것이다.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과연 신은 권력의, 영원한, 악마적인 후원일 뿐인가? 결단코, 신학이 되고, 성경이 될 수는 없는 것인가? 조총 하나로 악마가 되었던 인간의 역사가, 다만 피를 많이 보아서 그친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게 서양에서 얼마나 닳고 달았으면, 일본에게도 조총이 흘러들어왔겠는가? 그것의 불꽃 심지도 마찬가지이다. 조총으로 악마들이 실제로 많이 죽기도 했던 모양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