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의 운명
하필 광해일까? 내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고, 덕망도 있는, 영화를 지금껏 보지 않은 것은 이름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만이 갖고 있는, 일종의 중복 투자 금지의 법칙에 위배가 되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중복 투자와 같다. 삼복 더위와도 같고, 말복에는 어쩔 수 없이 자기 개를 잡아 먹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중복도 하고, 삼복도 하는 이유는, 말복에 이르기까지 엎드리고 머리를 찧는 것은, 어렵기 때문인 것이고, 거기에 무한이 있기 때문이며, 그것을 익히는 것이 자기에게, 가족에게, 자기가 처한 집단에게 좋기 때문일 것이다. 원효가 해골물을 먹고, 의상이 중국 옷을 좋아했던 것은, 정말이지 주자학과 양명학의 원조격인 구조가 아닌가 한다. 그래도 우리는 하나의 말을 할 수 있는데, 무슨 옷이 또 좋은가 하는 것일 것이다. 옷은 말이 없고, 옷은 움직임이 없으며, 옷은 정말이지 아무런 힘이 없다. 그와 같은 의상을 좋아하는 것은, 자기의 살과 뼈를 모두 주어도 좋다는, 사랑의 대지와도 같은 선택인 것이다. 우리가 가난한 조선반도에 살면서, 익히게 된 것이라곤, 중복 투자가 아니라, 그와 같은 해골물들 뿐일 것이다. 해골물을 마셔도, 벗은 몸은 부끄러운 것이고, 같은 옷을 입더라도, 자유가 남다를 것이다. 나는 광해를 보지 않았고, 광해를 그나마 외국인들보다는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광해를 이야기할 때, 국사 선생님이 가장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는 것을 알고 있고, 내가 누군가에게 끌려가, 임신케 하고, 여자의 아버지가 국사학과에 가지 않으면 신고하겠다고 엄포를 놨다고 하면, 당연히 국사학과에 갔을 것이다. 우리는 그와 같은 개성에, 적당한 디스인터레스트, 그러니까 무관심한 척을 한다. 나는 정말이지 국사학과의 디스인터레스트, 그러니까 코난 만화 영화에서의 인더스트리아와 같았다 할 것이다. 어떻게 도시가, 하늘 아래 거대하게 있는 것이 아니라, 지하에, 가장 크고 우람한 모습으로 있었던 것일까? 그와 같은 묵시적인 표현은 어째서 우리에게 동의와 침입이 이룰 수 있었던 것일까? 나는 조선의 조건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광해의 행동은, 내가 동양의 고전을 늦게까지 읽지 않은 것은, 그것은 나의 조건에서는 당연한 것들 천국이었기 때문이다. 광해의 정치와 외교는, 내게는 당연한 것들 인더스트리아였던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버스 운전 기사가 종점의 차고지에서 차를 끌고 나와야, 사람들이 출근을 하고, 등교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가 세계 열강에 비해, 군사력, 경제력, 정치력, 문화 예술의 능력이 뒤쳐진 것이, 조선시대 때부터 고쳐지질 않고 있는 정신적인 고질, 어떤 체제론적 습성 때문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광해의 언행이 매우 자연스러운 도시적 풍모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니까 그저그런, 그러나 그것을 집중해서 지지하고, 사람들은 연구하고, 좋아하고, 당시 옛날 수십 년 전에는, 지자들의 인기를 끄는 역사 연구의 아이템은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관심이 없었다. 사람들은 전면에 있는 것을 향해 세포가 움직이게 되어 있다. 그렇게 중복 투자를 하고 나면, 아무리 맥락이 있고, 다만 집중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한번 세포가 죽으면 살아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언제 광해를 연구할 수 있을 것인가? 다른 못한 전면들이 나타나고, 그것들이 나의 전면 세포를 보다 적극적으로 죽이고자 한다면, 그제서야 공부할 수 있는 것인가? 참 묘사가 이렇게 슬프다. 숲은, 영어로 슈프림, 혹은 슈림프, 그렇게 슬플 수가 없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다만 숲이었을 것이다. 누군가 대놓고 못질하고, 십자가에 매달고, 머리에 가시면류관을 씌우고 하지 않아도, 우리는 숲만 걸어도 슬프고, 나의 전면 세포들이 젊었을 때는, 살았던 것이 더욱 살고, 밝았던 것이 더욱 광양, 배가가 되었겠지만, 나이가 들어서는 아이들에게 산소통을 넘겨주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의상이 말이 없는 것처럼, 나무도 말이 없다. 패턴이라는 것이 시그니쳐 버거, 그러니까 가장 기호와 문자에 가깝다 하더라도, 나무가 갖고 있는 잎들과, 시니피앙, 그것들의 심원한 미닝들에 비할 것이 아니다. 산딸기가 그렇게 많고, 나목이면 나목으로서 좋아하고, 꽃가루가 날리면, 그것을 두고 그렇게 반야지에 빠지며,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주경철 박사처럼, 우주를 알고, 주경야독하는 것이 습관이라면, 대체 문자를 갖고, 그것을 더욱 복잡하게 말하고 만들어서, 하루이틀, 사람들에게 독약을 먹이는 것처럼, 마침내 사람들을 맹자로 만들고, 그처럼 자기들끼리의 권력의 산성을 짓는 일이 어째서 가능하겠는가? 일을 하면 피곤할 텐데, 무슨 원리를 갖고, 주경야독을 하겠으며, 그것의 방법은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무슨 책이 있어서, 다만 지식향이나, 오만, 혹은 지식 권력에 편집됨이 없이, 독자적인 정신의 계단을 오를 수 있겠는가? 말하는 사람이 능력이 있어서, 내일의 아이템풀을 하나씩 둘씩 나눠줄 수 있겠는가? 공부하면 쏘게 되어 있다고, 폭죽놀이를 그리 잘하고, 그렇게 좋아하더니, 전쟁에서는 상대방 군인들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것이다. 왕이 얼마나 편하겠는가? 왕이 얼마나 친구가 많을 것이며, 왕이 얼마나 자기 왕권의 수호를 위해 참으로 공부하였겠는가?
너무 서울로 돌아가, 사람들을 만나자마자, 왕족들은 슬픔에 잠겼던 것 같다. 광주라는 말도, 종말의 시기에는, 이렇게 가장 작은 곳이 가장 넓은 빛과 같은 곳일 것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러니까 내용은 좋지만, 조건이 좋지 않은 것이다. 서울이라는 말이 넓고, 아름답고, 한양이라는 말이, 우리가 보통 생각이 바르지 못하고, 별로 공부함이 없는, 겉 모습만 멋진 여자를 한양년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서울은 그런 여자들이 공부만 했다 하면 그렇게 시원하고 아름다울 수 없다는 뜻을 갖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무안에 일로가 있는 것처럼, 사람들의 생각과 시간, 그리고 관심은 오직 일로 이뤄져 있고, 사랑은, 진정한 사랑은, 생명의 폐모살제, 그러니까 거대한 자기 본능적인 연속의 한 성기일 뿐인 것들, 그 연속에서 벗어나는 것이란, 몽탄이라는 말처럼, 나폴레옹의 사전에서와 같이 오직 불가능한 것인 것이다. 보다 크고, 산세가 조금 울렁불렁하긴 하지만, 그래도 고래등 같은 집으로 돌아가자 마자, 깨닫는 것이라고는, 자기들은 그냥 살충제만 겨우 뿌리고 지내는 사람들 같다는 전체 느낌 뿐이었는 것이다. 왕권은 이 위대한 지방 호족과의 정신 전쟁을 치르면서, 임진왜란은 일종의 한번 맞으면 죽을 수도 있는 잡지의 별책 부록, 잡지 보다 비싼, 과도한 선물 같은, 그래도 자연과 인공의 감각 틀 사이에서, 부단히 살기를 바랐을 것이다. 영창대군의 죽음이 실제인가 아닌가 하는 것도, 갑자기 그와 같은 지독한 사이버네틱스 속에서는 감각이 되지 않는 것이다. 분명 분당이 다만 구조이며, 허울이고, 저마다의 관념을 갖고, 이순신보다 훌륭한 일기를 쓰며, 나름의 그것의 대위법과 같은 성리학을 전진시키면서, 중세 봉건주의 같은 것은 쉽게, 어느 날 아침, 동시에, 누군가의 총소리와 함께,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우리 옛날에 잘 썼던 영단어, 나이브, 사장님 나이스가 아니라, 사장님 나이브, 그렇게 나이브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진보는 나이브한 것들의, 혹은 이노센트한 것들의 포토샵, 그러니까 영창대군과 같다. 기아가 맞물리는 것이면, 기아 타이거즈와 같다. 광해라는 이름이 나중의 별호라고 하더라도, 그와 같은 분위기를 따진 것이었으면, 지금처럼 차가 많은 시대의, 차 한 대 없는 실제의 사람들의 익숙함 같은 것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영창대군은 실제로 죽었고, 붕당정치도 실제로 아무런 일기씀 같은 것도 없이, 다만 폐모살제의 바깥다리 걸기의 뇌질로써만, 우리가 괴물을 본 적이 없지만, 그것들의 충분한 요소들을 우리는 만나고 있었던 것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사람들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만 건강한 조직으로써만 붕당이 있어야 할 것이었으나, 임진왜란이 어째서 일어난 지도 모르겠는, 그런 무식한, 겉모습만 식자연하는 사람들의 무리가 있었던 것이다. 왕은 그런 식자연하는 귀족들과 관리들 사이에서의 최종 병기와 같다. 그러니까 자기들도 신하 권력에 있으면, 그런 생각을 일절 하지 않았을 것이나, 왕이 되고 나니까, 사통팔달이 느껴지고, 드디어 고급한 고뇌와 의식이 생긴 것일 수 있는 것이다. 어느 때는 왕이 의식의 슈프림을 갖고, 어느 때는 신하들이 그것들의 수풀림을 가질 수 있다. 그렇게 평생을 무의미한, 추상적인, 소리만 요란한, 탁구나 치고 자빠진다면, 우리로서는 그런 사정을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임진왜란처럼, 일본이 우리를 침공한 객관적인 감각이, 분명 다른 내적인 관계와 경험을 가리키는 것일 수 있는 것이다. 왕족들이 똘똘 뭉쳐, 조금더 시간의 운명과 한계를 끌어당기고자 하였으나, 그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그런데 믿었던 신하들이, 늘 자기들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은 평생의 분위기, 그런 그들이 오히려 왕권보다 저 멀리에서부터의 괴물성을 내비치자, 영창대군이 그만 처음에는 심리적이었으나, 이내 신체적인 숨마저 막혔던 것일 수 있는 것이다. 깊은 구중궁궐 내에서, 광해와 그의 가족들이 언제 죽었는 지는 알 수가 없다. 어려서부터 너무나 필사적이었고, 그들 만의 리그, 자기들에게 닥친 경기에서 단 일승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고, 분명 승리의 기운을, 전쟁을 겪고 나면 사람들이 겸손해지고, 그나마 정신성이 짧은 시간이나마 바르게 잡힌다는 것을 알아서, 단단히 엿보았던 것 같기도 하다. 하나의 부속이 없다면 무엇을 없애도 되겠는가? 그런 마지막 승부 같은 것. 광해와 가족들은, 브레이크를 없애주십시오. 우리에게는 필요 없습니다 답했던 것 같다. 그들은 그 정도로까지 유순하였으나, 결과적으로는,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나머지의 사람들은 전체 수학의 침입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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