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술 집 웨얼아유후롬......
우리가 서울에 살면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동작동 국립묘지, 의식의 한계 상황 같은 것이다. 그것은 비단, 명주, 대학까지 나와야 갖게 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사람들은 돈을 벌고, 실패하는 사람도 있지만, 서울이니만큼 쏟아지는 곳이 많아서, 그것을 정리하는 것만 해도 현상금 유지는 되는 것이다. 여자들이 눈 뜰 때, 그것이 남자만 해도 어려워 죽겠는데, 그 앞에서 죽지 않을 여자는 없는 것이다. 여자가 먼저,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한강의 모래 사장 위에서 죽고, 남자가 이것저것 시도하다가 죽고, 그것의 내용은 그것인 것이다. 우리가 연애를 고등학교 때에 하지 않는 것은, 시간이 적절치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국문학과나 신학과, 음악과나 미술대학을 가지 않는 것은, 그것도 마찬가지, 시간이 적절치 않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과를 나와서, 과를 살리지 못하는 사람은 잘 모를 것이다. 아예 들어가지 않고서, 평생, 올림픽 대로를 달리는 사람들을. 기가 막힌 사람이 있어서, 생명의 증거가 되는 것이다. 그는 부모님의 권유대로, 일반학과를 나와서, 취직을 하고, 돈을 모으는 법을 익힌 뒤에, 미술가가 된 것이다. 그리고, 서울의 기가 막힌 곳에다가, 찾으면 열리는, 아지뜰리에를 마련하고,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다. 그것도 아니다. 미술을 한다면, 달리를 할 것인가? 클레를 할 것인가? 아니면 듣보잡 숱한 현대 미술가들을 마치 대단한 것인냥, 자기 마취를 하여서, 어떻게든 진행하고자 할 것인가? 사람들은 본질이 고통이라고 말하는데, 비본질도 얼마나 고통인지 모른다. 참 서울이 이것저것 많아서 좋다. 내가 광양에 살면서, 숱한 사람들을 만만하게 보는 것이 아니다. 서울의 각종 공사관들이 만만하였던 것 같다. 사람들은 그러니까 그와 같은 과에 입학을 하지 아니하고 사는 것이다. 서울대 본관이 그것의 존재론을 과시하는 것이 있다. 어떻게 보면 무등산 산장 계곡 같기도 하다. 다들 같은 포지션이겠지만. 그래도 호우가 쏟아져, 물이 범람하였다는 소식을 전해받으면, 지리산 쪽 보다는, 무등산의 모습이 엿보이는 것 같은 것이다. 우리들의 독립문이 파리의 개선문을 어떻게 한 것처럼. 그 숱한 사람들이 서로의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자는 사람을 깨우고, 잠이 들면 죽는 것이다고, 어떤 설원 위에서처럼, 우리말 그대로 일깨우는 것이다. 그와 같은 독립문을 통과하는 사람은 드물다. 우리 한강이 부단히 시도하는 것 같으나, 김은숙 작가에게는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공지영이 부단히 노력하여 온 것 같으나, 뭔지 모르게 이슈주의자적인 피를 속이지 못하는 것 같다. 사람들은 남자 아무개가 때로는 성공하는 문장들이 있다고도 한다. 나는 별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묘한 매력이 있지만, 서울의 운명을 감당하지 못한다. 김진명은 어떠한가? 감당하는 것 같은가? 그에게는 그런 또한 이상한 피가 있는 것 같다. 목소리도 이상하고, 눈빛도 이상하고, 한번 만나서 지원금을 타볼 수 있을까 관심이 갈 정도로, 제목과 목차만 봐도 일반인 보다는 탁월한 느낌이 있다. 그러나 마을버스에 올라타서, 우리는 갑갑한 마음을 지울 수 없다. 우리가 세상을, 세계를, 정복한 것으로서,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의 애증, 그러니까 개소주 같은 존경을 받게 된 것은, 모자라면 모자란대로, 건내고 건내받는 숱한 경험 때문이었을 것이다. 때로는 인도의 국기가 우리의 것이라고 해도 되는 것이다. 태극기가 북한기, 일본기, 중국기, 미국기에 비해서 아름다운 것은, 부처님의 법륜이 거기에는 담겨져 있기 때문인 것이다. 얼마나 대학 때에, 우리는, 우리가 우물처럼 담겨진 곳을 가로지르는 내용들의 논문들을, 눈물들을, 마치 한국 영화 신세계를 보는 것처럼 좋아했는지 모른다.
예술은 이중과 같다. 그런데 서울은 예술이 없다. 그래서 한동안 서울에 이연걸의 무술 영화가 유행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와 같은 무술 영화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얼마나 사람들은 예술을 하고 싶어하는지 모른다. 멀쩡한 사람도, 다쳐서, 한달 가까이 병원에 누워있다 보면, 조용한 병실 천정으로, 새벽이나, 사람 없는 한낮에 한강이 흐르는 것을 발견하곤 한다. 남자들이 군대에서, 더더욱 연애에 대한 환상을 산불내는 것은, 티비가 계속해서 삼차원처럼, 사차원처럼, 사람들을 사로잡았기 때문인 것이다. 일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서울에서 대기업을 다니는 이유는 무엇인가? 금지되어 있는 사내 연애를 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대학원을 다니는 이유가 무엇인가? 대학원에서 때로는 죽을 것처럼 다니는 이유가 무엇인가? 학문에 대한 멸시인가? 그것은 정말 조심해야 한다. 대학원에서 공부한다는 것은, 아이들에게는 신의 축복 같은 것이다. 대학원에서도 공부를 마감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아이들이 공장으로 내몰리지 않게 된 것이다. 영어 있고, 원서 있고, 원서를 읽는 둥 마는 둥, 전공 영어를 보는 둥 마는 둥, 그 안에서 기필코 진리의 다이아몬드를 찾기 위해서 노력하기 때문에, 사탄이 아이들을 때리는 시간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회사에 취직한 여자가, 뒤늦게 떠올리는 선배가 없다는 것은 셰익스피어 오대 비극 중에 하나일 것이다. 회사에도 취직하고, 공부도 시간 있을 때 하며, 남자가 여자를 데리고, 일종의 섹스에 이르는 병과 같은 예술에도 본능적인 기교를 갖고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의 이름을 가리켜, 서울이라고 할 만 하지 않은가? 보통 말씨나 성격이 넓고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는 것을 서글서글하다 하지 않은가? 일만 하고, 예술만 하며, 예술을 모르는 사람을 가리켜서 서글서글하다 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 써글놈. 써글년이라고 한다. 그것에도 부처님의 법륜이 있다. 우리가 모든 공부에서 실패하고, 부모의 돈으로 연명하다, 취직하여 돈을 벌고 여행하면서, 동남아에 가서 시클로를 타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렇게 예술에 부드럽지 못해서가 아니었는가? 예술이 부드럽게, 충분히 가능해 보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사람들은 결혼까지 한다. 그 어려운 결혼까지 할 정도였으면, 대학원을 한 번 더 다니고, 예술의 이런저런 재료들을 더 한 번 모아 보았을 것이다. 사람은 예술을 할 수 없다. 그것은 논리적으로 그러한 것이다. 예술은 환우나, 병사들의 침상 위에서, 가공의 세상으로나 진행하는, 일종의 인왕산이나 북한산 산맥 같은 것이다. 잔뜩 전라도 말로 벌씨고, 치장하고, 화려하게 꾸민다고 해서, 예술의 혼이 번쩍 하고 나타나기는 어려운 것이다. 우리가 살면서, 우리말 그대로, 서울에서, 뭔가 편안한 예술의 초월성을 발휘하는 사람을 만나기를 기도하여야 할것이다. 예술이 조금이라도 본질에서 벗어나면, 고약해지며, 과학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고, 계급 갈등과 그로 인한 이윤에만 관심하는 조선으로 퇴보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말부터가 그러하다. 글은 괜히 복잡하고, 그런 상태로 아무런 설명이 없다. 말은 그래서 형식적으로 보면 자기들끼리 속삭이는 것만 같은 것이다. 그나마 서로서로 관련을 맺고 있어서, 또 하나의 부처님의 법륜이 되겠지만, 그 안에서 조그만 여자 애가 소리를 지르고, 생각이 늘 마음이 초조한 나처럼, 즉각적인 것을 보면, 그래서 가슴이 아픈 것이다.
서울에서 해가 지면, 그래서 유독 슬픈 것이다. 예술에는 관심이 일도 없다는 것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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