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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민중문화이야기

불쌍한 서양, 불국사를 짓고 천년 동안을 그리 불러도......

by 마음대로다 2018. 8. 8.

불쌍한 서양, 불국사를 짓고 천년 동안을 그리 불러도......




Guadalupe Pineda- Historia De Un Amor

Lara Fabian- Tomorrow Is A Lie



내가 전도서의 솔로몬이 되어서, 세상 모든 학문과 예술을 돌아보니, 우리나라의 것이 가장 좋고 아름답다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닥터, 그러니까 Dr, 혹은 구스, 그래서 더러운 것이다. 더럽다는 것. 그것은 덥다는 것. 여름에 더운 것은 더러운 것은 아니지 않은가? 더운 것이 더 덥게 느껴지는 것이 더러운 것이다. 그런데 영어는 그렇지 않다. 영어는 더티, 그리고 핫이다. 정관사가 늘 더를 찾는다. 우리 인기 보컬 그룹에 더더가 있었다. 전라도 말로, 더럽게 더운 날을 가리켜 우리는 더럽게 덥다고 했었다. 그러니까 그 앞의 더럽은 love, 뜻이 많이 탈각된 것으로서, 강조의 부사어 정도가 될 것이다. 너무 더우면, 더러워지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가 맨 처음 사용하는 모든 것들, 인간까지도 포함해서, 그것은 프레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도 그렇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가, 여름 날, 옛날에는 조금 덜 더웠다는데, 별로 그런 것 같지 않고, 한낮을 지나고 나면, 사람들이 너도나도 더럽게 느껴졌었다. 대신에 시원한 등목을 하고, 부엌에서 문을 잠그고 샤워를 하면, 다시금 깨끗해지고, 깨끗해지는 몸과 마음이, 더운 것에서부터 그 즉시로 탈출하는 것 같았다. 우리나라가 일제의 식민지를 겪고, 이렇게 오랫동안 일본을 증오하는 것을 두고, 중국 사람들이나 인도차이나, 서양 사람들이 보면 약간 실망하거나 싫어할 만한 것이 되는 것이다. 서양의 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유럽의 역사는, 단 하나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식민지. 이퓨고어웨이. 어떤 가수가 불러도 눈물이 알프스 정상에서부터 쏟아질 것 같은. 신라면을 파는데, 그곳 휴게소에서, 한국 사람들에게는 인연과 기쁨의 상품으로다가 공짜로 준다고 하는. 스위스가 세 개의 국어를 국어로 채택하는 것도 중력의 법칙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문화 사회 현상을 갖고, 별로 그렇게 막중한 것의 인과율로써 접근하고, 해석하고, 결론내리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 같다. 그러니까 안 하는 이유가, 무능력의 차원을 넘어, 그런 짓을 증오하는 것 때문에 안 하는 것 같은 것이다. 유럽은 스위스, 그 모자라고, 부족하며, 못생긴 몽블랑의 첨탑으로, 예수님의 종말에 관한 예언처럼, 몰려들지 않을 수 없다. 스페인을 보면, 세르반테스 밖에 없다. 그러나 내용은 의지와 열정으로 요약이 되며, 그것의 줄거리는 사실 요약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나머지 거의 모든 소설이 그렇다. 우리가 소설이라고 부르는 것들의 태반이 그렇다. 영화가 빼앗아가든지, 프랑스 구조주의적인 신학교수 신현균적 성경 이야기로써 양분되고 만다. 누군가 성실한 학자들이 있어서, 철학을 가르치고, 문학을 가르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 모두가 우리들 대림 시티 돈키호테 같고, 비오는 날 비옷을 입으면, 그냥 판초우의만 같다. 우리가 그렇게 그 모든 서양 소설을 읽으려고 하는 이유에는, 피할 수 없는 귀족으로서의 피를 고백해야 하는 것이다. 추상이란 단풍처럼, 그것의 출신이 핏빛이다. 사람들은 추상적인 진행에 관심을 갖고, 그것이 철학이어도 소망을 접지 않고, 그것이 문학일 때는 거의 성욕에 준하는 관심을 갖는다. 그렇지 않은 이유는, 단 한 번도 친구들이나 선생들에게 그와 같은 칭찬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성경을 읽으면, 그리고 신현균의 성경 이야기만 읽으면, 이제는 저녁에까지 배가 부르고, 광주리에 가득 남은 음식들이 담길 것이나, 사람들이 다른 책들을 읽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인민들 모두가, 실제로는 귀족들이어서, 그것의 책의 대용으로다가 커피를 마시고, 금지되어 있는 담배를 피우며, 플라멩고 같은, 마지막 파도 같은, 마지막 귤의 탱고 같은 것을 먹고 춤추고자 하는 것이다. 누군가 영원한 혁명을 이야기 했었다. 그것이 정말이지 아무런 내용 없는 핏빛 철학의 극치가 아니었나 한다. 그래서 누군가는 국가 혁명 달성론인가 하는 주장을 했다고 한다. 그것은 마땅한 말이었지만, 관점에 따라서는 영원한 혁명을 지지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었다. 음악적 센스가 없으면, 그렇게 보이지 않을 것이지만. 나는 이렇게 사람들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들었으면서, 어째서 서양을 가리켜 불쌍하다 말하는 것일까? 나부터가, 그리고 내 말을 듣고 비로소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식민지 Depression과 같다. 식민지란 무엇인가? 디프레션이다. 아무 것도 없다. 불쌍하고, 불쌍한 것이다. 우리는 지금, 우리나라는 지금, 미국과 일본이 실패한 영화들을 만들고 있다. 철학자나 음악가, 사상가나 문학가는 마땅히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나라 영화들을 두고, 우리나라 사람이 만들었다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영화 리얼이나, 이번 영화 인랑을 보면, 리얼과 인랑 마치, 형식적 거울 그림 같기도 하는데, 사람들은 평을 함부로 하고, 영화도 인기를 끌지 못했다 하는데, 또 다른 사람들이 말을 모으기를, 현균씨가 집중해서 보고, 평을 하면 자기들에게도 그 기분이 달라질 것이라는 것이다. 어쩌다가 나는 이런 사람이 되고 말았다. 지하여장군은 없는데, 형식적으로 있는데, 천하대장군이 되어 있는 것이다. 서양 영화가 실패하는 이유 중에는, 매우 다양한 것들이 있는데, 그것 중에 핵심이, 핵심 중에 하나가, 서양 철학사나, 문학사, 그리고 영화사에 걸쳐, 맥락이 조금도 잡히지 않거나, 아주 간단한 인사이트일지라도, 사람들에게 일리있게 설명할 만한 사람이 없어서이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가 데니스 호퍼의 그림을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미술사에 걸쳐, 구겐하임, 그나마 이런저런 입맥들을 만들어낼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사실 호퍼의 그림들은 독립할 수가 없다. 다만 종말론적이고, 갑자기 티더블유 같은 어법의 티투가 그 옆에 서는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영화들은 일본 영화 야베나 오스지로의 것에 비하면 어떠한 느낌이 있는 것일까? 다만 역사적으로 말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어째서 우리나라에 수많은 영화 잡지가 있고, 영화 관련 작가들이 있고, 평론가들이 있는데, 영화들은 모두, 그것들로부터 차단되고, 어째서 나의 소나무 재선충병과 같은, 그런 위기와 그와 같은 예산, 그와 같은 노력과 집중으로만 집중되는 것일까? 그들의 추상, 그들의 함수, 그들의 지식은 다만 이노센스, 아니면 페이소스 같은 것이고, 나의 말이나 겨우 로고스, 그러니까 버려진 사관학교 기숙사 같은 것인가? 


우리가 영화를 만드는 것은 자유 때문이다. 자유는 독립과 결부되어 있다. 우리가 오전에 일제에 끌려가서, 오후 내내 고문을 당하다가, 저녁에 돌아와서 씻고, 감자를 먹었다면, 조금은 더럽지 않은 것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책을 읽기에는 너무 피곤하나, 기적처럼, 마른 하늘에 날벼락처럼, 책을 한 시간 정도 읽었다면, 얼마나 그 하늘은, 초가집이 초라해서 초가집이라 하나, 구름처럼 사라져 가는 하느님들도 보시기에 좋다 하셨겠는가? 그리고 아침에 다시금 불려가 고문을 당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그것에 아무런 억압, 그러니까 디프레션이 없으니, 식민지의 인간이라고 여기지를 못하는 것이다. 일본은 그렇지 않다. 그것이 지금 우리를 박진감 넘치게 한다. 



서양은 전체가 놉틀담의 곱추들 같다. 어려서 싸가지가 없으면, 예술을 할 수가 없다. 그런데, 이상한 디프레션은 그런 과도한 자유를 하나의 옷으로 갖고 있고, 그것을 어려서 입으면, 평생 가짜 예술을 하는 사람이 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참 예술을 하게 하기 위해, 그런 전용 라디오, 우리로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그렇게 예의 바른 아이로 키우려고 하면, 그것의 정도를 부모랍시고 아는 것이 아니어서, 온 몸에 피멍이 가득하고, 마침내 자연스러운 척추까지 굽어져, 곱추가 되고 마는 것이다. 자기들이 어디쯤 있는지, 유럽에 있는지, 남미에 있는지, 예수님은 늘 비유로써 말씀하시니, 그들에게 아무런 고지함이 없으신 것이다. 영화는 참으로, 곱추들의 유럽에게, 영국은 프랑스의 식민지, 프랑스는 독일의 식민지, 독일은 영국의 식민지, 이태리는 거의 모든 유럽 국가의 식민지, 스페인은 프랑코 쏘세지, 그리스는 안티고네, 이런 허리가 펴지지 않는 것인지, 그런 말뚝박기 놀이를 학교가 시작되기도 전에 하고 있다가, 수업 시간에도 특별반처럼 하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정말이지 일거에, 하늘이 허락한 거대한 기회처럼, 달성할 수 있었던 진리와 예술의 참다운 빛이었을 것이다. 얼마나 빚을 내면, 좋아하는 다른 사람이 갚아주고, 그 사람의 빚은 다른 사람이 갚아주고, 그 사람도 돈이 없으면, 죽기를 각오한 엥겔스 같은 사업가들이 돈을 내주었겠는가? 그것은 돈이나 빚 같은 것만 아니다. 존재의 전체에 관한 것이고. 가상이라는 것까지도 사람들은, 그들은 존재요, 예술로 보아줄 수 있는, 너무 가상한 것이 아니면,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조금 언급한 것처럼, 르누아르를 끔직이도 좋아하는, 그래서 수준이 그와 꼭같은 사람이 어째서 나오지 않는 것인지, 그냥 다들 방송국의 연기자들 같고, 방송국의 연기자가 방송이 끝난 드라마의 현장에 다시 가는 것처럼, 다른 사람은 그런 그림을 그리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 되었던 것인지. 그림을 팔지 못하면, 그날로 위벽이 서로 붙어서 죽기나 했던 것인지. 사람의 존재는 어째서 방송국처럼 거대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의 존재는 무한수에 이르기까지 그림자 같을 수만 있는지. 다만 이와 같은 이유에서, 그들이 독립하려면, 한 삼백년, 오백년의 계획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겨우 사십년이 아니었는가? 그래서 우리가 철재에 관해 감각이 떨어졌는가? 민주적인 감각이 서양보다 못했던 것인가? 학문이나 예술, 나와 같은 비평의 관점이나 능력이, 서구에 미치지 못했던 것인가? 독립을 다만 서양 천년처럼, 거짓으로만 했는가? 얼마나 일본이 사랑스러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