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삶은 스핑크스: 허생전의 현 지구적 논쟁에 관하여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 회사나 학교 가기 전까지의 삼십분, 혹은 이십분, 혹은 십분, 그 금쪽 같은 시간에 커피를 마시고, 신문을 읽는다. 나는 정말 서울에서 그런 삶을 살고 싶었다. 그것은 나의 탐욕이 아니라, 그런 것을 계급적 상승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그래서, 나의 철학적 습관 혹은 대계로 여겼기 때문이다. 한국어는 어렵다. 그것이 신문에서 출발한다면 정말이지 훌륭한 작가나 사상가가 나올 수 있다. 신문이 아퀴나스도 아니고, 헤겔도 아닌데, 박지원, 어째서 그렇다는 것인가? 그것은 모르겠다.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고, 연상되지 않은가? 연상호? 숨가쁘게 시위와 군부 독재가 없는 시가를 전철과 버스와 승용차가 달린다. 그리고 나는 내가 신문 칼럼리스트가 될 것이라고 연상했다. 그런데 지금, 나는 마치 곧 개봉할 미국 영화 베놈처럼, 그런 사람이 되어 있는 것이다. 작금의 세계는 먹고 먹히는, 가뇽의 플레시 백, 세계이다. 오늘은 이것이 먹고 있고, 내일은 러시아 인형처럼, 저것이 먹고 있다. 우리는 슬프다가, 우리는 지진희 일어난 것 같다가, 우리는 막강한 서울의 프로그램처럼 진행하는 것이다. 사탄은 언제나 우리에게 심퍼씨가 없는 것을 타박한다. 그것의 햇빛과, 그것의 무화과. 사탄은 우리에게 지진을 일으키고, 심퍼씨가 없는 것을 늘 타박한다. 우리는 슬픈 음악처럼 진행한다. 오늘 저녁 누군가는 다시금, 아무런 오류를 찾을 수 없는, 그와 같은 오징어 속뼈 같은 곳으로 갈 것이다. 어쩌면 피살벌한 뉴스 사건 사고 속에서, 아시아나 기내식 파동 같은 것을 희구하는. 그러면 주자가 그와 같은 현장, 혹은 사무실로 끌려갈 것 같은 무속 행위. 혹자는 오징어 속뼈로 너무 많이 가면 멍청해진다고들 한다. 그런데 절묘하게도, 그와 같은 넓은 평면은, 한자 한 자를 쓰기에는 좋은 것이다. 결국은 사람 하기 나름인 것이다.
신문은 어느 틈에 구문이 되었는가? 한성순보, 독립신문, 대한매일신보는 다 어디에 가 있는가? 허생전은 어떻게하다가, 전 지구적으로 부활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올 여름 마지막 비처럼, 겨울비, 그 무엇의 부활을 우리에게 시그니쳐 했는지 모른다. 신문을 읽고 나오면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나는 얼굴이 늘 언제나 새롭고 낯선, 그래서 항상 예쁘고, 그런 여자의 아파트에서 나오는 것을 상상한다. 칼럼리스트가 출근할 회사가 어디에 있고, 걸음을 재촉할 이유가 무엇인가? 다만, 태국의, 비엔남의 아침 풍경처럼, 그 수많은 오토바이 중에 하나가 되고 싶을 뿐인 것이다. 그날 저녁에도 오라는 간곡한 부탁을 받고, 오케이 하기는 했는데, 저녁에는 너무 많은 불빛 때문에, 기억을 못하겠는 것이다. 서울은 그만큼의 여자를 갖고 있고, 그만큼의 빈집들을 갖고 있다. 나는 오직 독일 관념론처럼, 오직 관념으로만 그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 그것이 차라리 낫다 하는 사람이 있고, 포기주의, 그렇지 않다 하는 사람이 있다. 열정주의. 우리는 기본적으로 열정주의이다. 어떻게 하다가 허생전에도 우리는 밀리게 되었는가? 어떻게 하다가 나의 이런 관념적인 시공간의 컬럼에게도, 모든 사건사고가 밀리게 되었는가? 너무 영향력이 강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실체가 어엿하고 떳떳하면, 나의 것과 경쟁해서, 지진이나 태풍까지도, 그렇게 원인의 집을 오고가다가 소멸할 수 있을 것이다. 때로는 너무 치졸하고, 너무 뻔뻔해서, 사탄이 이 때다 싶은 느낌이 오면, 여지 없이 일어나는 것이 지진이 되었다. 그것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누가 허생전의 잘못이라고 하겠는가? 그 두꺼운 열하일기보다, 허생전 하나의 이야기가 낫다 말할 수 있는 우리들의 한국어 능력에 과연 무슨 차별, 그러니까 차이나가 있겠는가? 사람들은 일이 어려울 때, 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현균씨가 당연히 지금 모르거나, 영원한 시간을 주어도 자기에게 따라오지 못할 것이다는 느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에게 만성이 되면, 그 모든 것이, 점차로 두려움이 생기는 것이다. 그것의 지능의 총합이, 차원의 인테그러티가, 결국에는 현균씨의 피라미드 같은 글 하나에도 미치지 못할 것 같기 때문이다. 하나도 같은 글이 없다는 것이, 입체에 차원에 내던져진 피라미드 돌의 한 뜻이기도 하다. 왜 같으면 안 되는가? 같아도 좋다. 그러나, 허생전의 내용처럼, 임진왜란도 있고, 그 이전의 복잡다단한 조선 내부 사정도 있고, 병자호란도 있고, 이순신도 있고, 난중일기도 있는데, 그 모든 일들이 지금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조건 속에서, 같은 얼굴, 같은 두뇌 구조를 한다는 것은 기이하고 이상한 일이 아니겠는가? 같아서 좋은 것이 있고, 어제 누군가의 형세라는 말의 해석처럼, 달라서 좋은 것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다만 지구의 인구들이, 같은 두뇌를 하고 있는 것 같으나, 피라미드처럼, 끝없이 다른 시간을 살아가는 다른 두뇌라는 것을, 그와 같은 방법 만이 현대를 살아갈 수 있고, 동시에 좀비가 되지 않는 길이라는 것을 사실 인정하기 싫어한다. 피라미드는 해석하기를, 기둥은 존재이나, 마땅한 비교가 없으면, 고추밭의 고추처럼, 남몰래 고추 없는 남자나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기둥을 바로 옆에서 비교해야 하고, 그와 같은 오빌리스크가 없다면,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면서 높이 솟아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기둥은 자지이다. 오직 피라미드처럼 노력하는 사람에게만이, 기둥은 존재일 수 있고, 철학적 존재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기둥이 수 날을 거쳐도, 철학적 존재가 되지 못하면, 지금의 우리나라처럼, 미국의 오래된 전통처럼, 북벌, 그러니까 순진한 군인들을 꼬셔, 민간인들을 납치해서, 막강한 신체 변형 쏠져들로 만들고자 하는 영화나 꿈꾸게 되는 것이다. 그 옛날에, 좀비들로 한국에 상륙한 사람들을 모아놓고, 조사를 해보니까, 유신론자들이 절반이고, 무신론자들이 절반이었다. 그러다가 조금씩 중상주의자들이 늘어났다. 그것이 이상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지식이 분명 회의주의적 반열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요셉처럼, 가족들을 위해서.......
어쩌면 그것이 터닝
그러니까 버닝 포인트가 아니었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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