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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원작 소설과 영화의 길항 관계

by 마음대로다 2018. 3. 30.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원작 소설과 영화의 길항 관계






우리는 이와 같은 주제를 접할 때마다, 연구 소재, 카이저, 굉장히 좋고, 여름 하나니, 됴코, 우리들 마지막 삶의 캠브리지 유니버시티를 느낄 수가 있는 것 같다. 영어는 한계가 있다. 그렇다고, 한니발처럼 한국어가 한계가 없을 수 없는 것이다. 라틴어는 한계가 있다. 뭐 특별한 저작이 없기 때문이다. 히브리어 헬라어는 한계가 없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대놓고 한계가 없고, 히브리어는 그냥 한계가 없다. 그러나 집 짓고, 들어가 싸늘하게 죽으면, 한계가 생기는 것이다. 어쩌면 파르테논조차 고백록, 그러니까 포기하고, 일찌감치, 여수 갓김치, 배움에 열중하고, 생산적인 우주를 경주하자는 제스츄어일 수 있다. 내 이런 한 말도 의미가 심장한 것은, 그 어떤 해석보다 좋고, 본질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영어를, 그 한계 많은 영어를 공부하다가, 모국어로 소설을 쓰는 것을 좀더 됴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안타 홈런, 영어를 포기한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아닌 것이다. 이상하게 성경과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는 젊은 시절의 교육에는 막대하나, 현실 정치적인, 이화여자대학교의 상권적인 데에는 별로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사람들이 그것들을 공부하지 않는 살인적인 잘못을 저지르는데도, 살아 숨쉬고, 죽기까지 이순신 장군의 죽음처럼 비밀로 간직하고 지낼 수 있는 것은, 그마만큼 재생유물론적인 인과가 관념에 준하는 회전을 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아름다운 플라톤의 대화록. 혹은 한번 써보시세지 하는 것 같은 사도바울의 예수님 찬양 신학 서신의 모습들은, 예컨데, 베드로전후서의 기자와, 야고보서, 히브리서 기자는 성공한 것 같은, 요한이라고 불리는 사람은, 다만 이름에 의지하지만, 복음서조차 다시 쓰고, 요한일이삼서, 계시록까지 쓴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런 것 말고, 우리의 익숙한 안개속 기행 말고, 플라톤의 대화록은 한 번씩 다 쓸 수 있는 세계 정신은 되지 않겠는가? 푸코가, 데리다가, 촘스키가, 벤야민이, 아돌으노가, 제이머슨이, 아니면 수샌 손택이, 나는 이렇게 흉내내었다 하면서, 고르메니데스, 혹은 플로디리어스, 소크라테스가 이번에는 아주 아름다운 연극을 보고 와서는, 그래도 우리에게 남는 것은 사진이고, 아니 육체고, 그래도 정신이라는 식의 맥심을 우리에게 한잔씩 타주었다고 하면, 야, 이건 정말 데리다의 글인지, 아니면 플라톤의 글인지 모르겠다 하지 않겠는가? 그 기쁨. 모르겠는데, 기쁜, 몇 가지 안 되는 일들. 세상. 사랑의 범인과 진짜 사랑에 빠지는. 플라톤이 물건을 누가 훔쳐갔을 때 우리는 기뻐하는가? 하니 제자 중에 하나가, 아닙니다, 굉장히 신경 쓰이고, 고통스럽기도 합니다 답하고, 그런데 우리의 마음을 훔친 사람인 경우에는, 우리가 남자들이니, 어떤 여자가 있는 경우에는, 어떠한가? 같은 것인가? 아니면 다른 것인가? 굉장히 신경쓰이고 고통스러운 것이긴 합니다만, 물건을 잃어버릴 때와는 조금 다릅니다. 바로 그것일세. 이런 식의 문장을 데리다가 썼다면, 정말이지 감쪽같다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못한다. 능력자는 있을 수 있다. 능력자의 경우, 못하는 이유는 능력에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대게의 무능력자인 경우, 능력이 되지 않으니까, 그것을 우리가 죽어도 좋을 시간만큼 길게 늘이고, 마땅한 장면 전환을 가져오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스에서, 그것의 처음과 지금, 때때로 그와 같은 색깔 연기의 시대가 있었을 수 있다. 연극의 내용들이 셰익스피어의 것에 비하면, 단순하고, 정말 고대의 것 같고, 그들은 다만 생계에 바쁘다고 하는. 어떤 요리되지 않는 생계를 먹는 우리 영화의 한 장면. 그것은 정말이지, 부르스 리이고, 미스터 리인 것이다. 문장을 낭비하자면, 부르스 부라더스인 것이다. 우리는 아프지 않기 위해, 맞지 않기 위해, 도의 길을 뚫고, 행진하는 아기 사자와 같다. 도에 이르러서는 거의 모든 것이 맞지 않기 위해서이다. 섹스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은 슬픈 캉첸중가. 정상. 섹스하다가 사랑이 발견되는 뒤늦은 경우도 태반이고, 그것이 정말이지 세상 가장 슬프고 아름다운 그레고리안 성가가 아닌가 싶다. 도에 이르지 않아서도, 플라톤의 대화록은 자기 이해와 정의로운 전체의 면에서, 한번 시도해볼 수 있는 거룩한 대상이, 그것이 제법 어렵다는 것을 알지만, 도에 이르러서는 영영히 불가능한 대상인 것을 다시 한 번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산업적인 측면에서 우리에게 나타나고, 누구나가 하고, 행하고, 지금도 카페에서 지치지 않고 하고 있는 대화의 측면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서 사라지는 것이다. 우리가 윤상의 북한 공연을 볼 때 그러한 것이다. 그러니까 나의 인상과 분위기를 공연에서도 연출했으면 하겠으나, 나의 말과 글들은 시황제의 마차처럼, 그런 식의 레전더리, 잠깐 커튼이 열렸다 닫히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는 오직, 그와 같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다만 산업적으로 만나는 인간의 역사의 파르테논 신전의 모습과 같은 살아있는 증거가 되고 있다. 이스라엘도 그러하고, 다른 이슬람은 어째서 전쟁하는지 모르겠다. 인도나 아프리카도 모르겠다. 어떻게 하다보니까,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가 거기에 있고, 정말 어떻게 하다보니까 최은희 주연의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가 또한 거기에 덧붙여 있는 것이다. 주요섭은 정신 종말의 시기에 이르러, 자기의 단편 소설이 그와 같은 지위에 있게 될 것인지를 알았을까 몰랐을까? 나는 아주 어렸을 때, 그러니까 옥희의 나이 비슷하게 영화를 보았던 것 같고, 소설로는 보지 않았던 것 같다. 제목이 그게 뭐고, 내용이 또한 그게 뭔가 싶었던 것 같다. 주요섭은 소네트를, 셰익스피어의 것을, 대게의 기독교인은 셰익스피어를 좋아하게 되는데, 좋아하는 여자가 결혼을 안 한다 하니, 그 언니나 동생에게 관심을 두는, 제한적이고 가난한 마을의 더러운 심정, 그래서 소네트를 보았던 것 같다. 그런데 소네트의 내용은, 희곡의 내용들과 연결이 되는 것 같으면서도, 그다지 훌륭하지 않는 것들이 많아서, 후대의 연구가들에게 무시를 당하는 편이다. 마치 둘이 하나 다음의 전체가 된다면, 셰익스피어가 자기의 희곡이 하나가 된다 할 때, 둘은 밀튼이나 워즈워드 코울리지나 다른 소설가가 되었으면 좋겠다 하는 심정이, 그와 같은 구도 속에는 담긴 것 같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다가 읽으면, 그렇게 외롭고, 사랑방, 외국 유학, 그 쓸쓸하고 호젓한 심정에서는 위로가 되고 그랬을 것이다. 피어 노 모어. 밝은 빛도. 이런저런 내용들도. 그리고 귀신들이나, 무서움 같은 것은 이젠 없을 것이다는. 시의 마지막에서는, 콘슈메이션이 있을 것이다는. 안 읽다가 읽으면, 그것도 아름답고, 독보적이고, 독버섯을 먹으면 안 된다고 하는, 방송에서의 사진과, 병만족의 기행들을 보면, 힘은 없지만 완전한 것 같고 그런 것이다. 그러니 주요섭의 기록이, 데리다식의 말로 하면, 애초의 글쓰기 의도와 함께 생생하게 살아있는 차연의 내용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유학 기간에 썼다면, 그런 것이고, 식민지 한국에서 썼으니, 차연이 아니라, 본연의 것일 수 있는 것이다. 그마만큼 주유섭의 소설은, 그것의 독보적임이, 깊은 인간 정신의 단순한 현상학처럼, 플라톤의 대화록도 같고, 실질적인 내용의 모습마저도, 사도 바울의 서신 같기도 하는 것이다. 그것을 읽을 때 우리는 쓰러진다. 만일 소설만이었다면, 마치 믿거나 말거나의 유물을 다루는 것처럼, 이런 식의 아카데믹한 문제제기가 안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가, 영화가, 눈에 보이는 다섯 산에 불을 내는 것처럼 활발한 것이었다. 우리는 엄밀히 말해 사진이 없다. 좀비들 천지. 사진은 사탄이 좋아하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의만이 우리와 사탄을 양적으로, 혹은 질적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이지 아무런 사진이 없는 것이다. 애들이 툭하면 우는 것은, 아름다운 악보의 진행처럼, 그것은 그들이 아직 사탄이 되기 전이고, 그래서 이기심 같은 것에서도 그것을 자주 보아서 그런 것일 수 있는 것이다. 





"아이. 골치 아파."

"나두."


-영화 중에서


그게 그렇게 슬프고, 도리어 소설가의 내면적이고?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