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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우리의 능력: 옥희 아역 전영선론

by 마음대로다 2018. 4. 1.

우리의 능력: 옥희 아역 전영선론






내가 좋아하는 교수 중에, 어떤 국문과 교수, 지금은 명지대학교인지 하는 분이 있다. 사람은 자신의 키를 붙잡고 있는 사람과 씨름하면서 성장하는 법이다. 내가 김경재 교수님을 좋아하는 이유도 그것이다. 동일성과 이질성이라고 한다면, 동일성이 없다 해도, 최소한 이질성만 피해도, 그 사람은 그 옛날 화랑의 관념의 세계에, 그것의 도반에, 훌륭한 마루를 지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사람들은 김경재가 최고다, 아니다, 신현균이 최고다, 혹은 전철이 최고다 하겠지만, 내가 처음 한신대학교에 입학해서 만난 김경재 교수님은, Bel astre que j'adore 파르테논 같았고, 그것의 공통 교수진들이, 내가 하루에 키가 십센치씩 자라는 콩나무 같은 사람이 되었대도, 김경재 교수님은 내게 아무런 이질성이 없으신 분이셨다. 사람들은 싸운다. 가족끼리도 그렇다. 왜냐하면 이질적이기 때문이다. 돈은 공통적인데, 그나마 몇 개 없는 호흡과 세포로써, 서로가 서로에게, 그렇게 사는 것인데, 누군가 이질적으로 끼어들면, 그렇게 숨이 가빠지고, 헌법을 찾게 되고,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 국민이 국가의 주권이다 하는 말들을 찾게 되고 그렇다. 얼마나 공부라는 것이 이질적인 것인지. 차마 입에 담기도 어려운 것들 천지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그와 같은 발톱을 숨기고 있다. 우리가, 어린아이가, 동산에 올라 뛰놀 수 있는 것은, 독사의 거대한 동산이 그것의 발톱을 숨기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독사는 이질성이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억측이나 억견, 소피스트의 세상이라는 것은, 조금만 이질적이어도, 상대에게 발톱을 드러내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의 처음은, 부지런한 계단과 같아서, 일본인 친구들과도, 전쟁이 없다는 가정 하에, 서로가 선의의 경쟁한다는 그림을 가지고, 만나게 되는 그들의 이차대전 군복과 같은 것이다. 그와 같은 가정이 가능하다는 것이 인간의 능력이고, 그와 같은 가정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누구나가 다 아는 바로서의 리얼러티인 것이다. 동일성이 사라지고, 이질성을 그렇게, 도리어 계단 삼아, 학교를 돌아다닐 때에, 김윤식의 글을 만화책 보듯이 읽노라 하면, 재미가 있었고, 그래, 이 정도로만 글을 써도 문학가가, 평론가가 될 수 있단 말이지, 나는 나의 닭발을 그려볼 수 있었던 것이다. 오래가지 못했다. 만일 즉시 이동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대도, 나는 김윤식을 내 키를 잡고 씨름하는 사람으로는 계속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을 두고 우리는 있다 말하기도 그렇고, 없다 말하기도 그렇다 하는 것이다. 어떻게든 사라지지 않는 관념을 구하는 것이 좋다. 사람들은 거의가 관념의 장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전이, 장사하는 사람, 어떤 것들이기 때문에, 그나마 가장 좋은 유에스비 같은 것을 사람들에게 꽂아주는 것이 좋은 것이다. 나도 그런 사람으로서, 처음 나를 볼 때도 있었는 것이다. 소설의 작품이라는 것은 굉장히 고통스러운 것이다. 거의 모든 것이 골고다의 언덕과 같아서, 취직을 못하면 범죄인이 되는 세상인 것이다. 그것의 채찍을 도리어 예수님이? 휘두르는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가 분명한 눈으로 뒤를 돌아보지 않으면, 그 광경은 죽기까지 희한한 것인 것이다. 비평이라는 것은, 전쟁 이후의 우리네 벌판처럼, 마땅한 재생 공무원이나, 훌륭한 정신의 기업가 하나 없이, 우연과 공급, 기도와 땅투기의 연속으로 점철되는 것 같은 분위기에서, 조금씩은 사과나무를 심는 것 같았고, 마음으로는 오 샹젤리제 노래를 부르는 것 같았던 것이다. 문학과에 지망해서, 작품에 들어가는 사람과, 비평에 입문하는 사람이 정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우연이 많은 사람은 늘 그렇게 투신하는 작품에 있고자 하고, 우연은 없는 것이다는 강력한 정신이나, 최소한 회의주의적인 입장을 갖고 있는 사람이, 왠지 졸업도 안 할 것 같은 대학원에서 비평을 계속 연마하는 것이다. 물론, 바닷가의, 저녁, 두려움이 거대해서, 반드시 그것의 익숙한 유기체에 자기를 파는 사람이 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 순수 정신의 디엠지는 그 정도는 되는 것이다. 


옥희는 고통스러운 동일시와 같다. 영화는 소설과 다르고, 같다는 사람이 있겠지만, 전영선이라는 여자가 소설의 옥희는 아니기 때문에, 영화는 소설과 많이 다르다고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영화들을 보면, 우리가 알던, 우리가 선입견으로 갖고 있던 영화들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적어도 이질감이 없는 세상으로 인물들이 진행하는 것이, 작품이고, 작품의 등급이다. 그런데, 필연적인, 어쩔 수 없는, 유사직업적인 원인을 갖고, 사람들이 또한 어쩔 수 없는 어른들의 무대 위에서의 대사를 하다 보면, 처음에는 감동일시의 현상을 추구하였겠으나, 이질성의 난맥상만 가득 놓이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분별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질성을 갖고, 우리는 또 다른 진행을 이어가기 때문이다. 영화를 볼 때, 감동이 없는 것은, 감동을 느낄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집에서 아무런 인사이트나, 그것에 대한 기도하는 마음이나, 공부의 여진이나, 오늘 본 영화의 기억과 그것에의 희구가 없이, 물을 먹다가, 뭘 먹다가, 친구와 전화를 하다가, 티비를 보다가, 화장실을 가다가, 가족들과 이상한 말을 하다가, 취직을 못한 것에 대한 주권적인 말을 하다가, 영화화가 되면 재밌겠다 싶은 만화책을 보다가, 그와 같은 이질성의 부정, 논리적으로 보면 동일시와 주관으로의 홀인원을 꿈꾸면서, 잠이 들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가 많이 이질적인 것을 만나면, 도리어, 동일시가 늘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적당하고 흥겨운 이질성을 보다 보면, 나도 또한 저 정도의 기교와, 신학과와 기교과 하듯이, 어떤 재치를 갖고, 세상을 살 만 하겠다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영화 속의 옥희는 이질적이었다. 이전의 한국 영화가 답보상태였고, 이 얼마나 익숙한 표현인가? 문화나 예술, 정신의 어떤 것이 정체되어 있고, 사람들에게 응분의 보답을 하지 않는 상태. 그냥 우리 사는 동네의 어린아이를 묘사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랬다. 저것이 한국어인가? 외국 사람들이 말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에게 던지는 말이 그러했을 것이다. 저것이 우리 한국어인가? 집의 크기이고, 바깥 거리이며, 언덕이고, 한땀 한땀 누비되어 가는 우리네 정신의 도형들인가? 동일시는 사실 노력하지 않아도 유지되고, 사람들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그의 소유인 것이 인정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옥희의 능력을 능력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말 마디 하나가, 둘이, 혹은 셋이 모두, 짜여진 각본이고, 원작이 있는 것이며, 굉장히 높은 교양과, 부모를 상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말 말하는 순간에, 이질적임이 있고, 동일시가 있는 것이다. 다만 귀엽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말을 건네는 이상의 의미 같은 것은 없기 때문이다. 대신에 우리가 고백하여야 한다. 우리가 이질적인 것이다. 내 경우가 그랬다. 우리는 나의 옥희와 같은, 김경재 교수님이 계셨다. 그러나 문학은, 국문학적 현실은, 가시밭길 그 자체인 것이다. 옥희가 없었다면, 우리는 가시밭길에서, 그것들을 조심히 다루면서, 전쟁보다 낫다는 심정으로 살았을 것이다. 우리도 옥희처럼, 다음 영화에서 아버지를 한번 만나고, 스스로 서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율법과 과학의 세상으로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