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국가론
우리는 한 대를 맞을까봐 벌벌벌 떤다. 그것은 사람의 행동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말하고 글 쓰는 것에도 드러난다. 음악이 때로는 위대해 보이는 것은, 한 대를 맞을까봐 벌벌벌 떠는 영혼이 반대로 매우 강력해 보이기 때문이다. 음악이 정치적이지 않는 이유가 그래서 반갑고, 지금까지 문학과 예술, 음악과 미술 하는 것들이 탈정치적이고, 시대착오적이며, 예술지상주의적이었던 것이 흠이 아니라, 이와 같은 현실주의적 도가사상에서는 매우 훌륭한 것이라 평가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작은 규모의, 그것의 이랑이나, 주름, 숨결들이 보이지 않는, 틀이 애매하고, 아무런 주제가 없는 탈정치성, 시대착오성, 예술지상만가성은 고래로 사탄의 음식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집트의 피라미드처럼, 한 대가 아니라, 열 대, 슬픈 열 대, 그렇게 맞아도 꿈쩍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정복하고, 식민지배를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싶은 것이다. 맷집도 집이라고, 지금 내가 말하지만, 옛날에는 거대 두 국가가 있었을 수 있다. 경계는 인도나, 미들이스트 정도. 신세계는 타락한 두 국가가 어떻게 하기에는 너무 멀었을 듯. 현현이색이라고, 두 국가 사이에는 무슨 차이가 있었을까? 타락함이라는 것은, 사람을 쓰레기 취급하면서, 다만 화력발전소의 재료로 생각하는 이공계 공룡적인 상상력을 뜻할 것이다. 죽은 사람에게 화장을 시키거나, 옷을 입히고, 다시 대학 같은 곳에 보내지는 않는다. 가장 존경하던 사람조차, 의대의 실습 재료로 얼마든지 보낼 수는 있는 것이다. 죽은 사람을 장사하는 것은, 매우 다양한 의미가 있지만, 자기에게조차 향한 것일 수 있는 것이며, 진실로 죽은 자를 향한 것일 수 있는 것이다. 어렸을 때, 그들 뒤를 따라가면서, 사탕이나 과자 같은 것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인간은, 맨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다. 동양도 그랬고, 서양도 그랬다. 아이들에게는 그 사실이 숨겨졌었고, 지금처럼,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 그 사실이 교육적으로도 고지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그것이 지금의 모습과 같다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이들에게는 꿈과 희망이 필요하다. 찌찌뽕을 할 수 있는데, 그 고대의 어떤 사람과 같은 말을 하는 것인 것이다. 왕권이라는 것도, 연산군, 넓게 보면, 그렇게 피라미드나, 이런저런 강건한 파라오의 형상을 보면서, 스파르타 훈련을 하는 것을 참고 견디는 것을, 어린아이들이, 그런 것들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피라미드가 선한 것인지, 혹은 악한 것인지, 그것의 실루엣을 이렇게 보고, 에메랄드 빛 하늘 아래서 보고, 그래봐도 잘 모르겠기 때문이다. 왕권이라는 것도, 신하들이라는 것도, 인간 쓰레기들 앞에서는 똑같이 왕권이고, 똑같은 폭력이며, 똑같은 오리엔탈리즘의 끊임없는 반복, 그런 주지육림잡기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이라는 것도 왕권이고, 어떤 종류의, 약간 모자란 신하이며, 그것들의 관계가 정확히 어디 부분에서, 쓰레기의 통로가 연결되어 뛰어다니는지, 우리가 농구를 할 때, 혹은 축구를 할 때, 너에게 나를 보낸다 하는 상상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국회의원도 없이, 오직 기자지구만 배를 불릴 수 있는 것이다. 그 무엇으로도 중지를 얻을 수 없는데, 아이들의 교육만큼은, 캄차카처럼, 꿈과 희망을 주자는데 거의 모든 분야의 심경들이 중지를 모을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해서 고대 연산군이 탄생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조선 아래, 두 명의 연산군이 없지 않은가? 원래는 아이들은 재산이고, 어느 소설의 대사를 인용하면, 전쟁과 위기시에는 식량까지도 될 수 있는 이들이었으나, 그것은 교육에 좋지 않기 때문에, 철저히 금기시되고, 모종의 교육들이 다각도로 이뤄진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읽고 쓰기. 도서관에 던져 놓기. 대게가 주색잡기에 빠지거나, 사냥을 하러, 담을 넘을 것이기 때문이다. 별로 대단히 총명해질 것이라고는, 온 몸에 리얼리즘이 강력한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술 수련. 말타기. 갑옷 입기. 사람들은 열광하고, 꽃잎들이 거리에 날리는 때면, 국가가 번영하여, 성창하였다고 자랑할 만한 그림이 되었던 것이다. 아이들이 좋아하고, 여자들은 행복해 하였다. 그때가 고래 같은 사탄들 조차, 가장 화양연화 좋아하던 때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종말에는 어떻게 되는가? 서희의 강동육주처럼, 만남이 이뤄지는 것이다. 서양의 연산군들이 찾아왔고, 왕이고, 화랑들인, 아니면 우리쪽에서 찾아가서 미들이스트나 인도에서 만났을 것이다. 거의 비슷했고, 나중에는 말까지도 비슷해졌다 해도 될 것이다. 말까지도 똑같아서, 바벨탑처럼, 통역이 필요 없게 되었다면, 그 말의 원조가 자기들이라고 열변을 토하였을 것이다. 점점 더 다른 인원들이 채워져갔다. 그것의 기준은 우리의 것이다. 일 년에 한 번 만나고, 이 년에 한 번, 삼사 년에 한 번을 만나도, 우리는 왕이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형식적인 것이고, 국가의 재산을 상징하는 섹스심볼 같은 것이었대도, 서양의 왕들은 아주 몇 명만 옛날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신체는 이상하였고, 장막의 바깥에 서게도 되었던 것이다. 반가움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얼굴이 코끼리처럼 변하여도, 눈빛 만큼은 변하지 않는 것이라 할 것인가? 날이 추워도 꿈쩍하지 않았고, 가시에 찔려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세계는 지식으로 이뤄져 있으나, 반갑고 기억나는 것은 친구 밖에 없으니, 서희가 만남의 광장에 가서 친구가 더 이상 없음을 확인하는 것 밖에는 달리 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나이 어린 황제는, 우리는 아무리 섹스심볼이기로서니, 황제까지도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친구가 오지 않음을 두고 붕어, 세상이 끝이 나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으리라. 그렇다면 황제도 끝인 것이다. 그의 몇몇 사람들과 함께 친구를 만나러 원정을 가는 것 밖에, 우리에게는 자유가 있는 것 같으나, 인간의 함수는 참으로 몇 개가 되지 않는다.
박원종은 또한 누구인가? 맷집이 거대한, 한국말까지도 핵심들은 능수능란한, 우리가 잘 아는 수많은 서양 이름들, 단일한 서양 국가를 상대로 전쟁을 할래야 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할머니마저 이길 수 없는 것들로 이뤄진 장교와 사병들이 때때로 벌판에서 그들과 맞딱뜨려졌고, 그나마 살고 싶어 엎드리거나, 너무 쉽게 부활을 꿈꾸는 나머지 초록의 혹은 추수기의 들판에서 죽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매우 다양한 뜻을 갖고 있다. 옛날 연산군이 갔을 때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박원종은 유럽의 벌판에서 울면서, 그 움직이는 앨범들을 보았던 것이다. 이슈와 소문, 정말이지 얼마나 현대적이고, 그러한가? 이제는 기자지구가 영원한 것이다. 단 한 사람도 있을 수 없다. 심지어는 아내와 잠을 자는데도, 그 사람이 유명하고, 관직에 있고, 다른 사람을 만나는 업무를 보자면, 음탕한 짓을 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최대한 노력하는 마음으로써 임하고, 기자지구에서 죽게 되는 것을, 그러니까 마다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박원종이 누구인지 모르나, 어제 역사저널 그날처럼, 전체의 모습이 그렇게 슬프고, 불가능한 것을 달성하여서, 도리어 불가능해진 사람처럼도 보였다......
'클래식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검수원: 누구의 물이 더 센가? 유다의 배신, 그리고 예수...... (0) | 2018.06.11 |
---|---|
협녀. 칼의 기억(2014) (0) | 2018.04.25 |
서양의 몰락 (0) | 2018.04.12 |
우리의 능력: 옥희 아역 전영선론 (0) | 2018.04.01 |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원작 소설과 영화의 길항 관계 (0) | 2018.03.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