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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협녀. 칼의 기억(2014)

by 마음대로다 2018. 4. 25.

협녀. 칼의 기억(2014)






사물은 시간이다. 우리가 옛날 타자기를 볼 때, 중국 사람이나 일본 사람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무 시간이 없는 것이다. 지금은 음성 인식 기술이 예정되어 있고, 그래서 많이 완화된 편이다. 물론 타자기를, 어느 행복한 이층집의 거실에 가져다 놓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과거에, 별로 사용도 하지 않고, 방치하고, 담배 피고, 타자 연습하고, 했던 기억 밖에 없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의 이해의 방향은 세 가지이다. 하나는 그와 같은 자격 경쟁의 시간 속에서 나름 위로가 되는 말이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사물이란 세포처럼 빼도박도 못하는 것을 뜻할 때가 많은데, 결국 그것을 구입하느라 다른 어떤 보다 긴급한 것을 못했을 수 있다는 좀더 구체적인 분석이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치명적인 것은 세번째의 것일 것이다. 그것은, 피아노와 타자기, 그것을 어느 시인이나 소설가가 그물로써 길어올린 것이 아니어도, 그 사람이 굉장히 타자기처럼 세련되어 눈에 비친다는 것일 것이다. 내가 군대에 가서, 어쩌다가 행정병이 되고, 거기서 타자기 연습을 할 때, 나는 그 힘든 시간 속에서도 재미를 느꼈었다. 가슴 어딘가에서 재미가 러닝셔츠를 젖게 하는 것 같았다. 마지막의 말을 하는 사람은 먼저 첫번째 두번째 말을 모두 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 있는지, 오히려 말을 못할 수 있다. 우리가 부자들을 바라볼 때, 결국에는 그와 같은 가능성을 높게 보면서 좋아하고 선망하는 것인지 모른다. 그런데, 음성 인식 기능을 사람들이 사용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는가? 그리고 사물의 질감이 워낙에 차이가 있다면서, 음성 인식 기능이라는 것이 보다 탁월함에도 불구하고, 타자기라는 것을, 키보드라는 것을, 청자비룡형주자처럼 부러워만 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우리는 생각이 막히고, 그 거대한 중국의 대륙이 가라앉아, 남중국해나 태평양의 물로 가득차는, 그와 같은 종말론적 비젼을 목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사태가 심각하다면, 음성 인식 기능을 적극 활용하면 되는 것이고, 공부할 사람은 공부하고, 안 할 사람은 안 한다와 같은 철학을 갖고 있는 사람은, 보다 진지하고 훌륭한 주제를 갖고 정진해야 할 것이다. 대신에 친구론이라는 것을 만나면, 시적으로 어려움이 생기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영화는 가능하나, 시와 평론은 불가능한 계속되는 격차. 내가 어딘가에서 자동차는 친구다는 말을 했었다. 친구가 갖고 있는 재력, 능력, 말의 능력, 나의 행동을 해석해주는 능력, 돈을 빌려주는 능력, 갚아주기를 채근하는 태도, 먹을 것이 늘 있는 능력, 만화책이 있을 능력, 강남을 갈 수 있는, 그리고 친척 중에 예쁜 여동생이 있을 능력 같은 것은, 하나님이 따로 친구의 창세기를 만든 것이 분명한 듯한, 나와는 전연 다른 우주인 것이다. 나는 무겁고, 흰 색의 벽과 같다면, 친구를 만나면, 나비 같아지고, 무엇보다도 코메디언이 된다. 개그맨이라는 것은, 친구들의 집강소이다. 친구가 없으면 그만 둘 일도, 친구가 있음으로써 계속할 수도 있는 것이다. 자동차가 딱 그와 같은 능력이 있다. 그래서 영락 없이 친구라고 했던 것이다. 타자기를 친구라고 하면, 문제는 복잡해진다. 그 친구는 별로 만나는 일이 없다. 거실에 있거나, 서재, 내 방에 있다고 한다면, 그만큼 친구의 집이 내 집에서 가까운 것을 상상하게 된다. 반갑고, 누구보다 가까운데도, 이상하게 다른 독재 친구에 빠져 있어서, 연락이 잘 안 되는 것인 것이다. 그래도 한 번 불러내어 집 근처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 그렇게 차향이 좋고, 지적인 방을 몇 개씩이나 돌아다닌 것 같은 느낌이 있는 것이다. 친구는 선생과도 같다. 칼 바르트와 같은 절대 선생이 사람들을, 정진케 하고, 동시에 비본질로 이끈다고 한다면, 그것을 충분히 연습을 하고, 폴 틸리히를 동시에 그렇게 빠지지 않은 채로, 한국 기독교의 위대한 언어의 숲에 이르게 된다면, 그것은 얼굴이 기억 날 것도 같고, 서양의 학자들 사진과 초상이 그렇게 보기 좋은 것처럼, 아저씨나 삼촌, 아버지나, 잘 모르는 작은 아버지의 얼굴처럼 생긴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이지 않으면, 다시금 절대적인 것인가? 외국적이었다가, 관계적이고, 다시금 어떤 속성이려고 한다면 다시금 외국적인 것인가? 내 친구가 슬픔으로 바닷물이 대륙 전체에 들어차고, 무협소설이나 영화에 접근하는 인문학적 소양과 그것의 카테고리를 더 이상 가지지 못하게 된 지금 같은 때, 우리가 우리에게 없는 시간이나 재력, 풍성한 공간들을, 막상 우리에게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내 양 옆의 친구들이 상상 이상으로 많이 갖고 있는 것의 이유가, 다만 타자기가 없는 것을 채워주기 위함이 아닐런지 드디어 파악하게 되는 것이다. 어차피 우리도 영어를 공부하고, 다른 서양 문물을, 마치 개화기 시대와 같은 중량을 갖고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도 어떻게 하다 보니까, 보이는 것으로서의 우리 옛날 조개집들과, 잠깐의 전통으로서 기억이 나는 무협의 장쾌한 모습들이, 내 친구의 오래된 중국어처럼, 묘하게 반복적인 일본어처럼, 협녀. 칼의 기억 영화에서 비쳐지는 것이 그렇게 슬플 수 없었다. 나도 죽는 것이다. 친구도 사라지고, 우리 서로 칭찬합시다 하는 사회적 구호처럼, 차가 거기를 대신 들어와 있는데, 내 친구가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이 싫지는 않지 않은가? 영화가 자기도 모르는 말을 하였는데, 내가 잘 받아 적었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생각할 수 있다. 영화의 대사는 한국어인데, 그것이 필연인지, 아니면 우연인지 하고 말이다. 오랜만에 타자기를 만난 것인지, 영화가 너무 그런 것에 대한 묘사가 훌륭하여서, 그렇게 고급지진 않아도, 빠지지 않는 어느 서울 주택가, 혹은 사람들의 분위기가 아주 좋은 어느 역세권 주택가, 중국인 친구는 맛있는 감자를 쪄주는 것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것은 보통 어머니가 해주시는 것이긴 하지만. 중국인 친구가 다른 일을 찾는 중에 집에 찾아와 쪄주는 것일 수 있지 않은가? 한국인 친구가 타자기 친구를 만나고, 대화를 많이 나누고, 장면장면, 판타스틱하고, 홀루씨네이션한 것들을 많이 백제처럼 그려내고, 거실로 나오면, 티비를 보고 있던 중국인 친구가, 다만 개인적인 견해로서의 슬픔과 감회에 사로 잡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