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수원: 누구의 물이 더 센가? 유다의 배신, 그리고 예수......
검수원은 매력적이다. 검푸른 바닷가. 비가 내리고. 모든 존재는 매력적이다. 없는 것보다 낫고, 있는 것들보다 분명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찬기파랑가를 좋아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부터는 희미해지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검수원이 매력적이단 말도, 그러니까 애초에, 처음부터, 싹부터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모든 소원하는 것들, 이집트 여행, 그리고 그것의 수학여행적인 매치. 드디어 우리는 어째서 이 한국 사람들이 중고등학교 때, 혹은 대학교 때, 학교별로 멀리 놀러가는 것을 수학여행이라 부르는지 알게 된 것 같다. 일을 짧게 하면, 다만 나일의 뱃놀이를 하는 것 같으나, 일을 많이 하고, 파고드는 곤충이 있고, 비까지 거세게 예보도 없이 내리는 것을 맞을 때면, 스핑크스와 대피라미드가 있는 기자지구에 오르는 것 같은 것이다. 그 미스테리. 그 미.스.테.리. 어린아이가 카스테라를 처음 먹었을 때의 황홀함 같은 것. 만드는 방법은 미스테리인 것 같은. 우리는 분명 판타스망고리아 같은 것이 있는 것이다. 갑자기 뜻이 생각나지 않는다. 판타 회사의, 그런 뜻이 아닌가 한다.
옛말에 검수원 뜻을 깊숙히 해내는 사람이 있다면, 멋진 딸이나 여동생을 줘도 좋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죽기 전에, 일본인 장수와 논개의 경우처럼,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검수원이라는 말에는, 뜻을 잘 모르고, 대충 그와 같은 수학여행, 뱃놀이, 혹은 기자지구에 오르는 일을 한다는 뜻이 있다. 그러니까 그것이 보다 선명하고, 인간을 괴롭힌다면, 분명 그 인간이 있음을 증명하는 것 같은 것일 때가 있는 것이다. 정말이지 우리는 고통스러운 검은 물을 당하면서, 누구의 물이 더 센가? 저울을 내밀 수 있는 것이다. 그것에는, 그와 같은 논쟁에는, 고갈되지 않는 영원의 샘물이 있다. 우리가 옛날, 그렇게 가난했을 때, 샘표 간장 같은 것만 봐도, 요리는 할 수가 없고, 재료도 없고, 목은 마르고, 그것을 손에 들거나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검수원처럼, 스쳐 그 봉인번호를 보면서.... 말잇못, 더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다.....
유다의 배신이 더 세다. 예수님은 예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십자가상의 그 도둑의 말이 분명 일리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책을 읽고, 작가를 흠모하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국회의원 선거도 하고, 대통령 선거도 하고, 삼국지, 대입 시험도 훌륭히 치렀던 것은, 분명 서양의 아름다운, 빛나는 배경의 작가들 뿐 아니라, 그래도 화장실 다녀오면서 첫만남을 갖고, 나중에는 빛나는 회사에 취직해서도, 그것을 그나마 도심 속의 허영의 뱃놀이 같은 것일지라도, 읽고자 하는 사람, 그와 같은 책이 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인과가 그렇다는 것이다. 악함이 있어서, 우리가 결과적으로 고통을 느끼거나, 심리적으로 고통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있어서, 책이 있고, 책이 있어서 도시가 그나마 견디기 쉬운 것으로 있다는 것인 것이다. 작가가 아서왕처럼, 지지 않는 나라처럼 있기 때문에, 우리가 숱한 산문들을 잘 모른다는 것을 잘 모르고 지나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잘 모르는 것은 악마의 씨이다. Saluto Alla Madre. 모리꼬네의 음악인데, 영화는 보지 못했다. 우리는 달동네에서 내려올 때부터 죄는 시작되고, 깡패가 되어서, 깡패가 되어서, 건달이 되어서 영화를 누리다가 죽는 꿈을 꾸는 것이다. 우리는 만화를 만나고, 결정적으로는 만화와 별 다를 바가 없는, 청년의 꿈과 같은 소설을 만나고, 개인들이 모여 스핑크스, 그러니까 피라미드를 이루는 환상을 겪다가 죽는 것이다. 그것의 인사이트는 옳고, 그것의 양대산맥, 미국영화와 홍콩영화는 옳은 것이다. 그 사이를 비집고, 레옹이 있었다는 것이 우리들의 기억에 두고두고 남는다. 마틸다. 사람들이 생각해도, 나는 홍콩영화도 아니고, 미국영화도 아니고 했던 모양이다. 얼마나 사람들은 폭력적인 것만은 아닌 영화를 바라는가? 그것은 정말이지 개개인, 스핑크스의 밤하늘, 피라미드와 같은 꿈이 아닐까? 작가의 잘못이 아닌 것이다. 작가가 신학자도 아니고, 작가가 하는 일이 신학도 아니지 않는가? 그런데 꼭, 우물가에 가서 숭늉을 찾는 것이다. 하지만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사람들이 돈을 벌고자 하면, 별 짓을 다하는 것의 고고학, 그런 것이 있는 것처럼. 한번 유다의 배신에, 남는 물건의 장사, 그리고 그것의 회전이라고 하는 일이 있었던 모양인 것이다. 소규모 지역 단위 전쟁을 자주 하면, 사람들이 신학에 빠지는데, 원시, 그나마 이세벨의 편지를 중심으로 모이게 되어 있는 것이다. 마르둑의 신화는 신화이고, 요셉의 이야기는 이야기이다. 신화는 옛날부터 들어온, 그러나 몇 살 부터는, 천재는 열 살 이상에서부터 바로 질리게 되는 것이지만, 개인은 어느 화려한 비평가가 나타나지 않는 이상, 끝이 없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이라는 높은 첨탑이 없는 이상, 무슨 글을 어떻게 쓸 수 있었겠는가? 마땅한 스승이라고, 이 조선의, 반도의 역사는 우리에게 제공한 적이 없지 않은가? 늘 하는 말이지만, 서양에 있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이 모여서, 아름다운 도시를 이루고 있을 뿐. 기적처럼, 작가에게 음으로 양으로, 규제가 되어서, 훌륭한 소설을 몇 작품 쓰게 된 것이다. 우리가 검수원일을 하다 보면, 다른 데도 마찬가지, 베이를 이동하면서 하게 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베이는 배신이 아니다. 멋진 한국말 같은 것이고, 쓰는 것은 영어로 하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도, 먼저 베이에 배신하는 것이 분명하다. 동시에 떨어져 있는 베이를 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의 뜻이 베이?일 수도 있는 것이다. 작가는 배신을 많이 했을 것이다. 그래서 서둘러 성경이 나온 것일 것이다. 마태복음은 예수님마저도, 그와 같은 배신의 작가의 계열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잘 모르는 깡패가, 가장 많이 두려워서도 되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예수님의 가르침마저도, 그릇된 그릇 안에서는, 매우 다른 형태로 화학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정말이지, 냉장고가 없던 시절, 찬장에 갇혀 있던 샘표 간장 같은 것이 아닐까 한다. 그 뜻이 검수원, 아름답고, 깊고, 검고, 생각하고, 공부하는 것을 돕고, 숫자를 읽고는 몇쩜 일초라도 지속시키고, 그 슬픈 속삭임들, 테무, 포뉴, 진리, 아파치 헬기, 프랑스 사람, 그렇게 하여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정신의 계단에 오르게 하는, 참된 작가를 지망하는 것이 아니었나 하는 것이다. 유다는 예수님 옆에 있기 좋아하지만, 예수님은 샘표 간장을 매개로, 검수원과 같은 작가를 의지하였는 것일 수 있는 것이다. 남녀끼리는 곧잘 배신한다. 사탄이 애호하는 통로이기도 하다. 그래서 아이를 낳으면, 사탄의 자식인지, 천사의 아들과 딸인지, 우리로서는 가라지의 비유처럼, 엠알케이유, 분간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작가의 배신에 대한 염증 같은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우리로서는, 우리들과 같은 역사학자로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영원히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집단 자살 같은 것도, 부모님이 동의하는 것이면, 조혼과 같이, 얼마든지 가능한 정신의 자유 의지 같은 것이 아니었겠는가? 그것마저도, 문제가 얼마든지 되는 것이지만, 늘 언제나 더 큰 문제가 있는 것으로 확장되었던 것을 우리가 조금은 알고 있기는 하다. 예수님도 배신이다. 우리는, 그 말 뜻을, 이 고통스러운 징비록 속에서는, 영원히 알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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