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
중국은 영원한 미스테리이고, 일본은 과연 클래식에 재능이 있는가 하는 것이 관건이다. 그것을 두고 우리는 일본 클래식 관건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국제고등학교는 전 세계적인 관심을 끄는데, 그것은 소위 혹은 대위, 클래식 종주국이라고 할 수 있는 유럽마저도 그러한 것이다. 이미 클래식은 끝이 났다. 더럽게 태어나서, 사나운 말이나 하는 부모 밑에서, 수레바퀴, 친구들과 연예인 팬티보는 이야기나 줄창 해대면, 아무리 선한 것이 자기 안에 있고, 가끔은 풍경을 보면서 기뻐하고, 기가 막힌 기적처럼 친구가 초코파이를 준데서 교회도 몇 번 간다 해도, 한계가 있는 목사의 적당한 설교를 듣고, 반응을 할 만한 자기 만의 영성신학이 없는 이상, 불꽃이 도저히 튈 수는 없는 것이다. 클래식은 외국 문학으로 되어 있다. 영문학은 그것의 손가락이 한국을 가리키고 있고, 국문학은 그것의 이티 같은 손가락이 성경을 가리키고 있다. 성경은 거대한 전지 가위를 들고, 자기 자신의 빛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니, 편안하고, 대충 지도를 펼쳐들고 가서, 이보시오, 어디 아무도 없으시오, 계십니까? 안에 계십니까? 해서 나타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섹스인가? 그때부터는, 임폴턴스, 인터폴, 혹은 카사노바 최불암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섹스는 차지연, 옆에 두기로 하자. 그냥 클래식이고, 순수하고, 우리가 생각하는, 냉장고에서 생수를 먹는 듯한, 그런 순수한 클래식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몇 번을 말하지만, 외국어이다. 민중들은 클래식을 알지 못한다. 멍청한 티비가, 머리 속의 팬티비엔을 파고들면, 그때부터는 꼼짝하지 못하는 것이다. 자발적으로 방을 돌아다니고, 검색하고, 하지를 못하는 것이다. 연예인 검색하고, 친구가 술을 마시자고 엄청난 돈을 목전에 내걸고 해야지만 움직이지, 서장훈이 그런다는 것처럼, 모든 인과가 사소한 것으로 떨어지고 나면, 방바닥에서 지네, 그러니까 무슨 외국 가수가 불렀던 노래가 있는데, 지네, 인체 크기의 곤충으로 변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자기는 불쌍하다고 했다. 그러한 것이다. 그것은 미제인 것이고, 우리가 그들을 가리켜 미제레레 하면서 놀리는 것이다.
섹스와 파괴적인 영화로 담금질을 해야지만, 겨우, 나이가 들어서는, 마구니 같은 촉수가 산다. 그것을 생명이라고 생각하기 쉽고, 식인종들이 너희들도 고기를 먹지 않느냐는, 어딘가에서 한국어로 들은 것 같은, 거대한 동어반복의 패턴이 시작되는 것이다.
어떤 모음들. 앨범들. 동호회들. 그것들은 모두 일본식 드라마의 데드싸인 같은 것이다. 미조구치 겐지가 그날 죽임을 당한 것에는 매우 복잡한 원인들이 개입하고 있다. 판사와 검사는, 다들 법률적인 죽음의 정의를 갖고, 그것이 정확하게 어디쯤에서 발생했는지를 묻고 답하고, 판결에 앞서 정리하곤 하지만, 문화 인문학자, 내지는 문화신학자인 경우에는, 그가 동호회를 더 이상 나오지 않았던 때를 기점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는 늘 숨을 헐떡였고, 그럼에도 어린아이 같은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눈매가 여자인 것도 같았고, 항상 아이보리 색상의 값비싼 면자켓을 입기 좋아했다. 같은 것인 줄 알았지만, 다 달랐고, 거의가 아주 고가의 것들이었다. 거대한 오토바이는 탈 줄 모르는 것 같았고, 내가 그렇게 좋아하는, 스즈키 소형 스쿠터, 아주 튜닝이 화려하게 잘 된, 그것을 타고, 아이보리 자켓을 입고, 멋진 아라이 헬멧을 하고, 그제서야 그는 햇빛으로 나온 숭어마냥 숨을 쉬었던 것이다. 그들 중 대부분이 목적론적 화법이 발달되지 않아서, 다만 놀러다녔던 것만 말하기 일쑤였는데, 바로 그 부분에서 마치 모임 중에 돈이 없는 사람처럼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의 카드가 차단되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고, 어깨 너머 보이는 지갑에는 현금이 늘 두둑했었던 것이다. 그는 갓파를 좋아했었다. 약간 그와 같은 기호를 혁명적인 싸인으로 여기기도 했었다. 오래가지 못하고, 갓파의 존재처럼, 확인할 길이 없는 것으로다가 말이다. 노래를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어떤 사람이 아주 담백하게, 때로는 불규칙한 자기 만의 발성으로 노래한 것을 약간 흉내내기도 했었다. 그것이 또한 괜찮았고, 유행하는 외국맥주들이 그렇게 흥을 돋구곤 했었다. 그리고 하루키의 책도 좋아했다. 다 읽지도 않고, 읽고 난 다음에 무슨 생각 같은 것은 없었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하루키적인 성격이 있다고 그에게 말한 것을 스스로도 좋아하고, 나름 굉장한 느낌으로서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모든 것이 오래가지 못했다. 비가 내리고, 마르고, 그리고 눈이 내리고, 그것이 며칠을 버티다가, 한겨울에도 포근한 날에 모두 마르고 나면, 티비 속의 살인 사건만이 그의 그와 같은 알 수 없는 입맥을 타고 들어왔던 것이다. 형사 겐지. 형사 미조구치. 간바레 히레이상. 간바따 와타나베. 이른 날 아침에 나는 그것을 시로이 해버렸다. 그렇게 모든 것이 오래가지 못했다. 나이가 들고, 결혼도 하고 했지만, 일찍 이혼했던 것이다. 그렇게 이혼한 여자는 한국 남자를 만나 잘 살았다. 살이 붙고, 체력도 생기고 그랬다. 이중 국어를 사용해서인지, 목소리도 두꺼워지고, 태도와 입장이 결혼했을 때와는 다르게 매우 다부져 있었다. 문화신학자는 그날 바로, 일본인 남자 미조구치 겐지가 죽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그 유명한 겐지 모노가따리. 그것에도 남자는 자기가 귀족의 핏줄이 아닌가 했었다. 다만 하나라도 들어맞으면, 사람들은 그와 같은 가혹한 도모지 형을 당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스쿠터를 타고서도, 전국을 유랑한다면, 그리고 하루키의 소설을 나온 대로 전부 읽는 열성분자가 되었다면, 여자에게 질투를 느꼈다는 느낌에 솔직해서, 바람을 피웠다는지, 영화처럼 춤을 배우는 학원을 다녔다는지, 했다면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것이 짧았고, 모든 것이 생각보다 뻗어가지 못했다. 모든 것이 어렸을 때처럼 감각을 살려주지 못했고, 섹스라도, 섹스라도, 존재론적 출구를 찾는 불쌍한 에브리맨들처럼, 하지만 옷차림과 목소리가 그렇다면 바뀌어야 했던 것이다. 하루 아침에 야만적으로 바뀔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겐지 모노가따리를 읽으면, 도리어 남자는 담백하고, 성에 솔직한, 그런 취화선이나 세한도 같은 사람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겐지 모노가따리처럼, 문맥에 빠지고, 묘한 신경심리학적 흐름에서 내면적인 감각의 에너지 전부가 소모되고 나면, 익숙한 일본인은 될 수 있어도, 그나마 어려운, 콧구멍이라도 맹렬한 어떤 가오리 연이라도, 그러니까 사람들이 사는 것이 죄가 아닌 것처럼, 죄가 아닌 사람이 적어도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트릭도, 케이조쿠도, 그리고 무슨 시한 종료 수사대 했던 것처럼, 보는 것은 즐거웠으나, 도저히 주자의 내면에 이르지는 못했던 것이다. 여기서의 주자는 주자학이라는 거창한 단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클래식을 의식하고, 인지할 줄 아는, 그리고 어느 정도 부르조아 인간을 말한다.
인간이 죽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일까? 어째서 세계인들은 죽지 않는 것일까?
처음에는 일본이 한국과 멀었었다. 가장 가깝고도, 가장 먼 나라가 일본이었었다. 중국과는 거의 아무 것도 없었다. 우리나라도 크고 멀었기 때문에, 중국이라면 일본인을 따라 태국으로 섹스 관광을 떠나는 것으로 밖에 없었던 것이다. 외국에서도 이제는, 제법 자기를 죽기와 품위 있는 사람으로 여기고 자처하는 사람이면, 한국 제품만을 사용하는 것 같다. 그것이 언제부터인지는 모르는 일이 되었다. 우리가 얼마나 공부할 때, 재밌게 드라마를 보는가? 고삼 때라고 해서, 유명한 드라큘라치고 못 본 드라마가 없는 것이다. 시험을 망치고, 드라마를 화형식하는가? 불량 음반이라고 해서, 어디 여의도 광장이나 세한 상가 같은 곳에서 불을 지르는가? 사람들은 죽음을 거래한다. 의식이 똑바르지 않고, 에피스테메가 별로 발달하지 않은 사람들은 얼마든지 자국의 드라마를 선택할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단히 클래식 같은 것을 흉내내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이 사람들을 더욱,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들을 곤란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작품들 중에도 더러운 것들이 많고, 내 눈에는 거의 전부가 더러운 것 같기도 하다. 드라마 더블유에서 강철이 빌딩의 옥상에서, 한효주 같은 중간인들을 상대로, 차라리 죽고자 하는 것처럼, 그 모습의 스테이지가, 우리의 떨리는 봉인번호를 보았던 것처럼, 두 개 달린 모두를 보았던 것처럼, 그것의 말라르메적인 빛이 우리들 가슴을 매우 깊이 파고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대상은, 소급하고, 대상은 주체와 파고들어서, 뜻하지 않게 플로티누스의 유출론적인 계단을 우리 사는 세계에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얼마나 우리는 그 옛날 사람들을 보았던가? 먹을 것 하나 없이, 강에서 노를 젓던. 영어 단어 몇 개가 김소월의 강변 살자처럼 빛이 나던. 한석규. 이문호. 김태길. 박명환. 그 모든 친구들. 박하사탕처럼 돌아가고 싶던. 여자가 추운 날 벌교의 벌판을, 엉덩이를 내밀고 너무 걸어서, 마침내 수녀가 되던지, 사생결단, 영화제목처럼, 수녀가 되었던. 아주 며칠 동안의 전라남도 도청 직원. 그러니까 공무원으로 썩어지지 않던, 성경 속의 나사로 같았던, 사람들. 임권택 감독의 친구들. 영화의 에피스테메가 살아 있는 드라큐라 드라마 같을 때, 사람들은 자기의 생명을 사과처럼 내어놓고, 그것을 사고, 그것을 깨물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정말이지 옛날 기차역만 같다. 원래는 멈추지 않는데, 무슨 사정으로 멈추게 된 간이역. 임예진. 데얼쓰 노 해븐리 햇. 그것을 일본이 해내려면, 얼마나 짜내야 하고, 중국이 하려면 얼마나 침사추이, 갑자기 뭔지 떠오르지 않는데, 어려운 일인지. 우리가 삼국지의 비늘이 바울의 다메섹 도상에서처럼 생겨나다, 벗겨지고 나면, 우리는 한국말이 너무 편하고, 아무런 문턱이 없고, 그러는 것이다. 여자도 마찬가지이다. 얼마나 주파수라도 맞으려면, 하루 종일 공부하고, 때로는 교회에 나가서, 너무 방언 기도하는 것처럼 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묵언수행이라도 해야 했었는가? 남자를, 혹은 남자는 여자를, 그렇게 남신이나 여신처럼 생각했던 것이다. 그것이 모두 다 하얗게 살아있던 사람이 차를 타거나, 가난한 척 연기를 하거나, 때로는 오토바이도 탄다고 여겼던 것이다. 아무리 대사가 헐겁고, 때로는 별로 단순한 젊은 인격들이었다 해도 말이다.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 옛날 그레고리안 성가를 듣다 보면, 늘 하는 말이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 하는 것으로만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서양의 그 거대한 신학이, 나의 목숨적인 생명, 그리고 그것의 끊임없는 판단 같은 문화 경험 속에서, 마침내 부분이 되는 시점. 그것은 정말 슬픈 섹스리스들의 마지막 데드싸인들만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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