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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사기라는 슬픈 말

by 마음대로다 2018. 7. 16.

사기라는 슬픈 말





정치라는 말은 슬픈 말이다. 본질이라는 말이 결국에는 미학과 도덕을 장악하듯이. 독일 축구 선수 중에 외질이라고 있었다. 참 괴씸하고, 동시에 가슴이 아프다 했었다. 우리에게는 학주라는 것이 있었고, 있고, 학질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은 살다 보면 그렇게 외가쪽 사람들과 친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외질은 어쩌면 정략적 결혼 같은 느낌이 든다. 사탄이 거대한 땅 속 계단이 되어서, 계단과 계단 사이에서는 꼼짝도 하지 않은 것이 되었다면, 다 이유가 있고, 그와 같은 외질적인 의미에서 한발자국도 인간이 벗어날 수가 없었다면, 차라리 전쟁이라도 일어나서, 그 머나먼 여정을 오르고, 그와 같은 조여정 중에 죽는 것이 낫고 좋지 않겠는가? 좋은 것이다. 참으로 좋은 것이다. 그것이 인생이다. 본질은 때릴 수 없다. 스스로 때리고, 스스로 분발하여서, 스스로 자라났기 때문이다. 대신에 정치는 때릴 수 있다. 일단 많은 돈과 경비를 지불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때리는 것은 아니지만, 십에 하나만큼은 가능성과 형식이 생기는 것이다. 그 하늘. 그 예수. 물 속에서 바라다 보이는, 하늘. 그렇게 서양문명이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유럽 내적인 분쟁의 연속이기 보다는, 거대한 동서 분쟁의 무기록적 역사 때문이었을 공산이 크다. 그럴 때에만, 모든 정신 내적 모순들이 일거에 풀리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성경 자체가 동서 분쟁의 기록이기 때문에, 차마 그것을 언급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는 것이다. 여자들은 움직일 수 없다. 여자들은 슬픔의 현악기 같다. 남자의 선함을 좋아하는 것은 여자가 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악마의 악함은 아닌 것이다. 어떻게 바둑돌과 같은 것이 남자의 모든 문장들에 반하는 것으로 익숙하기 때문에, 틈만 나면, 남자에게 틈만 생기면, 금방 악해지는 것이다. 여자들 중에도 남자 같은 사람들이 있다. 그것이 그렇게 문명의 모퉁이 속에서 빛을 발한다. 열왕기를 보면, 이스라엘에 아합 왕과 그 유명한 이세벨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세벨은 한국말로 뜻을 해석할 때에만 참으로 위대하게 그림 그려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철학이란 에베소서, 그러니까 그것만 줄기차게, 선명하게, 꾸준하게, 사랑으로 가득하게 생각만 해도 생겨나고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지만, 남자들은 별로 엄두를 내지 않지만, 여자들은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자들은 그 뜻이 하나라는 것을 안다. 어떻게 외계인 같은 아이들을 여자들은 더욱 좋아하는지 남자들은 도통 모르겠는 것이다. 어린아이들이 말하면, 문장들이 붙어 있고, 늘 악마에게서 주민증을 받는다. 독사굴에 손을 넣어도, 별로 두렵다는 인상도 갖지 않는다. 그러나 여자의 자궁을 핑계 삼아, 처음의 문을 그렇게 화려하게 하고는, 사람들을 거대하게 실험하는 장소로 저 멀리에 있는 인간의 역사가 발전하였다면, 예후와 함께 전쟁에 올랐을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다. 어쩌면 여자의 기관을, 말 위에다가, 보일러를 올려놓은 것처럼, 혹은 에어컨을 올려놓은 것처럼, 조금도 핑계를 삼지 않고, 그렇게 남자의 뿔처럼 혼자서 갔을 수도 있다. 이기는 전쟁만이 어떻게 있었겠는가? 질 것 같았더니, 처음부터, 끝까지 그렇게 해내다가, 마침내 승리해서 돌아가는 것도 있었을 것이다. 아합 왕과 이세벨이 그렇게 잘 싸우더니, 예후에게 도와달라는 말도 없이, 네가 시므리냐, 그 말 뜻은 네가 악마의 신학자냐 하면서 싸우다가 죽는 것이었다. 움직이지 않으면, 사람은 이상한 순환 논법에 빠지게 된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아이들을 사랑하게 되나, 그것을 철학적으로 생각하다 보면, 어째서 아이들을 사랑해야 하나 마침내 결론내리게 되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싫어도, 그래도 행동만큼은 늘 천사와 같은 것이 여자들이지만, 사탄이 맹렬히 회전하면서, 도리어 초월적인 그림들을 여자들의 기관과 끊임없이 맞바꾸고자 하면, 마침내 여자들은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는 멋진 존재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 물론 가정이다. 그러니 그곳은 이세벨의 전쟁터인 것이다. 그리고 예후에게는 친구가 없으나, 이세벨에게는 악마들 중에 친구들이, 순열 상으로 매우 많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두려움에, 바닥을 기는 존재가 되느니, 사람들에게 밟히고 차이느니, 사탄이 되는 것이 낫지 않은가? 예후에게는 바닥을 기는 존재가 될 일이 없기 때문에, 그와 같은 생각 자체가 발생할 수 없는 것이다. 이세벨에게는 그 말이 매우 슬픈 말처럼, 친구의 말처럼, 혹은 여동생의 말처럼, 남자답지 못한 어느 소년의 말처럼 생생하게 들려오는 것이다. 기생 라합도, 기생으로 있다 보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고, 전도사건 목사건 할 것 없이 그런 내용을 가지고, 사람들의 머리를 일정 정도 끄집고 가지 않은가? 전쟁이 발발하면, 그것이 거울처럼 선명해지는 것이다. 예후에게는 우리나라 밖에 없으나, 그나마 일본, 그나마 중국 밖에 없으나, 이세벨에게는 전 세계가 그녀의 나라이고, 나라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기록에 없는 고대의 전쟁에 대한 내용들이, 다만 여자의 이름 하나에 의지해서 모든 것이 저장되었다고 하면, 이 얼마나 기가 막힌 노릇이 되겠는가? 집안에서 십리도 벗어나지 않고서 지났는데, 하늘로부터 내려온 거대한 동일시가 그녀를 유럽까지 보내어서 전쟁을 했을 수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거대한 성벽에서 떨어져, 개들이 그녀의 시체를 먹었다 하는데, 다만 그 장면만으로 보이지 않고, 높은 키의 말을 타고, 전쟁을 예후처럼 많이 지내다가, 작전상 그렇게 죽은 것으로도 엿보이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동서 분쟁의 과정에서, 우리에게 용기나, 자의식이나, 애국심 같은 것이 있을지 없을지 걱정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여자들이 행여, 세계관적으로 띠올로지, 적들에게 띠 띠워지는 것을 걱정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아이들과 여자들이 늘 주자에게 문제가 되다보니까, 전쟁도 행여 적들과 싸우기도 전에 내부적으로 문제가 생기는 것이 아닌가 걱정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우리는 죽을 때 쾌감을 느낄 수 있다. 이세벨이 전쟁에 나간 것도, 아합보다는 예후를 좋아해서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탄과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정의보다 감각이 우세한 것은 늘 사탄의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각이 그 어디에 있든지, 살아 있다면, 사탄이 아닌 사람들도 늘 언제나 감각이 살아 있는 곳에 승복하지 않을 수 없듯이, 이승복, 감각이 죽어 있는 공산당이 싫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전쟁에서의 사기란 무엇인가? 이번 월드컵을 통해, 프랑스에게 나로부터 빼앗은 사기가 생긴 것인가? 크로아티아가 체력이 문제였지만, 박근혜 때문에 진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진정 사기라는 말은 무엇일까? 마침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하나님 신앙과 거의 같은 등급의 실체인 지옥과 접선이 이뤄져서, 전력에 막강한 보탬이 되었다는 소식이 아니겠는가? 지옥을 믿느니 하나님을 믿겠다 싶은 것이 그들 존재의 확률이었는데 말이다. 정말 거대하고, 재수 없는 아군들이 잡아 먹히는 것을 보고, 이대로 전쟁터에까지 나아가면, 적들은 이제 꼼짝 못할 것이다는 미소 같은 것이 사기가 아니겠는가? 사마천의 사기도, 문열의 삼국사기도 그것을 본 다음에 기록한, 일종의 조현병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우물가에서 숭늉을 찾는 것처럼, 축구 경기를 재밌게 보다가, 야구 경기에 관심이 가고, 핸드폰으로 그것을 보는 것과 같은, 정신의 내부 조직 같은, 알 수 없는 조형성 같은. 성경 속의 기록은, 우리에게 이세벨이 있듯이, 적에게도 있어서, 예후를 보고, 순간 수십년 망각의 강을 건넌 것일 수도 있다. 예후를 보고, 예후가 맞는지를 묻고, 매우 반가워했다고 한다....


우리는 샹젤리제 가득한 적들의 전두엽, 조현병의 내부조직적 광경에 기겁을 하게 되지만, 그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사도 바울이 권했던 것처럼, 함께 기도하고, 삼국사기를 읽고, 옛 사람들을 떠올리면서, 그레고리안 성가, 우리들의 사기를 되찾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