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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재미 없는 영화는 무엇인가?

by 마음대로다 2018. 8. 2.

재미 없는 영화는 무엇인가? 






멍청한 애민들은 재미 없는 영화가 없다. 그렇다면 재미 없는 영화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그것은 나찌즘 같은 것인가? 윤석민을 닮은 조지 부시가 가장 그나마 미 대통령을 닮았을 때가, 악의 축을 언급할 때였고, 불량국가를 떠들 때였던 것 같다. 아버지 어머니를 조금도 닮지 않은, 그래서 미스테리 중에 미스테리일 것인데, 별로 그와 같은 데에서는 한국 미술 작가 점선면 같은 관심은 가지 않는 듯 하다. 그때 나는 실제 국가로부터 이격되는 승점을 획득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도 악의 축이다. 만드는 영화들이 사탄의 새끼들에게 젓을 먹이는 것이다 하지 않는 느낌이 별로 없다. 사탄은 사탄이 구할 수 있다는 말은, 정말이지 누구도 모르는 것이다. 그 실감이 우리에게 아예 없는 것이 아니지만, 정확한 계측이 어렵고, 그것은 어쩌면 예수님이 피와 살을 직접 인육당하는 순간에도 그들을 제자랍시고 사랑하시는 마음가짐과 거의 동급인 것이다. 힘이 남으면 지켜보는 것이 좋고, 좋은 가라지의 비유가 있다보니, 힘이 부족하면 즉결로 치는 것이 좋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불량국가 같다. 숱한 기사들을 보자면, 그렇게 다들 교육적이지가 않다. 그렇다고, 그와 같은 고엽제의 살포를 당했다고, 그것을 만회하는 에세이나 칼럼 같은 것을 우리가 만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웩더독이라는 미국 영화의 논리와 같다. 우리가 옛날에 정육점에서 소고기나 돼지고기를 살 때 신문지에 둘렀듯이, 신문지를 돌돌 두르면 거기서 핏물이 잘 빠진 소고기나 돼지고기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 같은 것. 뇌가 빠진 육체는 좀비의 창궐 장소이기 때문에, 그나마 신문을 아침마다 찍어내고, 그것을 손수 배달하여, 사람들에게 그와 같은 액막음을 하려하였던 것이다. 그 이상의 의미는 없고, 사람들도 그 이상의 뇌는 없었다. 그러나 그런 에세이스트가 멋진 여자와 함께 도시 어딘가에 살고 있을 것이라는 느낌을 항상 우리는 주고 받고 하였었다. 


재미 없는 영화는 그와 상대한다. 우리에게 재밌는 영화가 있었던 것이 좋은 터닝포인트가 되는 것 같다. 좋은 영화는 우리가 개부시 미국 대통령이 악의 축이나 불량국가라고 부르는 상대와 지속적으로 결부되는 것을, 그와 같은 운명을 벗어날 수 있는 힘이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을 먼저 그렇게 보고 나면, 이제는 악의 축이나 불량국가가 미국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쉽게 된다. 재밌는 영화와 재미 없는 영화는 어른들에게는 구분이 된다. 노동자들에게나, 영화 관계자들에게는 구분이 안 될 수도 있다. 어린아이에게들도 구분이 없다. 사람들도 서로가 재미가 없어야, 좋은 것을 모색하고, 플랜을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맨날 더럽고, 맨날 싸우고, 맨날 화해하고, 맨날 멍청하고, 맨날 티비 보고 떨어지고, 티비 보는 것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니까, 그런 허구연 해설 위원 같은 세월을 보내고 나면, 어떻게 되겠는가? 우주전쟁에서의 화성 로봇이, 우리들 순천 드라마 세트장에서처럼, 일어나서, 사람들을 쫓으면서, 사람들을 광선으로 투시하게 되고, 그렇다 보면 옷만 남고 숱한 세포들은 먼지가 되고 마는 것이다. 우리가 중국의 서북부 지역을 기차를 타고 여행하다가 만나는 큐브들이 그것들인 것이다. 그나마 초원 지역을 여행한다면, 죽기 전에 기독교적인 배화교를 만날 수 있으나, 그런 큐브들을 숨가쁘게 지나다 보면, 우리는 정말 세포에서 재로 순식간에 변화가 되고 마는 것이다. 미국은 얼마나 불량국가 같은가? 미국은 얼마나 영국과 더불어 악의 축 같은가? 미국이, 혹은 영국이, 일년에 한번 그들 문학에 준하는 영화에 성공했다면, 사람들은 다만 마음 속의 응원만이 아니라, 재화와 권력, 오피스와 자리를 갖고 나를 도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권력의 쾌락이 좋았던 것이고, 그것의 백미터를 계속해서 백미터씩으로 이어가다 보니까, 사람들은 콩나물처럼 뚫고 나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누군가 그랬다. 그런 미국 사람들은 점점 한국 사람이 되는 것 같다고 말이다. 뇌와 세포의 호흡은, 기본적으로 비문명적일 수는 있어도, 사탄의 것은 아니겠기 때문이다. 


아주 오랜 옛날에 이집트를 포섭해서, 적국의 심장을 염탐하려는 계획이 있었다고들 한다. 이런 국가적인 엠티 콘테이너적 상상은 별로 신빙성이 없다. 그러나 워낙에 엠티 콘테이너 같은 느낌이 있기 때문에, 돈처럼 통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중해 지역에 강력한 이집트 국가가 있었고, 사탄의 제국이 만만히 전쟁하여 이길 수가 없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동방의 제국과 연합하게 되고, 동방의 제국은 사절로 그들의 할트 오브 다크니쓰까지 들어가서, 인체 실험이나, 무기와 인간의 중간상태, 성적인 심장의 더러운 판막이 들숨하고 날숨하는 것들의 놀라운 인체적 비유가 어떻게 되는지, 그것들에 조금도 비판을 가하지 않는 최첨단의 과학적 과정이 어떻게 확보되었는지를 관찰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집트가 거대한 힘으로써 먼저 있어야 했고, 끝내는 지중해에 수장되는 피날레를 겪어야 했었던 것이다.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 것이, 사탄의 제국이 있었던 때는 그것들이 별로 감추어지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있는 것을 중심으로, 연결은 나중에 최종적으로 사람들이 하게끔 하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그와 같은 연결, 확장, 점령과 통치의 방식은 지금까지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우리가 공포 영화를 처음에는 재미로 보지 않는가? 그것과 마찬가지인 것이고, 옛날에는 도리어 소문이 많이 나기도 했을 것이다. 어떤 전략 같은 것은 있었을지 모르나, 국가가 철학적이고 신학적으로 키와 부피를 팽창해야 했기 때문에, 고답적인 것은 스스로 제거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고려였을 때, 대체 삼국은 언제까지이고, 고려는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모르는 일인 것이다. 정확히 언제부터 고려가 시작되고, 노국공주 그리고 공민왕으로 언제까지 지속되었는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다들 하나 같이 특징이 있었고, 열정적이었다는 것이 의심스러운 것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공무원들은 별로 없지 않은가? 레이건을 보자. 클린턴을 보자. 겨우 악의 축이나 언급했던 조지 부시만 내가 기억할 뿐, 우리는 잘 모르는 것이다. 대통령이 영화에 출연하고, 노래도 해서, 빌보드에도 올랐다면 사람들이 기억할 것이다. 고려는 그와 같은 중간 단계를 뜻하는 것이고, 그와 같은 중간적인 의미는 조선에까지 미치게 된다. 이것들이 다들 사탄의 끄나풀인 주제에, 무슨 사회적 사건의 내용인 것처럼 치장을 해서, 속성을 과다하게 베풀고, 서로 썰전을 펴는 것을 보면, 그것을 대하는 우리의 두뇌가 점점 고려타분해지고, 조선만, 남자건 여자건, 정이건 조선만 남는 것은 불가피한 일인 것이다. 


중세에서 서양은 동양의 고려를 의지하는 바가 있었다. 땅속 깊은 곳에서는 계속해서 탁한 유리관의 실험이 이뤄지고, 지표면에서는 사람들이 멍청한 나무 숲들과, 도시에서는 카니발리즘이 반복해서 발생하는, 인간이 자연을 보고 느끼는 쾌락은 권력이 아무런 정신 없이 주자를 향해 느끼는 것과 거의 같은 세포 수준의 것인 것이다. 서양은 자기들도 거대한 고려라고 얼마나 자부했는지 모른다. 그래도 그것의 지독한 끝을, 어떻게든 동양에 심으려고 얼마나 노력했었는지 모른다. 모든 외교와 담판, 모든 협박과 권모술수, 숱한 광기의 셰익스피어 연극들을 동원했는지 모른다. 그것의 섬세하고, 보이지 않는 것에까지 노력함이라는 것이, 때로는 불쌍하고, 연민의 정까지도 갖게 하는 것은, 철학적 판단이 없는 사탄의 문학이란 결국에는 사람이 굼벵이가 되는 것이고, 굼벵이와 같은 크기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걷다가 굼벵이에 놀라는 일은 없지 않은가? 아프리카 노래에 꿈바야라는 것이 있다. 내 어렸을 때, 카세트에서, 얼마나 존 바에즈 노래가 자주 들렸는지 모른다. 굼벵이와 같은 형질이 되고, 그것과 같은 크기가 된다는 것은 의도치 않은 것이었다. 그런데 마치 인간이 그와 같은 말만 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하고, 자기도 그와 같은 말만 하는 사람이 되고 나면, 과연 신기관들로 가득한 사탄의 제국의 실험이, 뜻하지 않게 만년이 지난 다음에 그것을 결과물로 갖게 되었다는 것이, 그래서 그들에게는 그것이 무슨 거대한 차원의 이동을 뜻하는 것인 걸로도 보이는 것이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의 실상이라고 했다. 정확한 뜻과, 무엇보다도 정확한 말이 무엇인지 우리는 모른다. 기독교인들은 그냥 그것을 아는 것 같다. 신기관들로 가득차 있는 것들은 사는 것이 괴롭다. 문학이 산뜻하고, 좋은 철학을 만나고, 함께 커피와 담배, 가볍게 드라이브를 즐기는, 그렇게 시간을 보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거대한 고려의 외교 사절이 동양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인도의 역사는 굉장히 오래되었다고 하는데, 고려에서 우리가 조선으로 국호를 바꾸고, 새로운 국가를 세계에 표방하고 나자, 덩달아 중국도 화산이나 청해호처럼 높아지고, 일본도 후지산처럼 높아지고, 한국을 향해 맹렬하게 의식의 중국 여행을 떠났던 사절은 돌아갈 힘도 없이 인도에 남고, 나머지 보다 잔혹한 것들은 물과 섹스 밤하늘의 별과 같은 생존의 아라비안 나이트들이 되었다고 한다. 




국가는 본질을 향해 가게 되어 있다. 그리고 자기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들은 죽게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