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대공황과 서울의 달, 그리고 IMF
아름다운 클래식 음악이 배경이 되어야 하는데, 백경, 이와 같은 말은 은빛으로 빛나는 갈치와 같아서, 때로는 가슴이 아프기 때문이다. 우리가 앞으로는 영문학을 생각할 때, 그들의 에이브이가 현격하게 재미가 없거나, 단순하거나, 때로는 야만적으로 흘러가는 이유를 함께 생각해야 할 것이다. 황태자와 같은 문학도가, 사회에, 문단에 접수가 되지 않아서, 모든 감각이 태워지고, 모든 내적 함수가 같은 말이지만 불타게 되면, 같은 형상이 일단, 마치 하나의 섭리처럼, 만나게 되어 있다. 나와 같은 사람도 방정식으로만 보면, 좀비급인 것이다. 그러나 기를 쓰고, 좀비물을 보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오직 하나님만 낙차가 없으시지, 내가 아무리 고통의 무한한 개별자가 되었다 하나, 보는 것이 그대로, 내게, 새 부대에, 백두산 부대, 노도 부대 하듯이, 채워지기 때문이다. 그것을 걸러내려면, 굉장히 많은 장비가 필요하고, 그것에 전문가가 된다는 것이 그렇게 결과가 좋거나 영광스럽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그곳에 실은 이처럼 격전지가 있다. 거의 비엔남 워 수준이다. 존재가 좀비급인 사람이 어디에나 있다. 나는 주로 주자라고 부르지만, 굉장히 요구되는 것이 많기 때문에, 주자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것이다. 나 정도는 되어야 하는데, 그럴려면, 차라리 나 말고는 주자가 없다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나 말고도 주자는 있고, 주자는 산처럼도 있으며, 지방의 아름다운 아파트처럼도 있다. 배달을 가면, 조용하고, 차분하고, 여자는 예쁘고 젊은, 명랑한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가진 지식과 지오피에 비해서, 세계적인 인정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형식적으로 보면 주자에 가까운 것이다. 그렇게 도시에 드리운 안개나 드라이아이스처럼 주자는 갈무리가 될 수 있다. 신라의 포석정처럼, 주자는 그렇게 나무와 나뭇잎, 그리고 쓸쓸한 공기처럼 자리할 수 있다. 다만 나는 그 모든 것의 표본이 된 것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주자를 남발하고 나면, 세계를 직관할 수 없고, 격전지라고 부르는 그 섬세한 내면은 애초에 들여다 볼 수가 없다. 서양은 좀비로 들어가는 두 가지 통로가 있다. 하나는 클래식 음악이다. 우리는 클래식 서양 고전 음악이 되겠지만,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그런 막강한 하나님의 기운을, 아무런 문턱 없이, 태생이 그런 것처럼 향유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여름 날, 문을 열고, 거리로 나가면, 반대로 덥다고는 하나, 친구들과 트래킹을 재밌게 하고, 집으로 가면, 도시로 접어들면, 단번에 기분이 좀비가 되는 것이다. 원래는 존재와 무가 아니라, 존재와 좀비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 했고, 화이트 헤드는 과정과 실재 했고,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 했다. 셋 모두, 좀비를 견뎌내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경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셋 모두, 그 어디에서도 시간과 실재, 혹은 과정, 그리고 무에게서 좀비를 발견할 수 없다. 아름답고, 말 그대로 과정이며, 그들 특유의 인접 국가의 풍경처럼, 그것의 보더라인처럼,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을 보는 기쁨 같은 것이 있다. 그러나 그것의 마지막은, 어쩔 수 없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좀비들인 것이다. 그것을 드러내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그렇지 않은 것이 좋은가? 좀비가 되는 두 번째 길은 성욕이다. 확실히 공포물이나 좀비물을 보면, 성욕이 기가 죽고, 불교식으로 말하면 참 나를 발견하는 부수 효과를 얻어낼 수 있다. 우리가 사군자 중에서 난의 그림을, 좀비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앞으로는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이제는 어떠한 난으로도 이 막강한 그림과 표본, 지도와 해석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잎을 그리다가, 향기로운 꽃을 그린 경우, 우리는 결국 존재의 좀비물적인 쓰레기 위에서, 그것의 시간을 알류겐하는 것일 것이다. 그것도 좀비물이다 생각할 수 있고, 그렇지 않고, 내부의 부정적 계기, 그러니까 카이로스, 혹은 제네시스적인 시간이다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서울의 달은, 결국은 그렇게, 제임스 라스트의 잘 져며진 희망의 씨앗처럼, 피지 못하고, 씨앗들이 분열하여 꽃처럼 위장하는, 마지막, 서양의 풀문 호러 무비들과 지평 융합을 하고 만다. 사람들은 나를 만나면, 보다 이순신 장군상을 닮은 사람들이 많아서 그렇지, 자연적으로 햇빛 아래서 나를 만나면, 행여 난중일기의 주인공이 아닌가 생각했었다. 나는 한복을, 서울에서 딱 몇 번, 엑스트라를 한답시고 입어본 것 말고는, 입어본 적이 없다. 그러나 사물과 존재는 그러하다. 그것을 직접적으로 살에 붙이고, 여자를 만나고, 어떤 건물에서 시간을 보내고, 화장실을 다녀오고 해야, 사물이 존재에 귀속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대공황이라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세계. 일차세계대전이 발발하고, 그것의 원인과 결과를 두고, 세계 선진국이라는 사람들이, 비문화적인, 비문명적인 행태를 세계 만방에 과시해서가 아니겠는가? 어째서 경영학자들이, 경제학자들이, 그와 같은 세계 초자아 전쟁의 관점에서는 그와 같은 사태를 해석하지 않는 것일까? 그러니까 그와 같은 관점의 능력 자체가, 시력 자체가, 자연적으로 있지 못한 것이다. 나는 가끔 사탄이, 천사와 선이 구조를 담당했다면, 역사를 담당했다는 말을 하는데, 이문열의 말처럼, 이문열은 정말 언급하면 할수록, 이상하고, 원균 같고, 사탄 같고 그렇다. 나는 문재가 있어서, 덜 귀찮지만, 문재가 없는 사람이, 문열의 사탄 같은 모습만 보면, 도리어 싫고, 막 싫고, 증오하고 싶고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시인은 괜찮았다. 다른 내용들은 거의가 장 질환에 걸린 것 같았지만, 시인은 스스로도 내가 왜 이렇지? 하는 아주 비상한 노력이 경주된 것이었다. 물론 김삿갓, 유치원의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마지막이 있는데, 그것을, 그와 같은 소재 선택을 지우려는 노력이 분명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문열의 친구도 아니고, 가족도 아니고, 친척도 아니고 하는데, 편들 필요는 없는 것이다. 아직 죽은 사람이 아니고, 하여튼 모든 소설들이 약간 불괴 그러니까 불편하고 괴이하다. 그래도 그의 날개가 제법 월 스트리트를 닮은 것은 사실이고, 나의 일그러진 영웅 같은 것은 영화로 아주 재밌게 봤던 기억만 있다. 아무튼 사탄은 그나마 날개를 갖추는 것을 선호하는 것이다. 날개도 없는 불량 것들의 전쟁 같은 것을 사탄이 일일이 간섭한다는 것은 사실 우스운 일이다. 그렇다 보면, 반드시 유치원 선생이 되거나, 비사감이 되어야 하는데, 기초 장교라는 의식의 초월성에, 도리어 사탄이 착해지는, 한판 패를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죽고 사는 것은 가벼운 것이다. 간섭을 하다 보면, 다만 적자생존보다는 다른 관념을 피력해야 하는 것이다. 적자생존 같은 사탄에 있다가, 사탄이라는 관념으로, 잃을 것이 없다면서 들어가는 일은 없는 것이다. 전쟁터에서 지더라도 돌아오는 것이지, 승리해서, 돌아오지 않고 지옥으로 더 들어갈 일이 무엇이겠는가? 세계 대공황은 딱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수준인 것이다. 도대체가 셰익스피어와 헤겔, 클래식 음악, 기독교의 높은 서먼, 그런 것들이 세계 대전 이후, 기초적으로 나타나거나 회전되지 못한 것이다. 추잡하고, 야비하고, 단순하고 형식적이더라도, 구제와 회유, 네메시스가 있더라도, 아주 작은 홍콩 같은 이념, 그런 것 하나 없이, 회생 불능의 민족을 만드는 잡것들 밖에 일차대전의, 그때는 그런 느낌이 없었겠지만, 결과가 없었는 것이다. 유명한 목사의 서먼이 있을 수 있었는 것이다. 그것이 비밀이고, 핵심인데, 그것이 우리들 어느 음악 퀴즈 프로그램에서의 어리고 젊고 잘생긴 가수 키인데, 혹은 더블유에서의 주인공이 자꾸 여주를 가리켜 했던 말이기도 한데, 그것이 쉬운 일이었다면 어째서 성경이 낮은 울타리를 가지면서 천년 만년의 공동묘지가 될 수 있었겠는가? 새로운 시대의 과학과 경제를 두고서도 안하무인격이 될 수 있었겠는가? 사탄은 그나마 사람들이 선하기를 원했는지 모른다. 떨어질 때, 어느 일본 앤터 내용처럼, 맥주와 함께 교촌 치킨 윙을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사람들이 자기를 가리켜, 스스로 사탄이라고 여기고, 적자생존이라고 여기고, 그런 뜻하지 않는 폭로, 그렇다고 보니까, 모든 아름다운 예술이 뉴욕의 하늘에서 증발하고 만 것이다. 천사와 선은, 사탄들이 이차대전을 모의할 때 내심 좋아했었는지 모른다. 천사와 선은 너무 힘들고, 세계 지배는 생각할 수도 없고, 사람들의 의식을, 박쥐의 날개에서 적어도 식감이 가능한 닭날개로 만들기 위해 사탄들이 노력한다는 것이, 어쩌면 자기들이 할 일을 대신 하는 것 같았지 않았겠는가? 우리가 금관악기의 퍼레이드나, 오케, 그런 가라오케들을 좋아하면서도 경계해야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사도 바울의 그와 같은 말씀은, 결코 우연이 아니고, 종말의 날에 우리가 지옥과 사탄을 보는 거울 속에다가 심어놓은, 태고적 선자의 슬픈 웃는 얼굴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서울의 달 이야기를 못했는데, 그냥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
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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