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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미스터 선샤인은 작품인가 신드롬인가?

by 마음대로다 2018. 7. 20.

미스터 선샤인은 작품인가 신드롬인가? 






작품은 아름답다. 그리고 비싸고, 죽을 때도 비싸고, 살아 있을 때도 비싸다. 개인은 죽을 때 공동체가 되고, 그와 같은 공동체의 꿈은 비싼 것이다. 미스터 선샤인이 우리에게 만족감을 주는 것은, 이병헌이 미국인이라는 사실보다, 그 시절의 우리들의 작품들이 너무나 아름답게, 드디어 뒤늦게, 너무나, 육십년 대보다 더 늦게, 이천십년대 말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목재라는 것이 시멘트 블록보다 값이 없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에도 목재소는 향기가 아름답기로 유명했었는데 말이다. 그처럼 강력한 우리들의 식민지를 놓고, 사람들이 다만 신드롬이라고 해도 흐르는 눈물을 막을 수 없는 것이다. 배경이 작품이고, 무대가, 세트와 물건들이, 사람들이 신드롬이라고 해도, 가끔씩 흐르는 클래시컬한 음악이 그렇게 사람들의 샅바를 잡아 당기고, 유도복의 멱살을 잡아 흔든다. 나의 공동체적 의지까지 포함되어 있대도, 드라마는 벌써 우리에게 유행하는 것들의 신드롬에 포섭되어서, 다시금 신드롬드롬드롬 할 것 같은 느낌이 있다. 러브가 무엇이요? 하는 순간에는, 나는 배우 김태리에 집중하였지, 작가 김은숙에게는 도저히 아무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국문학이 아깝고, 그렇게 김윤식이, 그리고 황아무개가 아깝고 그렇다. 어째서 나는 이렇게 서양의 모든 고전주의를 답습하고, 심지어는 그것의 모든 엑스트라 테레스티얼 띠오리스트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나 주관에게 닥친 수많은 영상들, 위협들에 대응하기 위해서 바삐 움직인 것 뿐이지만, 외국어와 개인적인 철학 능력이 없으면, 다만 억울하게 죽을 뿐, 마땅한 논리적인 반격이나, 스스로의 철학 같은 것을 만들어낼 수 없지 않겠는가? 그와 같은 막연한 억압 아래서, 출구는 다만 서양을 정복하고, 설득하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미스터 선샤인처럼, 부지런히 국문학적인 도를 닦는 것도 얼마든지 방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들이 식민지 시절에는 만주 독립군들이었으면서, 육십년대 칠십년대 대학에서는 매우 키취스럽고, 팔십년대에 이르러서는 모호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 같은 것을 흉내내기도 했었다. 그러니까 나와 같은 슈퍼 샤이안들이 만나지 못할 위인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만일 누군가 돈을 보태주어서, 자기가 로또에 당첨되었다면서, 경희대학교 국문학과 대학원에 입학해주었으면 한다는 제안을 내가 받았다면, 나는 일억원이나 되는 돈을 오직 한 사람의 배움에 투자하겠다는 말을 듣고 거절은 커녕,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엎드려 절을 하면서 청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리고는 혼다나 야마하에 가서, 멋진, 천오백이 넘는 네이키드 오토바이를 구입하였을 것이다. 그렇게 다닌다고 해도, 심지어는 국사학과에서 조인이 들어오고, 거기서도 연구비와 생활비를 보태주었다면, 이번에는 할리를 타고 다녔을 것이다. 공부는 말을 타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혹여 지적을 받을 지언정, 주차한 것이 늘 신경쓰이는 것이 가당치 않는 것이다. 우리들의 잃어버린 천국은 그것을 말하고 있다. 약간 복도 앞에까지만 접근하려고 했다. 그런데 복도 끝에 제법 안정적인 자리가 엿보이는 것이다. 돌과 돌 사이, 나무와 나무 사이, 누군가 공부하고 있다는 고뇌의 철물, 흔적, 그것의 심톰, 신드롬인가? 심톰인가? 사람이 없는 줄 알고 복도를 할리를 타고 가로지르는 것이다. 없던 사람들이 다 튀어나오고, 그 이후로는 미안하다는 말을 하였지만, 너무 괴상하고, 학생들에게 나는 애마주의자, 혹은 버릇 없는 유미주의자로 불리웠을 것이다. 공부를 하다가 어떻게 차를 타는가? 우리들의 이마는, 우리들의 이마의 주름은, 그것이 태양열처럼, 물론 핼멧을 쓰겠지만, 우리들의 뇌주름과 연속하는 것이다. 도덕은 숨겠는가? 아니면 분명하게 언급하겠는가? 미국말을 받아들이면, 그런 부끄러움을 의식하는 처음이 늘 있는 것이다. 좋아하면 좋아한다고 말을 해야 한다. 얼마나 공부는, 선택도 필요하지만, 절대의 양이 늘 항상 요청되는지 모른다. 그리고 범주와 범주를 가로지르는 엄청난 작업이 필요한지 모른다. 그것을 통과할 때는, 매우 피곤하고, 꽃이 정말 피고 지는 것 같다. 그런데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그것의 중층적인 제스쳐라면 일종의 포크댄스처럼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의식의 깊은 차원에서, 옷을 벗는 것과, 좋아하는 것이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약간 무분별적인 순수함을 갖고 있는 사람이면, 공부의 자리가 늘 남녀가 부딪히는 자리인데, 그와 같은 무분별과 자기를 사랑하지 않음이 공부의 내용에까지 영향을 미칠까 두려움이 생기는 것이다. 영향을 미친다. 대학에서 보면, 내가 나의 글만 읽는 때가 그것이다. 그들의 종합은, 그리고 그들의 출구는, 교묘하게도 신드롬이나 심톰과 연속하는데, 내가 아주 잠깐 지냈던 시간대인 것이다. 그렇다면 못생긴 남녀들은 공부하면 안 되는 것이냐? 그것이 아니라, 흥미로운 드라마가 그들의 과에, 혹은 과의 연합에 생긴 것이라고 봐야 하는 것이다. 얼마나 여자들은, 남녀 서로 자유로운 공부의 공간이, 귀하고, 기적과 같으며, 내일은 없는 죽을 일과 같은 일인지를 알아서, 남자를 먼저 찜하고, 남자도 그와 같은 돼지 포크 댄스를, 에너지가 형식 없이 지나가는 것이, 얼마나 슬픈 일인지를 알아서, 받아주기도 하고, 받아주는 것이 도리어 안 받아주는 것 같은지, 그런 식으로 대응하는지 모른다. 그것을 잘하는 여자의 글은 읽을 만 하고, 그것을 잘하는 남자의 논문은 정말이지 생성되면 가장 먼저 구독하고 열람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우리는 시간 낭비가 죽음과 같다는 것을 안다. 그것은 청소년의 문장이지만, 대체되는 것이 없이, 나이가 들어서도 같은 단어 같은 의미로서 시간 낭비라는 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교수님은 어떻게 결혼했는지가 대게가 비밀이고, 비밀의 숲과 같고, 그래서 그는 수많은 인격이 자라지 못한 사람들의 논문도 같은 무게로 달아주고, 돈을 지불해주고, 칭찬해주고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학의 빛, 어떤 엑스트라 테레스티얼 에일리언즈 띠오리스트 같은 것은, 우리에게 직관을 가르치고, 단도를 가르치며, 지름길을 펼쳐보인다. 


대학의 건물이 서너 개 있었을 때가, 가장 영혼에 가까웠을 것이다. 결국에는 영혼을 지적하고, 그것을 증명하며, 자기 자신에게도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 대학 교육의 목적이 아니겠는가? 서울대학교가 무엇이겠는가? 다만 분절과 기교의 총합을 누가 가장 많이 사격 연습 맞히는 것의 마지막과 같은 것인가? 그래서 논리적으로만 보면, 사물과 영혼의 제도적, 관제적, 혹은 물질적 배경적 측면에서의 충돌이 충분히 가능하지만, 아직까지는 서울대학교 내에서의 총격 사건에 관해서는 보고가 된 바가 없다. 누군가 싫으면, 오이를 껍질 벗겨 먹고 있다가, 오이로 때리고, 얼굴에 짖이기는 것이 전부일 것이다. 수박이 있으면, 있던 자리에 수박을 모세처럼 들어 내리치는 것이 전부일 것이다. 우리의 두려움이란 것은 그것이다. 미스터 선샤인은 수많은 작품과 같은 배경을 두고, 신드롬 같은 것에 안착하여서, 다른 나라의, 소위 문화 선진국의 인물적인 것에도 작품인 것에 침입을 받는, 시간이 지나고 나면 겨우 통로나 되지 않겠는가 싶은. 좀비가 사람을 잡아먹는 것만은 아닌 것이다. 오히려 기관으로서는 영락 없이 좀비이나, 일절 사람은 먹지 않는 이들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대신에 아름다운 사람이 지나가면, 자기 자신에게 전자 반응이 일어나서, 그들이 지나간 뒤에도, 그들 사람의 목소리며, 자기에게 합성된 것의 관심과, 열정, 생각의 도전 같은 것이 생기는 것을 즐기는 이들도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까지도 잡아먹은 것이다 따질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좋은 절에 다녀오고 나면 그렇지 않은가? 좋은 기운을 받고, 공부에도, 생활에도, 신앙 생활에도 연속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좀비도 마찬가지이다. 좀비들에게도 작가가 있고, 보는 눈이 있고, 아름다운 사람에 대한 안목이 있고, 대학을 다닌 기억이 있으며, 좀비들에게도 한국인이 있는 것이다. 미스터 선샤인은 그것을 어느 정도 감추고 있다. 얼마나 좀비는 눈물도 많이 흘리는지 모른다. 좀비는 거의 모든 세계 문화의 코드와 같고, 통로와 같다. 미국 청년들이 영화를 만들려 하면, 레오 까라 같은 것을 시도하다가, 백이면 백, 좀비를 시도하게 되어 있다. 엑스트라 떼레스티얼. 좀비들 중에도 기억의 콤파스를 갖고 있는 것들이 있다. 그러니까 분장을 잘하면 정말 인간 중에 인간, 참 인간의 느낌마저 줄 수 있다. 모든 관계적인 이중첩자는 늘 언제나 그림자나, 어느 일본 애니의 내용처럼, 좀비로 분류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문학을 하거나 신학을 하는 것이, 이중첩자일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들의 뉴스에 어느 신학생이 문학 공부를 아주 잘한 것이 이슈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국문학생이 독일 철학을 잘한 것이 보도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늘 언제나 과도한 육체적 탐닉이 문제가 되고, 오직 그런 것만이 방송들의 지능에 적합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정히 좀비 뉴스 거리가 없으면, 육체적 탐닉의 그물을 다시금 드리우면 되는 것이다. 미스터 선샤인은 좀비와 같은 구려의 운명, 그와 같은 수레바퀴에서, 처음으로 백제인을 본 것 같은, 일종의 집단적인 신드롬 같은 것을 담아낸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니까 말 그대로 고통의 흔적이지, 좀비 만들기와 같은 복잡한 의도와 간계는 아닌 것이다. 사람이 고통스러우면 미국 여행을 다녀오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