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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어째서 국문학은 멸망하였는가?

by 마음대로다 2018. 6. 25.

어째서 국문학은 멸망하였는가? 





우리는 책임이 있는가? 빌라도도 예수님에게 책임이 없다 했지 않은가? 그리고 돌아가신 다음에야, 로마군은 그에게 유대인의 왕이라고 칭하였지 않은가? 어째서 우리는 문학에 책임이 없고, 결국에는 국문학은 멸망을 당하기까지 하였는가? 육이오 전쟁 몇십 돌을 맞이해서 그렇게 생각이 드는 것이다. 사람은 죽을 수 있고, 국가는 멸망할 수 있다. 그런데 문학은 처음이 어떻게 있는지 모르고, 그것이 성장하고, 그리고 쇠잔하고, 그리고 죽는 것이 있다면 어떻게 죽는 것인 줄 우리는 알지 못한다. 어쩌면 이중생명의 쾌락이 문학이어서, 사람들이 생존만 하게 될 때는, 그와 같은 쾌락은 마음껏 절제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다. 문학의 화랑들이 많아서, 문학을 위해서 죽어도 좋을, 오늘 날의 보이지 않는 고지를 향한 전쟁을 얼마든지, 그러니까 그 젊은 피가 얼마든지 보충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이 죽을 수 있고, 국가가 가능성이 있지만, 문학은 우리가 일제를 보냈던 것의 경험을 반추해보면, 죽었다고, 혹은 멸망하였다고 말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국문학은 멸망한 것이다. 그렇다면 암살을 당한 것인가? 전지현. 아니면 외국문학과의 전쟁에서 지고 만 것인가? 정은채라는 이름은 혹시 까먹어도, 거 뭐시냐, 그렇지, 그렇게 다시 생각하기가 쉽다.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닌 사람 이름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알기 전의 일일까? 아니면 알고 난 다음의 일일까? 알고 난 다음에는, 그렇게 무의미하고, 내 자신도, 상대방도, 작년에 왔던 각설이 같고, 다만 알기 전에는 우연히 걷는 시가지, 그리고 잘 모르는 사람과의 만남 같기만 한 것이다. 국문학은 멸망하고 만다. 그것이 그의 운명이다. 만일 그와 같이, 사람들 사이에서, 나도 살고, 국가도 살고, 문학도 사는 기가 막힌 홍어 삼합 전라도 정식을 맛보려고 한다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뛰어야 하는 것이다. 문학이 가장, 그것이 가장 뜨거울 때,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인기를 끄는 것이다. 그래서 그와 같은 문학적 실존만이 있는 것이지, 고전이라는 것은 거의 모든 것이 높이에의 허구인 것이다.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고, 높이에의 허구를 통해서, 어떻게든 바람이 불어온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실존을 문학으로 놓지, 고전을 별로 문학으로 놓지 않는다. 일종의 시각적인 오류이겠지만, 실존은 문학에 가깝고, 고전은 철학에 가깝다. 하지만 셰익스피어도, 헤겔도, 플라톤도, 성경도, 거의 모든 고전이 철학이 아니라, 문학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 기분과 마음이 많이 이상해지는 것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 정은채가 나를 좋아한다고 고백하고, 저 먼나라 야만의 습성처럼, 어느 날은 매우 야한 옷도 입고 나온 것을 경험한 뒤에는, 나는 갑자기 생긴, 미래에 생길, 육체를 향해서, 공부를 다짐하고, 정신을 어떻게든 페트라의 알 무슨 곳에 끌어오려고 노력하였을 것이다. 책을 읽다가 잠이 드는 것이 부지기수이고, 이해가 되지 않는 수많은 문장들의 숲을, 마치 전쟁에서 살아돌아올 수도 있고, 탈영할 수도 있으며, 그 속에서 죽는 꿈을 꾸는 것으로다가 진행하였을 것이다. 우리는 아직 읽지 않은 책으로다가 죽는다. 육이오 전쟁은, 그 속에서 발발이 약속되었던 것이었는지 모른다. 얼마나 어느 때는 편법을 쓰고, 어느 때는 철학 사전 같은 것은 읽지 않는다 하고, 어느 때는 읽으며, 어느 때는 요약하지 않는다 하며, 어느 때는 중고등학교 식으로다가 암기하고, 요약하고, 그것을 노트 정리하기까지 하는가? 죽는다. 일본어로 우리는 신학대학교를 다니면서, 눈물을 흘리고, 죽는 것이다. 야구와 축구는 그와 같은, 영화 신과 함께에서의 마지막 스테이지일 수 있다. 우리는 공부할 때도, 물론 야구도 할 수 있고, 축구도 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원인을 두고, 거의 모든 생명을 내기 걸어야 한다면, 우리는 미국과도 싸워야 하고, 영국, 유럽과도 싸워야 하며, 조선의 유생들은 공자 묘에서 제를 올릴 것이 아니라, 중국의 유생들과 싸워야 하는 것이다. 실존적 자아와 타자와의 무한 투쟁 같은 것은 일단 아닐지라도, 얼마나 많은 분쟁의 원인들이 있는지 모른다. 원인을 철학적으로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알 수 없는 전체성으로다가 탐구하기 때문에, 그 어떤 중간 존재의 죽음에 실감이 보태지고, 그와 같은 꿈은 마침내 이뤄지기까지 하는 것이다. 야구와 축구는, 우리 아름다운 영화 고지전처럼, 원인을 향한 현재의 영원한 투쟁처럼 보이는 것이다. 우리에게 고지전은 어느새 고전의 반열에 오르고 말았다. 이문열도 달성하지 못한 것이고, 이문열이 답보의 상태에 있는 중에, 갑자기 고지전이 막걸리와 해물파전, 혹은 동래파전보다 깊숙히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말았다. 그 두 대사가 그렇게 우리의 마음을 울린다. 한가지만 물어보자. 내가 너를 어디선가 만났을 때, 니들이 전쟁의 이유를 모르기 때문에, 전쟁이 발발하는 것이야 했는데, 그렇다면 너는 그 이유를 아냐? 글쎄. 그때는 안 것도 같았는데, 너무 오래 되서 기억이 안 나. 그리고, 그 아름다운 벌판, 산이 올려다 보이는 에덴, 오직 전쟁 놀이로써, 새로이 생긴 자기 생명을 입어 보고, 추위를 견디고, 재미와 의리를 챙겼던. 적의 저격수에게 주인공이 맞고 죽을 때, 찾아온 전우에게 이렇게 말한다. 어머니가 보고 싶은데, 어머니 얼굴이 기억이 안 나. 우리는 그 말들이 모두 한국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특히 후자에 관해서는 해석이 분분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지금 그것을 우리들 국문학의 죽음, 혹은 문학의 멸망이라고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 전지현표 암살을 당한 것도 아니고, 외국 문학과의 대결에서 우리가 패배한 것도 아닌 것이다. 친구가 집에 놀러와서, 먹을 것이 하나도 없는데, 인절미 굳은 것을 어떻게 구워서, 부드럽게 하고, 조청과 함께 어머니가 내주시면, 얼마나 맛있게 먹었던가? 가장 좋은 것이 친구가 공부하러 온 것이다. 그것의 산냄새며, 강아지 냄새, 소가 있는 부유한 냄새, 그리고 책 냄새, 책의 내용보다도, 먼저 책은 그와 같은 냄새에도 일조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시골 학교라지만, 일등 이등 삼등이 있고, 정은채 같은 아이가 눈물을 흘리면서 나를 좋아하는 이유는, 내가 먼 나중에, 죽음을 담당하는 신학교 출신의 소설가가 될 것이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가 광주사태를 보면서도, 그것이 문학으로 감당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실감하였었다. 겨우 모래시계가, 그리고 정은채 같은 고현정이 동해의 정동진에서 경찰들에게 잡혀갔던 것도, 너무나 무리한 마음으로다가 추진하였지만, 그러나 경찰들이 그것의 문학적 가치를 보장해주는 것으로다가, 그러니까 그 복잡한 사정에 관한 역린적인 표현이 있었는 것이다. 문학이 죽으면, 사람은 죽는다. 옆에서 전우가 죽고, 반에서 늘 일등을 하면, 도시에서는 오직 시체 냄새 뿐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적과 내통을 한다는 것도 별로 중요한 사실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문학이 죽으면, 도시는 좀비들로 다시, 즐거움들로 다시 차오를 수 있고, 적과 내통했던 것도 어떻게든 매듭을 지을 수 있으나, 문학이 죽으면 끝인 것이다. 그렇게 고전이 어렵고, 사람들을 문맹으로 만들고자 조선의 사대부들이 살고, 그것만을 위해 노력한 것이 아니었다면, 다만 곡괭이를 들고, 호미를 들고서도, 그 사람들이 죽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문학은 매우 비싼 것이고, 일요일 아침 프로그램에서처럼, 가치를 매길 수 없는 것이다. 문학이 옛날 아이젠버그 괴수 인형 영화에서처럼, 철수 영희 크로스하는 것처럼, 학교와 크로스, 유행과 크로스, 신문 연재와의 크로스, 신학과의 십자가 신학, 공부를 못해 눈물을 흘리는 여학생과의 크. 로. 스. 그것의 이름 비슷한 의류 메이커, 크로스라는 것은 그나마 생명이 빚을 지면서까지 이어진다는 것일 것이다. 우리가 월드컵의 에이매치들만 본다고 해도, 그것의 부단한 단속을 감지할 수가 있다. 고수가 죽을 때 남긴 말이 우리의 마음을 훼파하는 이유는, 정확한 그 뜻을 우리가 알지 못해서인 것이다. 우리가 숱한 어려운 책들, 미래의 책들을 책상에 놓고, 학교 공부와 함께, 마음 공부의 단군들을 가질 때, 그것이 하나라는 것을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을 때, 불행히도 그 뜻의 전모를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는 것처럼 우리는 나 혼자만이라도 사는 것이 재밌고, 그렇게 즐거울 수 없었다. 모든 학생은 적성을 좇는다. 자기가 문학을 코딱지만큼일지라도 잘하고, 코딱지의 코딱지만큼이라도 인정을 받았다면, 지방의 하나도 모르는 대학의 국문학과를 지망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학교 생활의 냉정함은, 그 사실 하나만큼은 냉혹하게 지적해주는 것이다. 여학생은 국어 선생님에게 이름조차 기억되지 않을 때가 많은 것이다. 마이클 더글라스가, 베이직 인스팅트에서, 여자 악당에게 송곳으로 죽임을 당할 위협에 빠졌던 것도, 여자 악당에게 단 한 번의 인정의 눈길을 보내주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다. 세상에 그렇게 오래된 물건들을 두고, 이렇게 하루살이 같은 삶이 없는 것이다. 자존심에서라도, 내 생명이 일회용이면, 성경을 읽지 않고, 다른 고전에는, 오래된 사찰 같은 것에는, 관심도 없어야 하는 것이 정상인 것이다. 중동 지역의 분쟁이, 그것의 역사가, 그런 쓸데 없는 것에서도 원인들이 많을 것이다. 문학이 야구를 하고, 쉬는 시간에 친구들과 축구를 차고, 농구도, 탁구도, 배구도, 볼링도 하고 하면, 그렇게 발전이 되고, 기분이 업되고, 생각과 지혜가 배가가 된다. 내 예전의 여자 친구도, 탁구를 치는데, 백드라이브를 넣는 것이 그렇게 일품일 수가 없었다. 아름답고, 아름다웠다. 나중에는 한 번 그런 아름다운 리치를 여자들에게서 볼 수 없었다. 공을 놓치고, 뛰어가고, 놓치고, 뛰어가고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