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정신: 우리는 어디쯤에서 피로를 느끼고, 거짓 생기로나마 싸움을 싸우는가?
나는 내 친구에게 꾸란을, 코란을 설명하였다. KR 그리고 CR이 지금 제조국가의 이름에서 느끼는 매혹을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를 향해 가진 것으로서, 그것이 실제인지, 유명론인지 하는 것은 도리어 독자의 몫까지 생각의 여유를 빼앗는 것이 되어버렸다고 하였다. 처음에는 이슬람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종교적 권위를 갖는 경전을, 한국 사람에게 꾼 것이라고 한다면, 누가 그것을 경전이라고 여기겠는가 생각했을 것이다 했다. 그러나 그리스에는 플라톤이 있고, 이스라엘은 아직 수준 깊이 이해되지 않는 신구약이 있고, 인도까지 가는 그 먼 길동안 아무 것도 없는 시간이었다고 한다면, 처음에는 낙타에 올라, 물병을 수십 개 들고 진행하였을 것이지만, 중도에 진심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그 사실을, 그와 같은 가능성을 인정하였을 것이라고 하였다. 신기한 것은 내 친구가 그것의 형태를 읽어주었다는 것이다. 그것의 입장이나, 정치적 태도가 아니라, 형태와 형태가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것을 인정해주었다는 것이다. 나는 보태는 말로써, 우리가 사도 바울의 말에서, 욕정을 참을 수 없거든 결혼하라는 말을 알고 있다고 했다. 단 하나의 인과를 갖고 행동하는 것을, 그것을 사실 언급하는 것을 우리가 거절하지 않는데, 꾸고, 코란, 경전이고, 아무 것도 없고,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아브라함은 공통으로 존경하고, 하는 것들의 연결을, 거절했다가, 인정했다가, 완강히 거절했다가, 어느 정도는 인정했다가 하는 것을 과연 어느 누가 막아낼 수 있겠는가? 그와 같은 의도의 말들을 친구는, 형태를 잘 받아주었고, 귀를 열고 들어주었다. 틀렸다 말하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겠다는 것이고, 심지어는 죽은 자는 말이 없다 하는 것과 같은 이상한 연결까지도, 그러나 그런 말은 하지 않는다는 것은 진행하여 흐른다는 말일 것이다. 그것은 친구의 세포가 그것을 들었을 때, 가역반응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틀렸다고 가역반응을 일으키는 것이, 그와 같은 사람이 나쁜 것은 아닌 것이다. 대신에 가역반응을 일으키지 않았다는 것은, 정말이지 대단한 시공간인 것이다. 생각이 분명 남다른 것 같았고, 친구가 시간이 있으면 영화라도 함께 보고 싶었고, 내게 내 쓴 글이 있었으면, 함께 읽어 보고도 싶었다. 그런데 친구의 글을 어떻게 먼저 읽었는데, 친구의 글은 많이 인쇄가 되어 있었지만, 이번 읽은 것은 짧은 글 두 개였고, 그 글들이 그렇게 기독교적이고, 최초 기독교 국가적인 느낌마저 드는 것이었다. 영어로도 그렇게, 숨가쁜 템포의 창조와 종말을 언급하면, 그런 느낌이 들지 않을까 싶었다. 나는 그것을 그냥 한국 신학이라고, 한국 조직 신학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나는 흥분하고, 반기고, 기쁨은 생각이 보태질 때 더해진다는 나만의 말이 있듯이, 정말이지 대단한 것인 것이다. 나도 비슷한 말을 하고, 칭찬하였었다. 만일 내게 일주일의 시간을 주고 비슷한 글을 써보라고 한다면, 쓸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가정이 너무 느슨하거나, 무의미한 조건 같은 것이라고 했다. 하루에 써보라고 하면, 쓰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즉시 써보라고 하면, 읽는 이유를, 사람이 무언가를 존경하여 읽는 이유를 모르는 짓일 것이다. 즉시 쓰기는 정말이지 사람이 죽는 것처럼 어려운 일일 것이라고 했다. 삼일을 준다고 하면 비슷하게 쓸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예수님의 삼일도 순간 연상이 되었다. 무엇을, 비슷하게? 아니면 똑같게? 의미를? 문체를? 글의 내용을? 나도 말하면서 무엇을 비슷하게 쓴다는 말을 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만큼 나는 기뻤다. 한국 신학이라고 말하는 것은, 창조와 종말과 같은 육중한 조직신학적 고백을 두고, 그가 아니면 쓰지 못할 속도와 템포, 말의 자유와 연상, 편안함과 객관성, 그것의 기독교적 한없는 객관성으로 나아갔다는 것 때문인 것이다. 한국 신학이라고 말하는 것은, 먼저 만난 다른 사람에게 그 친구를 설명하기를, 꽃 밭에 앉아서 꽃잎을 보니, 그러면 좋겠지만, 풀 밭에 앉아서 풀잎을 보니, 그렇게 싱그럽고, 살아있고, 다른 사람들은 다만 글과 같은 오브제임에 반해, 놀랍고, 이게 다 녹색의 풀이다 싶다고 했었다. 그렇게 사람은 그에게서 돈을 빌릴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의 현재성에서 사는 것이 좋은 것이다. 신학적 테마 공원은, 반젤리스의 띰즈라는 앨범처럼, 한정되어 있고, 영원한 사랑의 대상들인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아무렇게나 쓰지 못하고, 그와 같은 한국적인 얼기설기조차, 기정떡, 혹은 백설기 같은 것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이다. 누구는 글이 별로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기독교는, 어느 정도는 이해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가 가전 제품을 하나 사더라도, 수많은 포함되어 있는 것들을 만날 수 있듯이. 우리가 과천 현대 미술관에서 좋은 전시가 있다고 하면, 거기까지 가는 길이 너무 어색하거나, 하나도 모르거나, 단지 친구가 없다는 이유로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는 것에서는 벗어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쫓아내는 사람도 없고, 반드시 전시 한 번 보는데, 그 자리에서 유명한 미술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제법 수준 있는 서울 사람들에게는 경탄을 자아낼 수 있는 의미의 속도였던 것이다. 그것이 읽은 다음에, 나의 이 글을 읽지 않아도, 잔잔한 음악을 외려 크게 틀어놓으면, 더욱 향기가 배가가 되고 그렇다.
그렇게 오늘 과천 어느 한국 판화가의 전시가 좋았다. 그렇게 좋았다. 그보다 좋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말한다. 그렇게 사라진 밤. 친구의 논문 두 편. 그리고 이미 결혼은 불가능한 어느 한국 화가의 그림들. 이 세 개면 충분히, 강력한 독립영화상 후보가 아니냐고 말이다. 독립하면, 오늘 어떤 사람의 말처럼, 영화시상식도 없고, 극장도 없고, 사람들도 없고, 포토라인도 없고, 스포츠신문사도 없고, 사람들도 없고, 그렇게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영화상을 우리가 제작하고, 만들고, 등산하면서, 적어도 한 사람 이상에게 그것을 말하는 이유는, 분명 존재의 어딘가에 있기 때문인 것이다......
친구는 처음 짧은
너무 싫은 네가 나를 꽃이라 불러 줄 때
처음 꽃이 되었다 하는 배반형보다
얼마나 싫은지.....
나아가는, 풀잎 같은 산문을 서울 수유리 언덕 어딘가에
써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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