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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성경의 위대함

by 마음대로다 2018. 2. 28.

성경의 위대함





함이라는 한자는 배를 가리킨다. 셈 함 야벳에서부터 사람들은 고개를 기우뚱할 수가 있을 수 있다. 그것은 모르는 일이다. 어떻게 성경은 그러는가? 어떻게. 어떻게 성경은 그렇게 보편적이더니, 그렇게 한국 지명적이고, 한국어적이고, 그렇게 아무렇게나 외국인 이름들을 남발할 수 있는 것일까? 정명훈도 그렇다. 그렇게 이름이 좋다. 그러나 조말생도 그렇고, 유덕도 그렇고, 타임트래블러도 그렇다. 좋은 이름은 사람을 좋게 만든다. 그와 같은 시간이 있다. 좋은 이름은 그러나, 나의 모든 것을 책임질 수 없다. 거의 모든 함을 모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의 숫자를 믿지 못한다. 아테네와 트로이의 전쟁에서, 지중해에 올랐던 배의 숫자가 만 척이라든지, 십만 척이라든지, 그것을 읽고는 나는 기겁을 했다. 어떻게 문장은 작아도 탄탄하고, 사람들에게 그럴 듯한 인과를 강요하더니, 군사들의 숫자나, 배의 숫자 같은 것은 이렇게 아무렇게나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일까? 했는 것이다. 그것은 무의미했다. 마치 인간의 삶이 주관적으로, 혹은 객관적으로, 무의미하듯이. 임진왜란도 그렇다. 우리에게 열두 척의 배가 있다는 것은, 어떤 속성, 용맹함, 아름다함, 사다함, 훌륭함, 빼어남, 발랄함, 지적함, 이성함, 그런 것들의 열두 척을 가리킨 것일 수 있다. 배는, 바다에 떠다니는 기뢰만 만들 줄 알면, 배가, 선상 전투는 불가능해지는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은가? 찐빵? 어떻게 둥둥 떠서는, 접근하는 배가 부딪히는 경우, 터지는 것 하나 만들지 못했던 것일까? 나무가, 조금만 터져도, 가라앉지 않겠는가? 결국에는 훌륭함 하나, 그것은 용을 닮았고, 거북선을 닮았다, 있지 않아서, 십만 척의 배가 서로 부딪히는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영원한 훌륭함인 것이다. 용맹함도 빼놓을 수 없다. 그렇다면 배 중에 배, 위대함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개츠비? 알렉산더 더 그레이트? 세종 더 그레이트? 우리는 군대에서, 황금마차가 온 경우, 과자를 사서 먹기도 했다. 그 중에 그레이스가 그렇게 맛이 있었다. 그레이스 켈리. 그렇지 않은가? 우리 시대 귀족들은 연상과 친척, 그런 것들이 매우 제한적이었다. 잉그리뜨 버그만. 스즈키 버그만을 볼 때, 잉그리뜨 버그만을 연상하여 불편해 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그만큼 우리네 배우들도 예쁘고, 다정하고, 사랑스러웠었다......


성경은 갈수록 그 이름들이 고통스러워진다. 대체 어디까지가 한국어이고, 한국어의 결합이며, 마치 외래어처럼, 한국화가 된 외국어인지 모르겠는 것이다. 거의 모든 성경의 문장은 훌륭함이고, 위대함이다. 그것의 판단과, 인내, 사랑과, 잘 모르겠는 뉘앙스까지. 그런데 이름에 이르러서는 우습고, 니고데모, 얀네와 얌브레, 구리 공예가 아무개처럼, 정말 어색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성경의 이름들이 우습게 보이지 않으려면, 우리나라가 아직까지도, 무의식의 전쟁 후기의, 그런 어떤 연장으로만 살아야 했으리라. 우리가 우리의 삼합회 같은 이름들을 잘 닦고, 드러내고, 그것들의 속성을 잘 연결하게 되면, 급격하게, 성경의 이름들은, 지명까지도 오리무중이 되는 것이다. 그것을 가리켜, 오리온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오리온. 오리온. 우리가, 호수 가운데로 가고 싶을 때, 사망권세에는 빠지기 싫을 때, 책을 잘 읽으면 소생하는 삶이 되겠으나, 늘 빚진 자가 되면, 마침내, 그 빚의 한 가운데에 이르고 싶은 것이다. 오리는 그렇지 않다. 오리는 다만, 온더 워터, 그렇지 않고, 오리 날다, 다름 아닌 오리를 날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서양의 노력과, 독립과, 철학과, 사상이 다시금 훌륭하면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파혼도 하지만, 파혼했던 사람과도 결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레이스 켈리 목사나, 알랭드 보통처럼, 영원히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처음이 독립되어 있지 않고, 더구나 그것이 습관적이게 되면, 그 자체로 뭍 사람들에게는 성경의 위대함의 화석이나 되고 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