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자광은 누구인가?
항간에 고양이 액체설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유자광이 살아있다면, 고양이가 누구를 가리키며, 액체설이라는 말은 그 누구의 그 어떠한 부적절한 신체구조임을 사람들에게 알려주었을 것이다. 이 얼마나 슬픈가? 우리가 그 중학교, 매점의 야채빵을 먹기 위해, 돈을 들고 달려갔는데, 돈도 없을 때였지만, 야채빵이 없다고 한다면, 얼마나 슬픈가? 왜냐하면, 우리는 야채빵보다, 그와 같은 욕망보다 분명 관념의 관직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렸을 때의 빛이 사라지고 나면, 우리는 분명 관념의 관직이라는 것을 믿고, 욕망을 아낌 없이 탐하고, 탐닉하고, 그것의 오직 유비로써만 즐기던 것을, 그러니까 관념의 구체적인 개념과 깊은 의미를 추구하지 않고, 유비된 욕망의 공식을 관념의 전조라고 여겨서, 도리어 어렸을 때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 평생의 환희를 만끽할 수 있었던 것을.....
고양이는 액체인 것이다......
그렇게 이름이 조형적이고, 도리어 한글 같고, 우리 식으로 말하면 화투패의 이끗자리 광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유자무하고, 노자광했다 하면, 도리어 사람의 인생이 고르고 아름답다 했을 것이다. 유자광하니, 처음이 화려하고, 멋지고, 지혜가 높고, 왕과의 교유도 있었으나, 갈수록 덜해지고, 관계의 능력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었겠는가? 남이 장군의 시와, 남이 장군의 언급을 두고, 역모로써 고변한 것을 보면, 그와 같은 위기의식의 반영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것이 그렇게 깊이가 있는 것이다. 천둥벌거숭이 같은 것이, 공을 갖고 있고, 직책과 남다른 명성을 갖고 있는 것이면, 국가의 본질에 이르러서는 다만 몹쓸 원인이나 현상의 반복에 불과한 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런 깊이 있는 해석 없이, 허구한 날 음악만 듣고 있다 보면, 다만 겉모습은 병처럼 단단해지나, 아무런 생각 없는, 위에서 내리는 말이나 그대로 발설하는 사람이 되지 않는가? 남이 장군의 입장과, 그의 유자광보다 더한 이름을 보자면, 도리어 그 남자다운 포부가 그와 같은 본질을 덮는 것일 수 있는 것이다. 유자광은 원래는 같은 서커스 계열의 사람과 교유하고, 세력을 돈독히 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자기의 후원인이었던 세조가 죽자, 도리어 굉장히 본질 중에 본질, 함경도 활전복에 관한 사례처럼, 범우주적인 본질 직관을 갖고, 매우 정치적인 도전을 행한 것이다. 남이가 가끔 혜성을 언급하는, 가끔 튀는 말을 하는 사람이었을 수 있다. 그러나 문학이 몹쓸 것인 것은, 남자의 호방한 시를 갖고 반환점 삼아 돌아오는 지극히 평범한 순환 구조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것을 그러니까 유자광이, 스스로, 생의 자기 좁은 방구석에서, 알았느냐는 것이다. 나는 어렸을 때 남이의 시를 두고, 배우고, 익히고, 시험에 출제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으며, 존경했고, 단순하고, 딱딱하였으나, 말을 탄 것 같았고, 그래서 좋아하기도 했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에 이르러서는, 역사 저널 그날의 내용을 보자니까, 그렇게만은 보이지 않는 것인 것이다. 사람은 문학으로 산다. 문학은 대게 유자광이다. 문학이란 어렸을 때, 그러니까 보편적인 관념을, 욕망의 힘으로써 착각할 때 처음 만나는 형상과, 자연과, 인물들인 것이다. 한 번 거짓에 물들고, 한 번 거기에 빠지면,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유자광을 첩자로 의심할 수 있다면, 남이의 시와 역모의 빌미가 되었던 언급은, 좀더 문학의 거짓된 본질로서의 첩자와 간신에 가까운, 그와 같은 수학적 구조를 갖고 있는 셈인 것이다. 우리는 문학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른다. 조선이 있었는지, 왕들이 실제로 있었는지, 왕과 왕비의 섹스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그들의 교육이 훌륭하였는지, 대충 미사려구로 실록이 그것을 잘 조성했던 것인지 모르는 것이다. 남이가 빛깔도 불분명한 고대의 벽화 같은 느낌을 준다면, 그것도 철저하게 유아적인, 자세히 보면 고대의 미술들이 하나 같이 빼어나고 아름다운데, 그 중간의 것을 우리가 만난 적이 없지 않은가? 딱 거기에 맞는 사람이었다면, 유자광이 그것을 문학평론함으로써, 그 관계적 실재를 후대의 사람들에게 전한 것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즉자적 존재를 실재로 여기지 않고, 관계적 내용들을 실재로 여기지 않는가? 우리는 대게 남이 하는 것을 두고, 그만큼만 노력하는 기질이 있다. 그래서 남이 장군을 하면, 우리는 적어도 부하 정도는 되려 하는 것이다. 그것을 언제쯤 그만 두는지, 아니면 그 노년의 빛 아래서, 언제까지고 그만 두지 않는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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