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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민중문화이야기

프로메테우스(2012): 자기 이상향의 한계와 주체의 경제적 조건에 관한 연구

by 마음대로다 2012. 6. 7.

프로메테우스(2012): 자기 이상향의 한계와 주체의 경제적 조건에 관한 연구

 

 

 

 

 

 

 

 

엔니오모리꼬네. 뭘 입거나 쓰거나 해도. 엔니오 모리꼬네. 음악은 우리를 접합시킨다. 가뇽이던지, 모리꼬네던지, 그것만 들을 때는 쉬 지치게 되어 있다. 그러나 딩동딩동 자초지종을 알고 나면, 집에서 사람이 나와도 계속 초인종을 누르고 싶은 성격배우적인 의지가 생기게 된다.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의지. 볼렌. 그의 사막은 다시 질주를 하고, 마치 본연의 논문적인 탐구와 연구 혹은 트리티지에 잠기게 된다. 싸운다는 것은 안다는 것이다. 알기 때문에, 싸우고, 죽는 사람을 앞에 두고 자기는 죽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모르는 것들이 포장마차 가득 차 있으면, 총을 빨리 뺄 수 있으나 정확하지 못한 사람, 조금 늦게 빼나 아주 정확하게 맞힐 수 있는 사람이 듀얼을 멈추고, 함께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의 소재. 커피를 아메리칸처럼 타 먹으면서, 묻고 답하는 큐티. 인디안들과도 화해를 하게 된다. 지도를 펼쳐 들고, 이게 이것인지, 그것은 맞는데, 그것은 아니라던지. 철학은 앎에의 의지이다. 유명한 철학자나, 조금 덜 유명한 철학자나 중지를 모으는 것이다. 앎이 다섯을 나아가고, 피로와 낙담이 넷으로 빠지고, 이런저런 삶의 색감이 다섯으로 나아가고, 어제와 비슷하거나, 같은 말이지만 다를 바가 없다 하는 것으로 넷이 빠지면, 우리는 하던 일을 그만두고서도 공부와 토론에 매진할 수 있다. 일과 공부의 갈림길은, 거기서 작동할 것이다. 공부는 쳇바퀴가 아닌 것처럼 하는 것이고, 일은 공부에 너무 회의를 채우는 것에서부터 정체성을 획득한다. 대학을 졸업할 때, 서로의 마스크가 그러하다. 여자들은 죽을려고 한다. 공부에 대한 회의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일자리를 남이 갖는 것처럼 갖고, 자기가 공부를 하거나, 공부를 맵시 있게 잘하는 사람을 사귀려는 작전과 계획이 그들보다 날카로운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그것도 스스로의 힘으로는 달성되지 않는 마음의 구획이다. 더구나 일도 어렵다....... 어떤 여학생에게 내 하나 뿐인 인생처럼 전화를 한 적이 있다. 했더니 대답이, 하루종일 시험보고 일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주자학의 이기하와 같은 등급이다. 경험의 실제가 있는데, 전체적인 모습은 잡히지가 않는....... 아주 예전에 내가 같은 말을 했었고, 그때 나는 은행을 찾아온 사람이 여직원이 데스크에서 시험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을 오랜 시간 지켜 보는 모습으로 상상했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들이 이와 같은 세계관의 도사가 되고 나자, 드디어 이런 식의 스케치가 가능해진 것이다. 직장도 없이 공부만 할 것 같은 느낌? 도시의 한 귀퉁이에서 인문학의 달팽이 화신 같은 나를 만나 후원도 하고 싶은데, 일도 어렵더라는.......

 

인류의 정신사는 유럽이 과연 훌륭한 자의식을 갖게 되느냐 하는 것에 집중되었었다. 그러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것의 피눈물은 그 무엇으로도 그릴 수가 없다. 폴리탄들은 거기서 모두 방전되었고, 한국에서는 꼼짝도 못한다. 미국 영화는 한국 기독교의 양명학적 조건 아래서 하나의 거대한 기회였다. 그러나..... 수많은 함정과 함정들..... 프리킷..... 이율곡함. 그러나 그렇게만 말할 수 없는 것이, 얼마나 개인적인 에이전트들이 많았느냐는 것이다. 그들이 타는 자동차는 자동차가 아니었나? 국가에서 놀고 먹고 하고 있으면 단번에 압수를 하는 철저한 계획 경제도 아니었었다. 미국 영화가 사람들의 마음을 꼬집으면, 케이지비는 긴장하였고, 브레즈네프는 모피 코트를 찾았고, 마오쩌뚱은 거의 모든 범주 안에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한국에서 가장 똑똑한 젊은이들이, 전광용이 남궁박사에서처럼 미국과 유럽으로다 유학을 갔다. 그것은 얼마나 유혹인가? 영화에 슬픔의 스퀘어로다 가슴 박혀 있다. 아리안 민족의 우수성을 주장하던 히틀러. 그와 같은 전체주의에 대한 맹렬한 비판론자들의 문건들이 반대급부의 거대한 탑을 이룰 때, 우리는 체리엇 오브 파이어를 보았다. 그는 프로메테우스 영화에서 지적한 것처럼, 차라리 로봇이다. 음악은 어마어마한 반젤리스이다. 여기서 반젤리스는 사람의 이름 보다는 그와 같은, 그러니까 반젤리스 라이크, 판타스틱, 더블 판타스틱이라는 뜻. 올림픽 초창기. 육상 선수들이었던 그들 중에 한 명은 주일 성수를 위해서, 목숨보다 소중한 경기를 포기하고, 설교단에서 신앙 간증을 하기도 한다. 그와 같은 세계관은, 폭포는, 한국 기독 청년 고등학생이 아니면 누구도 모르는 것이다. 있음과 없음의 무한한 바닷가....... 공부를 잠시 미룬 곳에서의 찬송 소리. 찬송 없는 곳에서도 계속해서 이어지는 찬송 소리. 그것의 차가운 옷은 정확하게, 한국 기독교, 그것들로 하면 유일하게 소년들이 입고 있었다. 그것의 햇빛은 주자어류에서 반복적으로 말하는 것처럼, 기울어져 있고, 마음은 한없이 불가시적 세계에 대한 감각적 총화로다 나아갔다. 그래서 뭐 어쩌자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래서 뭐 어쩌자는 것이 아니다. 그냥, 그저 그렇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그렇다는 것이다. 우리 한국 소년들은, 그 시절에 이미 독일 신학자였고, 철학자였으며, 영문학자였었다. 그와 같은 망 위에서, 그와 같은 가치 위에서, 누구는 과감하게 정신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우리는, 히틀러가 외쳤던 아리안 민족의 우수성인가? 이었던 것인가? 나의 글이 한국어로 빠르듯이, 셰익스피어는 영어로 빠르다. 그와 같은 속도와, 연구와, 영국과 스코틀랜드에 산재해 있는 군소 캐쓸들처럼, 세트와 배경이 되는 곳이 다른 곳에 있지 않다. 내가 셰익스피어를 공부하기 위해서, 거기에 갈 필요가 없다 말하는 것처럼, 인류 정신사의 보이지 않는 스펙들에 위배되는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영화는 고통을 산출한다. 극단적으로는, 혹시 우리나라 영화가 아니냐고 밀쳐지기도 한다.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죽이는...... 고통은 무엇인가? 어디가 아픈 것인가? 그것의 웃음의 페이소스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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