캣런(2012)과 急凍寄俠(1989)에 관한 재미있는 여러 생각들
암네세스라는 말이 있다. 찾아보니, 암네지아amnesia이다. 그것을 말하고 싶었다. 그런 욕구. 그것에 가장 근접한 성리학적 유사성이 아마도, 주인공의 무술 실력이나, 그것이 유행이 아닌 지금에서는 총을 잘쏘는 사람일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보는지 모르겠고, 영원한 미스테리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리 영화나 작품에서일지라도, 휴메니타스를 배반한다. 엄정화가 배반의 장미라고 불렀지 않은가? 그녀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용기도 없고, 여건도 되지 않아서, 몰라 알 수가 없어 배반의 장미를 불러댔던 것이다. 그러나, 글을 쓰면서 발견하게 되는데, 그렇다고 보면, 암네지아에 보다 빠지지 않겠는가? 알고 있었지만, 말할 용기가 없었다면, 사람의 본질과 실존의 차이를 놓고 볼 때, 비철학적인 본질주의가 첨단적인 실존주의보다 나을 확률이 별로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이 아니고, 원죄면 원죄겠으나, 원죄도 아니다. 사람들이 기물을 파손하고, 상해를 입히고, 상거래에 있어서 거짓말을 하는 것을 민형사상 잘못이라고 한다. 죄를 짓는 것이라고 한다. 문학은 그렇다면, 그 무한한 잘못인지, 아닌지 모르는 양적인 너울거림 어디 쯤에 있는 것일까? 문학은 남자들이 바로 할 수도 있고, 나중에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중에 하게 된다. 철학을 한 다음에. 문학을 바로 하는 남자는, 그러니까 우리들이 말하는 휴메니타스가 아니다. 다만 인디비듀얼러티일 뿐이다. 철학이 남성적인 불가시적인 대상 같다. 여자가 철학을 지망한다는 것은 그래서, 대.단.한. 것이다. 철학과가 존재하고, 얼마나 존재의 정확한 주소인가? 구룡섬, 구룡반도, 홍콩, 북경까지는 걸어서 일년이 걸리는 자리, 존재하는 철학과에 지망하는 여학생이 있는 것이다. 남자들이 철학과를 정말, 순전히, 어쩐가 보게, 검정색 단단한 조금 무거운 정육면체를 갖고 입학하는 것이라면, 여학생은 흰 머리. 그러나 흰 머리가 아니라, 어떤 섬세하고, 미세하며, 보이지 않는 나노 입자의 결정 같은, 우리 지금의 정신현상학적인 티비와 영화 인터넷에서의 가장 휴메니타스의 정수 같은 영화들을 보다가, 지망을 하게 되는, 다소 힘빠지고, 주체의 뇌막에 너무 많은 에너지가 집중되어서, 너무 많이 색의 교차적인 진행에 의지하고, 천주교 수녀 이외에는 그것의 차분함과 인내의 어떠한 동일시도 찾아볼 길이 없는, 영어도 못하고, 한자도 못하고, 한국어는 조금 하지만, 생각을 담기에는 서툴고, 교수님이 동양철학 입문을 가르치고, 칸트와 헤겔의 독일철학 입문을 가르치는 순간에는 의식이 환해지는, 영원히 일어설 수 없는 운명일지라도, 내가. 가녀린 여자지만. 내가. 보다 극적으로 말하면, 명문대의 철학과에 지망한다는 결심같은 시간성이 분명 있는 것이다.
우리를 신비한 물의 상태라고 가정한다면, 일을 구하는 것이 가장 구체적인 것일까? 헤겔이 말한 것처럼, 절대정신의 구체성. 아니면 철학과에 지망하는 소녀의 찰나적인 승가에 귀의하는 여래장이 구체적인 것일까? 우리가 어려서 영화를 보는 것과, 나이가 들어서 보는 것이 차이가 있는가? 캣런이라는 웰메이드 호러 무비가 그러하고, 급동기협이라는 오래전 영화가 대놓고 그러하다. 동작 하나하나가, 한자 하나하나라고 가정한다면, 어린아이들이, 청소년들이, 그것의 단자적인 집중에 있고, 조금 경험이 많은, 특히 성경험 같은, 어른들이 일반 원리를 많이 아는 것처럼, 그것의 총괄을 안다라고 누가 그러겠는가? 우리의 소년소녀들은 대단한 구석이 있다. 어른들과 차이를 갖는 것이, 그들의 생각과 걸음걸이가 너무 표시난다는 것이다. 어른들은 어딘지 모르게, 묵혔다가 처리하는 기법에 능숙해진다. 높이는 없지만, 깊은 구석이 있는 것 같은. 그래서 그것이 높이인 것처럼 사람들에게 떠받들어지기를 요행수하는. 그러나 소년소녀들은, 떠드는 얘들은 즉결로써 떠들고, 까부는 얘들은 만나는 자리에서 까불고, 묵혔다가 처리하면서까지도 까분다. 우리는 어쩌면 단 하나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어른이 되어서는, 어딘가에서 고문을 받고 온 사람처럼, 그 명랑한 분명 인간의 한 속성으로서의 휴메니타스를 버리게 된다. 편지에도 그렇고, 말투에도 그렇고, 사람들끼리 만나서도 그렇다. 그것은 논문에 바로 투사된다. 젊어서는 논문이 미숙하다. 그것은 유명한 평론가들의 젊은 시절의 논문을 읽어봐도 그러하다. 그러나 늙어서는 기약을 할 수 없다. 모든 음각적인 계단의 정수에, 그들이 어떻게 교수가 되었는지 모르는 이들의 정신세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매우 흥미진진해진다. 그리고 케이팝이, 달샤벳의 이번 앨범을 우연히 듣고 마음이 꽉찼는데, 얼마나 고속의 진행인지 깨닫게 된다. 스즈키 알천을 타고, 그것을 배경음악으로 삼아, 아주 단순한 필름일지라도 인터넷에 올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가장 구체적인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자기의 흙 이전에 철학을 지망함에 있다. 그리고 구체적인 것들은, 일종의 무릎을 내주고, 자기는 다른 이의 무릎에 기대어 눕는 재미는 원환의 놀이와 같다. 그것이 철학사인지도 모른다. 철학은 불가시적 세계에서는 대통령제와 의원내각제의 통합상태이다. 왕권이라고 말하기가 그런 것이, 플라톤이, 왕이, 철학자 왕이라고 하는 애매한 궁녀 권력을 과시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장자의 햇빛이고, 숲이며, 정원이고, 책을 읽던지, 무엇을 상상하던 그 이상을 하던지, 전혀 간섭이 없는 곳이다. 구체적인 것은 무엇인가? 갈수록 머리가 커져 가는 듯한 영화인가? 아니면, 흰 빛과 검은 기억들이 읽혀지고, 어순을 몰라서, 그것으로써 다시 읽고, 소년과 소녀가 아무런 흙도 없이, 순전히 자기만의 깨끗한 흙을 갖고, 대학에 지망하던 순간을 기억하는 것이 구체적인 것인가? 관료가 되어서, 사람들과 돼지고기 먹기 좋아한다는 것은 아무리 봐도 철학과는 거리가 멀다. 그리고 그것에는 계단이 없는 것 같다. 중국식 정원에 계단이 보이는 것은, 내부의 부정적 계기일 뿐이다. 그들은 늘 괴석들을 치장하기 좋아하고, 문은 담에다 동그랗게 뚫어놓고, 사람 중에 사람, 인격 중에 인격이랄 수 있는 탑의 형상을 잘 놓지 않는다. 일본도 그렇고, 중국도 그렇다. 일본은 집이 거대하고, 한자로 보면 먹을 것을 밝히거나, 잘못했다고 참회를 하는, 다시 젊은 사람들이 일본 민족은 먹을 식 먹을 것을 밝히는 사람이었다가, 급동기협, 겨울이 닥치면 잘못했다고 참회하는 쳇바퀴를 용인한다. 왜냐하면, 별다른 인민의 문화가 없기 때문이다. 중국은 비행기와 의자의 다리가 아니면 다 먹는다고 한다. 그들은 참회를 안할 수도 있다. 캣런은 구체적이다. 그것의 흔적은 매우 깊다. 그리고 생각이 나에 버금갈 정도로, 어쩌면 내가 범주적으로 모르는 것들까지 하면, 더 많을 수도 있다. 그러면 최고 범주를, 단 한 시간의 군부대 외박 시간에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범주의 원죄는, 우는, 잘못 우, 늘 그렇다가 차선의 높이에 머리를 두고, 지옥을 가고자 한다는 것에 있다. 이것도 한국 영화가 되는 것은, 그래서 우리나 이름을 알고 있는 지하여장군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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