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조: 주자가 없는 우리나라에 관한 상상
조광조는 마운드의 그림자와 같다. 무슨 마운드냐면, 그는 완투한다. 투수가 없는 야구 경기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중간 계투, 그리고 마무리 투수라는 개념을 알고 있다. 말 그대로이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다. 조광조는 공을 많이 던질 수 있다. 소위 백 개 넘어가면 사람들이 숨이 넘어간다는 것을 알고 있으나, 그는 이백 개까지 던지는 것 같으다. 바로 그러한 투수기 때문에, 지금 조광조 아래서 던지는 투수가, 우리가 경기장에 있다고 한다면, 잘 분간이 되지 않는 것이다. 분간하고 싶은 마음. 욕심. 그것은 조선시대의 참 텔레비젼이 아니었을까? 조광조의 공 중에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중종의 죽음이다. 그와 같은 공은, 타자의 배트를 산산이 부서뜨린다. 그런 모습을 우리가 모르는 바 아니지만, 정타이고, 뱉 중심에 정확히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공이 마운드 쪽으로 조금도 나아가지 못하는 마구(MAGU)인 것이다. 슬픔이 북받쳐 오르는 것 같다. 우리는 생각을 조금도 마운드 쪽으로 진행시키지 못하고, 다만 배트가 산산이 부서지는 것으로나, 시선을 외면하고, 그 조각에나 촛점을 맞추는 것이다. 조광조를 생각하면, 우습고, 그의 죽음을 생각하면, 그렇게 슬프고 그러하다. 그의 모습을 보면, 거짓 같고, 앞으로 불러도 조광조, 거꾸로 불러도 조광조인 것만 같다. 나는 한 번 조광조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으나, 유비 관우 장비 조자룡, 그런 이름들에 대해 관심이 없었으나, 프로그램을 보다 보니, 지진도 일어나고, 소격서 혁파와 같은, 마른 하늘에 날벼락과 같은 신비로운 중국 무술을 보다보니까, 전체 중종이니 인조실록이니 하는 것을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었다. 조광조를 생각하면, 그렇게 우습고, 그 모습이 모든 것의 전체, 혹은 전제인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조광조는 우리나라 청년들과 함께 했다. 대한제국 이후, 이런저런 공화국 아래서, 청년들은 청년들의 맥도날드 시그니쳐 벌거를 진행시켜 왔는데, 마치 죽은 조자룡이 되살아난 것처럼, 그들의 관심과 연장 선상에는 몇 백년 전에 죽은 것 같은 조광조가 있었는 것이다. 조광조가 그렇게 말을 잘하고, 언문일치, 그러니까 말의 문체와 글의 문체가 당대의 관료와 내로라하는 선비들보다 나았다는 것이 이해가 되고, 때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리는 조광조가 대전도 아니고, 부산, 창녕도 아니고, 광주에서 올라온, 나이를 알 수 없는 기독교 전도자라고 알고 있다. 사람들은 경기도 광주가 아니냐고 할 것이다. 그것을 처음, 내비게이션도 없이, 고속도로에 올라, 광주 방향, 그래서 경기도 광주로 빠져 본 적이 없는 사람은 말을 말아야 할 것이다. 나는 정말, 너에게 나를 보낸다 하는 것처럼, 그와 같은 마구감에 흥겹게 휩싸여 있었다. 나의 처녀 유턴은 그곳에서였다. 사람이 말을 잘하는 것은, 공부를 많이 해서이지만, 무엇보다도 무슨 공부를 많이 하느냐가, 어떤 말을 잘하느냐 하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대충 훌륭한 신하와 학자들은 대게 맹자에 관한 대가들이다. 그러나 하루의 어떤 모시, 그러니까 특정한 시간과 기간이 되면, 시력이 돌아와서, 마을을 음으로 양으로 싸돌아다닌다고 하면, 그는 조광조, 다만 맹자가 아닐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우리가 왕조실록을 읽고 접하다 보면, 가장 문제시되는 것이, 과연 실록의 글들이 믿을 만 한 것이냐는 것이다. 실록의 글들이 믿을 만 한 것이라면, 결국에는 글의 왕권은 누구에게 있느냐 할 것이다. 얼마나 왕들은 추한가? 생리적으로도 추하고, 생각적으로도 추할 수 있고, 다만 아녀자에게도 말을 듣는 때가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사관들이 지나만 가도, 벌벌 떨고, 경기를 일으켰을 것이다. 그리고 좋은 글들을 적고, 예를 들어, 모월 모시, 임금님 어느 궁전에 들다. 사람들을 맞이하다. 청을 구분하여, 어느 것은 받아들이고, 어느 것은 물리치다. 그런 내용만 적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해도,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겠지만, 점차로 믿지 않았을 것이다. 중종이 조광조를 만나 기뻐했던 것도, 그와 같은 성리학적 관심의 폭력에 같은 고통의 형제처럼 느껴졌었기 때문일 것이다.
관심의 폭력적 대상이 되면, 가장 어처구니 없는 현상이 하나 발생하는데, 그런 일이 없는 것처럼 지나가는, 이차대전, 혹은 육이오, 사람들도 많겠지만, 그것은 일부로 만행을 저지르는 것이고, 심지어는 사탄까지도 숭배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중종이 조광조를 만나 좋아했던 것은, 조광조가 맹자를 넘어, 한국 기독교인이어서, 자기는 그런 악마적이고 부정적인 진행을 한 번 한 적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 증명되는 것 같아, 그 성급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던 것일 것이다. 어쩌면, 한양 전체가, 조광조를 만나 기뻐했을 수도 있다. 조광조는 다만, 유명일 뿐이요, 빛이고, 그림자이나, 그림자라는 것도 생체적인 내용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수묵의 그림자요, 향기나는 매화꽃 본체로만 있는 것인 것이다. 중종에게 한 번 트라우마가 있을 수가 있다. 우리가 숫자를 병렬이나 직렬, 뜻을 구분하지 못하겠는데, 그렇게만 보는 것이 아니라, 관심과 처벌로만 일년 삼백 육십 오일 알게 되는 때도 있듯이, 그렇게 사화가 일어나면, 앞으로의 조선의 역사는 정말이지 사화의 연속만 같을 것인 것이다. 우리가 중종의 죽음을 맞이하고, 수백 년 후에, 서울에서, 이차돈의 꽃비가 만발한 것을 보면, 그의 고통과 심리적인 예언이 결코 무의미하거나, 한없이 불쌍한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 같다. 그리고 이전에도 그랬겠지만, 자주 언문일치가 고전적으로 아주 훌륭한 이십대의 청년들이 왕위에 올랐던 것으로 우리는 충분히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주자가 없는 조선, 그러니까 우리나라는 생각할 수가 없고, 겹치고, 흉내내고, 직언이 있다 하나, 존재의 허용은 분명 바다와 같은 조건일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중종이 있고, 조광조가 없을 수 있다. 그런 것이 누군가에게는 자연스럽다는 것이 항상 희한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