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적 지능과 화려한 인문비평적 순발력 지능은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가?
그것은 같을 수가 없다. 스포츠적 지능은 조금은 노동교화적인 성격이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채찍질과, 구타와, 훈계와, 위협에서 처음에는 작동하고, 그것이 겨우 가변만을 취하여 끝까지 연속하기 때문이다. 화려한 인문비평적 순발력의 지능은 간편하게 나를 가리키는 것이지만, 거기에는 아무런 협박이 없다. 어쩌면 무협이라는 이름이 마지막 시간에 이르러 바로 이와 같은 것을 가리킨 것이었을 것이다. 문법에 협박을 많이 받으면, 겨우 읽기만 할 수 있고, 너무나 안정적이고, 너무나 모범적인 편지를 친한 친구나, 여자 친구나, 방송국에 보낼 수 있을 뿐이다. 그때에도 문법은 귀찮고, 무섭고, 겨우 작은 에너지에 단어가 소환되고 결합되는데, 그와 같은 방해 때문에 생산에도 부족한 에너지가 발생하고 연장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우리가 수학 선생님 뿐 아니라, 영어 선생님, 국어 선생님까지 다 재수없게 여기는 것은 이유가 있는 것이다. 국어 선생님들이 그나마 전통적인 애정의 대상들이었다. 남자들도 여자 국어 선생님들이 좋았고, 남자 국어 선생님들도 저 머나먼 우금치 전투에서 함께 싸웠던 사람인가 싶었었다. 그러나 실재는, 본질은, 혹은 존재는, 몇 가지 보잘 것 없는 시인이나 소설가, 그리고 몇 가지의 비평사나 공부하다가,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 자꾸 문송하다며 비굴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게'는 게바, 시몬 베드로의 다른 이름이기도 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앙드레 가뇽인 셈이다. 그들은 사실 차원을 이기고, 높이를 달성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이다. 전세계의 스포츠적인 지능은 다만 나의 무협적인 비평의 촉을 닳게 하는데 이바지하는 것으로 그날 하루의 미션을 설정하기도 한다. 물론 모든 스포츠는 하루이틀이면 질리고, 내가 보태고, 가져가고 해야만 원래 재밌는 것이기는 하나, 사람들이 모두 가난한 노예고, 전부 몬순 기간에서의 방글라데시 사람들이기도 해서, 스포츠적인 지능이 또한 자기들에게도 깡패의 얼굴일 때가 많아서, 마땅한 목적과 목표가 사라지면, 금세 정치적 안정주의로, 그것의 무의식적인 작동으로 인해서, 스포츠적인 지능까지 사라지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와 인민들의 지능을 닳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워낙에 두뇌가 복잡하고, 반도체 같고 그래서, 알고리즘이 하나 발생하면, 그대로 행동이 떨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베트남은 우리에게 졌어도, 그들 국민이 응원하고, 성원하고 그랬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삼사위전을 보자니까,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또 다시 가난한 그 옛날의 정치적 무의식이 작동하는 것 같았다.
스포츠와 인문학은 원래 만나는 것이 아니다. 스포츠가 혜성이면, 인문학이 지구이고, 스포츠가 지구이자 육체이면, 인문학은 혜성인 것이다. 그것이 만나면 지구에 종말이 닥친다고 했다. 거대 공룡이 멸망한 것도, 혜성 충돌설이 아주 유력하다. 갑자기 지구 전체에 먼지가 드리워지고, 기온이 급격하게 바뀌어서, 공룡들이 죽었다고 한다. 물론 빙하기가 닥친다면, 혜성이 없어도 죽을 목숨일 것이다. 털은 어떻게 보면, 눈과 얼음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온대와 열대에도 털이 있는 짐승이 있지만, 털이 있는 공룡은 우리가 본 적이 없지 않은가? 하긴, 우리들이 상상하는 공룡 뼈 복원의 원래 상태가 우리들이 곧잘 그리는 것에 합당한지는 모르는 일이라고 한다. 털이 있는, 그런 공룡일 것인데, 어떻게 보면, 우리가 공룡의 멸망을 어떻게든지 상상하려고 하는데, 도마뱀류와 파충류가 주로 열대성 기후에서 사는 것을 상상해서 그럴 것이다. 그들 모두에게 사냥과 스포츠는 있어 보여도, 인문학은 있는 것 같지 않다. 포유류 정도나 되어야, 죽은 동물이 있는 경우, 며칠이고 떠나지 않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그것도 어떻게 보면, 추위와 생각, 그런 것들의 독립 변수의 생물학적 진화의 결과일 것이다. 스포츠적 지능에 먹히고, 짓밟히고, 조롱당하는 인문학적, 그것도 다만 작은 시인에 매여 있는 것이 아니라, 널찍하고, 역사를 가로질러, 구조로, 그와 같은 고양이 프레이즈를 감당할 수 있는 비평까지 하려면, 반드시 인문학도는 스포츠를 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최근의 보고에 의하면, 원숭이들도 돌을 깨서 열매를 먹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생각과 지능이 낮은 좀비들에게, 창이나 도끼까지는 쥐어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활은 어렵지 않나 한다. 활은 만지기가 어렵고, 부품이 몇 개로, 인도네시아의 섬처럼 따로 떨어져 있고, 그것을 하나로 생각하려면, 다만 섬이 떨어져 있다고 해서 분열하고 서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같은 나라라고 한다면, 바로 그와 같은 관념이 강력하게 필요한 것이다. 활은 그러나, 좀비들을 가두고, 그들을 조종하는 상층 군인들의 도구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늘 그렇게 아무런 생각 없이 좀비 무협, 협박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순전 협박의 사극들을 많이 보는 것이다. 거북선은 무엇이었을까? 그렇게 보면, 생각이 그나마 하나 자리 잡았다가, 지워지지 않고, 방패로써 자기들을 조종하는 활의 군인들에게 대항하는 모습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때로는 사탄도 위에 있고, 천사도 위에 있는데, 지능이 한 치 앞도 분간하지 않는 완전 스포츠 형태가 되어서, 그들에게 대항하고, 그들을 향해 공격하다가, 온 몸이 화살로 덮이는 단순한 도끼 원인들을 그린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의 슬픈 교차를 지켜보게 된다. 우리나라를 제외하고, 전 세계 어느 나라도, 인문학과 함께 숨을 쉬는 스포츠는 없다. 헐리우드 좀비 영화, 점점 액션이 종속되어 가는, 일본의 특촬물 같은 것이, 전 세계 스포츠맨들의 우상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스포츠 영화를 기획해 보았다. 그러나 우리들은 어느새 나의 화려한 인문비평적인 지능에 오랫동안 노출되어 있어서, 다만 스포츠만 보고, 자기의 지능과 생명을 몇 개씩, 별 점 같은 것, 영화에 꺼내주는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다만 그들이 노력하는 사람이고, 그 모습 모두가 우리에게 추운 여름 날의 얇은 이불이 될 수 있다는 사랑이 있을 뿐이다. 스포츠가 좀비적인 쾌락까지를 얻기 위해서는, 그래서 주자가 늘 심판을 당해야 하는 것이다. 주자의 잘못이 무엇인가? 하늘의 공부를 혼자서 하는 것인가? 천자문을 혼자서 쓰는 것인가? 아니면 성의 연결을 감추지 않는 것인가? 그것의 보고가 남미에는 있다. 엉덩이 축구 경기에서 승리한 선수들의, 그 중에 한 명인지, 혹은 소수인지, 심장을 꺼내어 바치는 것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방사능에 노출되어 있는데, 얼굴이 인체 크기의 박쥐처럼 변하지 않은 것이 신기할 따름인 것이다. 거울이 없는 동안, 변했다가, 사람들이 있는 때는 원래대로 되고, 아무도 없는 때는 변했다가, 거울을 스칠 때는 원래대로 되고 했을 것이다. 화려한 스포츠적인 쾌락은 참으로 오래된 보고이다. 그것이 활과 같은, 고통스러운 위치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도끼도 쓰고, 활도 쓰는, 잡종 같은 좀비의 것인지, 참 알 길이 없다. 한국과 일본이 스포츠 외교로써, 이 정도나마 화해를 이뤘다는 것이, 그와 같은 연꽃만이 겨우 때가 묻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더러운 비평과 신문 기사의 지능이, 늘 스포츠적 지능을 추켜 세울려고 한다. 경우의 수가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나쁜 것도 아니고, 반드시 스핑크스, 그러니까 영원한 비인간적 삶 같은 것도 아닌 것이다. 조금은 웃기고, 볼 만한 것이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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