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문학적 소설의 주소: 감동은 어떻게.....세계적인 손 the guest......
소설은 외국어인가? 그러하다. 내가 했던 말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안 했을 수도 있고, 했을 수도 있다. 우리는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 어렸을 때는 남다른 감정으로 대하기도 한다. 이야기라는 것은 플롯이다. 그리고 함정이다. 그것을 고대 철학자의 말이라고 배우면, 마음이 스산해지고 그렇다. 그 좋은 이야기를 어째서 우리나라 사람은 조선시대 말에서야 경험했던 것일까? 그것이 우리들의 관심이고, 우리들의 미스테리이다. 이야기를 접하고서, 사람들은 자유롭게 되었고, 민주주의 회사의 기본 품성을 갖추게 되었다. 풍요로움은 상징 그대로의 추수 때의 벼와 같은 것이다. 보리도 못지 않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이야기는 도이고, 이야기는 교회이며, 이야기는 교회당 안에서의 결혼 같은 것이다. 그렇게 우리나라가 가난했을 때, 나의 가난 자격 같은 것, 부자 청년은 형이상학적으로 듣고, 해석학적으로 노력하겠지만, 대게의 가난한 사람들은 직접적으로 듣고, 직접적으로 감각하는 것이다. 얼마나 사람들은 이야기라고 하는, 자기 부상 열차에 관심을 가졌는지 모른다. 우리나라 국문학은 만용이 지나쳤고, 겨우 어리고 가난한 사람들의 오백원짜리들을 모아, 셰익스피어와 같은 권력을 가질 것으로 자기들을 여긴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처음은 시와 소설이고, 과정 중에 영화이며, 도달한 곳은 사상이나 철학이면 얼마나 좋겠는가? 처음은 시와 소설이고, 악마의 뿔이 조용히 걷는 저녁 길에서 함께 자란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 그들을 둘러싼 평은 치졸해지고, 너저분해지며, 릴리함메르 해지는 것이다. 티비소설이라는 관념적인 장르는 한동안 사랑을 받았으나, 바로 그와 같은 성장의, 나무로 만든 사과 상자 같은 것의 규격을 깨닫지 못한 것의 이유 때문에 함몰된 것 같다. 라깡의 몇 개의 유명 명제 중에 하나, 모든 욕망은 타인의 것이다는 것이 그것일 것이다. 소설의 인격은, 오브제 쁘띠 아, 자생적인, 자기 기초적이며 발원적인 것이 아니면, 교육의 과정에는 분명 불가능한 것이겠지만, 그 비좁은 교육의 과정에서조차 시도되어야 하고,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고백되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창작자의 두뇌 구조가 점점 더 객관화되고, 민중들에게 익숙화되고 나면, 그것은 백숙이어도 그렇고, 프라이드 치킨이어도 그렇다. 백숙은 백숙대로, 프라이드 치킨은 프라이드 치킨대로. 그 두 가지의 가난한 시간. 결국에는 소설에서의 인격이란, 소설가 자신을 발견하였다는 과장된 간증조차 차단되고, 그래서 그것들이 후광을 입는, 사람들에게 통용이 되고, 생각이 되지 않으며, 오직 행동과 대사만이 실제의 가치처럼 전해지는. 이상한 가난. 철학의 빈곤인지, 빈곤의 철학인지 모르는 휴전 상태.
우리가 어렸을 때 이야기를 지망하는 것을 무슨 수도승이 되는 것처럼 여기거나, 친구가 그와 같은 공부를 한다면, 태종대에 홀로 여행을 다니는 사람처럼 남다르게 보는 경향이 있었다. 이야기는 다종다양하지만, 이야기꾼이라고 해서 좋아하지만, 막상 그 이야기에는 집중이 되지 않고, 관심이 가지 않는 경험을 많이 해왔지만, 처음 그것에 지망하는 사람의 신화 같은 것은 이상하게도 아직까지 빛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영화는 어째서 지망하는 것일까? 그냥 여배우가 좋고, 혹은 남자 배우가 좋아서가 아닐까? 그것 말고는 정말 아무런 내적 원인을 발견할 수가 없다. 영화도 그렇다. 순전 그런 사람들의 집강소인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런데 한국 영화는 그와 같은 미국이나 일본 영화와는 다르다. 큰 차이가 없지만, 그래도 다른 것 같은 느낌이 있다. 타인의 욕망, 그것의 무한 반복 같은 우주이지만, 그래도 한국 영화는 추석이라고 하는 슬픈 하늘 교회를 앞에 두고, 어떻게든 데미지를 덜 입게 하려고 노력하는, 그와 같은 계절의 준비를 하는 사람 같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어쩌면 망쿳과 플로렌스도 그것의 전조에 호응하는 것일 수 있다. 공부하는 사람도 가을이 되면 사시나무 떨듯이 떨게 되어 있다. 공부한 것은 타인의 욕망처럼, 그림자조차 남아 있지 않고, 그래서 무영탑인지, 공부하지 않은 것만 남의 여자를 바라보는 것처럼, 그런 금지되어 있는 것이나 마음이 흐르는 것이다. 이런 말은 정말이지 타인의 욕망 중에서도 타인이요, 동시에 욕망인데, 평생 일만 하고, 평생 운동만 한 사람들은 어떻겠는가? 그들의 기억 속에는 오직 예수님 밖에 없다. 삼국사기도 그렇다. 장수가 왕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것은 어느 정도 물리학적이기도 하다, 장수왕이기도 하고, 왕이 되어 고전을 집필해야 한다는 것은 문무왕, 혹은 광개토대왕처럼 만화 같고, 당연한 것치고, 스스로도 대단하고, 너무나도 괴로운 일이 되는 것이다. 삼국사기의 집들을 그려보면, 약간 그렇게 넓지만 좁고,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하지만, 반찬 가짓수처럼 그래도 다 먹고자 한다면 밥상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을이 되어, 목이 잘리자, 가을이 되어 해마다 목이 잘리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것일 수 있는 것이다. 어떻게 다만 작은 소수림왕이라고도 있듯이, 작은 소설들을 쓰지 않았던 것일까? 내가 한신대학교 대학원에서, 혹여 나중이었는지, 설인귀의 장문의 편지를 읽고, 다른 영문 신학 논문들을 읽을 때와 이처럼 아무런 편차가 없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는지, 그것은 참으로 미스테리 중에 미스테리인 것이다. 그와 같은 작은 조개 소설은 쓸 수가 없는 것이다. 중국 설화 중에, 자기 남편인 이장군을 알아보지 못하고 취취가, 여자 이름인데, 다른 남자를 만나고, 쓸쓸하게 죽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었듯이, 고통은 그래서 상호적인 것이다. 그것을 존재의 관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존재의 관점은 일상의 문학적 관점과 구분이 된다. 존재의 관점도 분명 머리카락이 있는 것이지만, 비유를 하고, 상징으로 굳이 표현하자면, 머리카락이 모두 빠지는 모습으로 밖에 묘사가 되지 않는 것이다. 성경은 존재의 관점으로 나아간 것이다. 거의 모든 고전적인 작품들이, 아주 협소한 문학적 관점을 갖고, 오직 존재의 관점과 그것의 변형들로써 나아간 것들이다. 우리 인간은 존재의 관점을 갖고 있다. 그런데, 매일 매시간 동안 문학적 관점으로 타협하고, 은전을 받고, 그것을 파는 것이다. 이야기를 지망할 때는, 존재의 관점이나, 아무 이야기나 쓸 때는 문학적 관점으로 무질서하게 분열되는 것이다. 존재의 관점에 생명이 없는 사람은 고통을 느끼지 않고, 도리어 잘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가질 수 있다. 우리는 매해, 매시대마다, 경기도 화성에 있는 매바위처럼, 존재의 관점을 만난다. 겨우 문학을 배우고, 바깥에 나가서는 사회적 발언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문학이 실은 존재의 관점이거나, 그 사람이 문학을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겨우 문학만 배우는 회전이 있을 수 있다. 그와 같은 꽃과 같은 사람들인 줄 알았더니, 소년과 소녀, 때가 되어 존재의 관점에 아무런 장애가 없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도리어 그와 같은 의식의, 혹은 카테고리의 낯설기 때문에, 빛과 같은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문학은 존재의 관점들을 많이 만들어냈다. 처음부터 문학적 관점의 냄새를 풍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문학과 소설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다. 감금이 되거나, 죽은 것이다. 문학적 관심에 있는 것들이, 존재의 관점의 사람들과 기회들, 논리들과 비평들에 자주 문을 열어놓으면, 우리들 뿐 아니라, 분명 문법의 객관적인 현상이 현묘해지지만, 그것이 없이 마치 자기가 존재의 관점인 양 오래도록 버티고 있으면, 힘이 빠지고, 금세 생명도 그것의 신호가 매우 약해지게 되는 것이다. 오직 우리나라만, 그것의 모순을 이겨내는 힘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을 우리나라만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존재의 관점이 사라지는 것에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다름 아닌 나에게서 아무런 관심을 얻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대체 무엇이 있는 것일까? 과연 그런 영혼 같은 것이 있는 것인가? 그리고 진정, 마태복음의 처음의 말처럼, 그림자는 그림자를 낳는 것일까? 인기있던 무한도전이 사라지고, 처음으로 우리나라 국문학사와 연결이 되는, 어쩌면 그 모든 것의 짧은 집중 같은, 이름에 진정 값을 하는 무한도전을 본 듯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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