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문학이라는 이상
영문학과를 다닌다는 것은 첩경, 그러니까 지름길일 수 있다. 왕도. 혹자는 그것이 없다는 사람이 있다.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소리일 것이다. 우리는 어째서, 무소유, 소유, 무소유 놀음에 빠지는가? 법정 스님이 아주 예쁜 여학생으로 변신하여서, 나의 사랑을 받았었던 때를 기억한다. 법정 스님은 그것의 운명을 알았던 것일까? 몰랐던 것일까? 몰랐다는 것에 다른 사람의 손모가지를 건다. 우리는 어째서 좀비가 있고, 인간성이 있는지, 훌륭한 사람들의 우리들도 잘 모르는 전변들이 있는지, 정말이지 잘 모르겠는 것이다.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사람들은 노력하고, 보다 정진하며, 또다시 공부하고, 때로는 좌절하며, 공부를 잘했던 사람들의 공부를 안 하는 시기를 사는지 모른다. 내가 심적 죽음에 이르러,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 그곳에 있던 사람들도 이동한다. 그래서, 변신하여 많이 약해진 사람들은, 도리어 강해져야 하는데, 물리학은 그렇지 못해서, 일찌감치 무언가를 준비하고, 나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세한도를 생각하면, 가나의 혼인잔치에서처럼, 포도주가 갈수록 맛이 없어야 정상인데, 예수님은 예와 같아서, 잔치의 마지막에 이르도록 포도주가 맛이 있는 것이다. 중학생 그때에, 중학교 그때에, 벌써 나는 회의주의적 염세주의, 생의 철학적 염세주의를 배웠는지 모른다. 자득하였는지 모른다. 혁명 이후의 기간이 너무 길고, 기독교의 언어만으로 만족하기에는, 세상에는 배울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나날이 제네시스 같고, 나날이 홍콩영화만 같았던 것 같다. 제네시스는 사람들이 아파트에 피신하여 하루를 끝낸다 해도, 마음 만은 어딘가 달동네에 이르러, 혹은 숱한 고전들의 동굴에 들어가, 드라마마저도, 불을 지피고, 열병에 걸리고, 아버지나 어머니를 부르고, 사랑하는 사람을 부르고, 죽음과 같은 잠에 드는 것이다. 다시 태어난다면, 그것이 제네시스인 것이다. 소풍을 다녀와도 그렇다. 공부는 전족형을 당한 청나라 여인네처럼 시키더니, 모습만, 소풍을 또한 멋지게 다녀오면, 그만큼 영토를 정복한 것 같은 것이다. 혁명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등가의 것이 등장한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그렇게 세상은 배울 것이 많았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만족하기에는, 그것이 같은 물리적 공간이라고 한다면, 같은 결과나, 적어도 같은 효과까지 나타난다는 것에 우리는, 나로서는 할 말을 잊었던 것이다. 성룡 영화는 많이 맞는 사람과 같았다. 오직 영화라는 기술, 그리고 놀라운 친구들로 인해, 홍콩 영화의 친구들은 세계적으로 유명해서, 자세히 보면 맞는 것이 덜 자세히 보니 액션 같은 것이 되고, 이전의 최가박당 같은 것을 따와서, 정말이지 근사하고 아름다운, 그리고 동양적인 얼굴의 현대적인 분투기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나는 늘 언제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만났다. 하루 만났고, 이틀 만났다. 사흘 만났고, 나흘 만났다. 그들도 광주 사람들이요, 그들도 교회를 다녔겠지만, 그것의 영문학적 포멧이 완전한 사람은 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지금 증명되는 것인데, 그때도 그와 같은 기운이 세어나왔는지 모를 일이다. 나는 차갑게 정진하고 있었고, 어느 날 교회 토요 모임에, 여학생 두 명이 새롭게 나온 것을 알게 되었다. 둘 다 키가 작고, 눈도 작고 하였는데, 지금 보면, 전 세계 콘테이너 항구까지를 통과해서, 몇몇 큰 도시를 여행하고 돌아온 다람쥐들 같았다. 자세히 보면 크기가 차이가 있으나, 그렇지 않으면 다람쥐 같은. 어째서 성철 스님은 다람쥐 같지 않고, 법정 스님은 다람쥐 같은가? 사람들 모두 뽀로로와 그의 친구들 같다. 우리 때는 분명 개구리 왕눈이와 그의 슬픈 생태계 마을이 있었었다. 그러니 누군가 다람쥐가 되고, 나중에는 정확히 그가 누구인지 모르나, 보노보노가 되는 것도 당연한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어떤 문장은 뻗지 못하고, 다만 많은 말을 한다고 해서가 아니라, 의미가 살아 있지 못하고, 거의 모든 사람들, 거의 모든 길에서, 지하철 입구로 들어가는 계단도 차단, 엘리베이터도 차단되는 일을 당하고, 그것을 누군가는 뚫고 지나가고, 그 한 사람의 말과 글로써 다른 사람들도 뚫고 지나가는 일이 발생할 수 있는가? 나와 같은 차가운 어린 대제학도, 어린 왕자도, 꼬마 철학자도, 두 소녀가 세상을 향해 다람쥐권을 쓰는 것을 보고, 그 뜻을 알아보고, 좋아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것들의 움직임이 멈춘 세계. 그것을 두고 운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움직임이 멈춘 세계라는 것은, 생명 연장, 혹은 가짜 생명이랄 수 있는 언어와 기호, 그림과 남의 이야기에서 나의 지능과 이해, 나의 언어가 생겨나지 못하는 것을 뜻한다. 그것의 현상은 가혹한 것이다. 소위 거의 모든 문학과 대학생들은 자기들의 자유가, 자유민주주의가 어떠한 전쟁의 높은 산물인지를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베끼고, 답습하고, 흉내내고, 다른 나라의 잘 모르는 사람의 말과 글들을 권위있게, 그렇게 성적 관계를 맺고 마는 것이다. 잠깐 스치고 지나가는, 같은 젊은 시절을 지낸, 친구, 그리스 친구, 조르바, 대충 조르바, 카잔 차키스, 그런 사람인 줄을 모르는 것이다. 헤롤드 블룸. 이런저런 철학자. 분명 해볼만한 언덕이고, 전문가가 되지 않는 이상, 분명 즐겁게 요약 정리될 만한 사람들인데도 불구하고, 그 기초적인 향약집성방도 만들지 아니하고, 졸업하고, 취집준비에 열을 올리고 하는 것이다. 그와 같은 빛은, 피라미드의 높은 권역은 남에게 줘버리는 것이다. 코스모 폴리탄들이 오래 사는 것은, 그들이 뱀파이어처럼 흡혈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기 생명을 몇 개씩 버리는 것으로도 충분히 가능해 보인다 하겠다. 백미터 미인이라는 옛 말이 있듯이, 순간 접착제, 순간 대학 교수라는 말이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미래는 약속하지 못하더라도, 세상에 그보다 아름다운 곳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웬 다크니스 폴스, 순간 교수님을 만난 것 같은 빛을, 초상을, 프레임을 친구에게서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서양 중세사에서의 카놋사의 굴욕이라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하나의 뜻은 친구에게서 발견하여서, 기쁘고 굴욕적이라는 말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이 갈수록 지역적인 현상이 되어간다는 소리이다.
드라마는 무엇인가? 영문학인가? 영문학이란 무엇인가? 영문학인가? 숱한 소유의 끝에서, 무소유라는 것은, 사바세계의 모든 인드라법망에서 자유로운 것일 수도 있고, 내일을 향해 힘있게 숱한 솔의 눈을 깔아놓고, 도리어 육감적으로 섹스하는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을 있다고 하기도 그렇고, 없다고 하기도 그런 것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생명과 생각은, 다만 기분일지라도, 그것과 생각은, 분명 나무가 자라는 만큼 자랄 수 있는 것이며, 혹한에도 그것의 의지가 꺾이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이든 가질 수 있고, 마치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것처럼 무엇이든 잘할 수 있다. 그것은 어린아이의 숨골과 같고, 어린아이가 그때 그 시절의 교회에서 잘 지낸 것처럼, 나이가 들어, 회상하여, 다만 흉내내는 것일지라도, 나이 든 사람들도 잘 지낼 수 있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에티카는 끝없는 운명론 같기도 하고, 신학을 언급하는 매우 희한한 맥락의 현대적 실존주의 같기도 하다. 어렸을 때 아버지와 사과나무를 심었던 것이 행복했다 하는데, 내일 죽을 것처럼 힘이 없어 골골대더라도, 같은 사과나무를 손에 들고 심으러 언덕을 오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글은 그것의 염원을 담고 있다. 영문학이 그런 스피노자의 에티카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느낌은 별로 없다. 다만 그것을 읽다가, 그런 사람을 세상 좋은 사람처럼 바라보고, 찾아와 주는 여자를 향해, 고개를 돌려볼 수는 있는 것이다. 그것의 철학적 문장은 또한 예수님의 말씀처럼 선반에 있는 것이다. 다람쥐는 한계가 있다. 좀더 멋진 옷을, 크기가 있는 옷을 입으려고 하면, 이미 입고 있는 사람이 있고, 우리 모두가 보기에 그와 같은 목소리가 너무 아까운 것이다. 우연히 전화할 일이 있으면, 너무 좋아하고, 나를 사귀고 싶다는 말을, 자기 남자 친구 이야기를 함으로써, 어? 내게는 마음이 없나? 하는, 나로서는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문맥을 펼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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