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계단: 민중들의 저변과 홍심이 이야기
그렇게 우리는 돌아갈 곳이 없다. 영어를 잘하면 영국으로 돌아갈 것이고, 미국을 잘하면 미국으로 가서, 월드시리즈도 보고, 미식축구도 보고 할 것이다. 영화 속에서는, 참 우리는 못하는 것이 없다. 전쟁을 하려고 해도, 총을 잘 쏴야하지 않는가? 세상을 살면서 수학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는 말을 사람들이 얼마나 마음 깊이 좋아하는지 모른다. 예술들을 볼 때, 시시껄렁한 작품일수록, 여대를 나와서 막상 할 것이 없는 사람들은 위로를 얻는데, 그런 것이면 나도 하겠다는 연대가 분명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맞기도 하고, 그르기도 하다. 신서유기 같은 것도, 그런 것은 나도 하겠다는 전지구적인 위로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생수배달이나, 햄버거 배달, 모텔 카운터 같은 것을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런 것은 나도 하겠다는, 생수배달은 힘들 것이 뻔한데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어서가 아닌가? 정말이지 그 모든 것들이 피라미드의 계단과 같다. 그것은 올려보는 것과, 실제로 계단을 올라,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차이가 있을 것이다. 피라미드에 올라서 보면, 가까운 나일강 뿐 아니라, 갠지즈강, 황하강, 그리고 영산강 한강까지 보인다고 한다. 얼마나 옛날부터 피라미드는 계단져 있었던 것일까? 아내를 구하기 위해서, 지옥까지 갔다가, 세상을 돌아보니 아내가 없는 것이 아닌가? 피라미드는 그 모든 지옥의 전설과, 사람들, 그리고 지역들을 음습하고 기괴하게 만드는 것을 일거에 퇴치한, 장군의 산, 무등산 같은 느낌이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은 힘과 영적 파워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순전한 기독교인일 때, 영적 능력이 있는 목사가 설교를 하면, 정말 성령의 불을 내가 받은 느낌이었지 않은가? 우리들의 그노시스가 높아져서, 그것이 전부 과거지사가 되어서 그렇지. 그와 같은 지옥의 계단이 여기에 있을까? 저기에 있을까? 저 사람의 집에 있을까? 저기서 사람을 잡아먹을까? 노심초사하는데, 피라미드에 다녀오고 나면, 모습은 기괴한데, 막상 피라미드에 실제로 있자니까, 그 모든 괴물들이며 죽음의 군사들이 뭐한 것이다. 바람이 불고, 여름에는 더운 바람이, 겨울에는 그래도 차가운 바람이 불지 않겠는가? 보기에 따라서는, 인간적인 그리스 미술마저도 사나온 괴물 같은데, 이집트에도 숱한 석상이며 문자들, 벽화들이 있는데, 거기에 있는 바보문처럼, 문처럼 생겼으나 열리지 않는 것이 있는데, 피라미드가 영락 없이 그런 것이다. 연금술을 연마해서, 금을 얻지는 못해도, 화학 기술이 느는 것처럼, 피라미드에 올라, 올랐다가 천국의 계단, 내려오기를 반복하면, 체력이 늘지 않겠는가? 나는 솔직히 섹스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생각만큼 안해서, 섹스가 뭐든 어떤 사람이든 오징어로 만들고 꼴뚜기로 만들 것 같지만, 감각이 분명해지고, 분명해진다는 것은 딱딱해진다는 것과 아주 인접해 있는 것이어서, 피라미드처럼 계단이 생기는 것이며, 그것은 분명한 것과 아직은 분명하지 않는 것으로 구분되게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분명하지 않는 것들이 많았으나, 나중에는 거울을 보듯이, 분명한 것 천지이나, 개인적인 경험, 그리고 감각의 함수로서 보니까, 처음과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은 것 뿐인 것이다. 외국어를 잘해도 그렇다. 결국에는 외국 사람을 만나 뭘 하겠다는 것인가? 그와 같은 절대의 의문이 해결되지 않으니까, 처음보다 내가 지금 얼마나 차이나는 지를 모르는 것이다. 처음에는 식인종과 괴물의 천국이다가, 결국에는 아름다운 상형문자와 사람들의 천국이 되는 것이다. 나중에도 문자는 다만 요식 행위에 불과한 것이지만, 그것을 사랑과 발성으로 행하지 않는 이상, 사람들도 다만 잘 모르는 괴물들 같지만, 고대 이집트 사람들 같은, 지금의 관점에서 봐도 남자들과 여자들의 모습이 꽤나 아름다운 것이다. 태산이 아무리 높아도, 오르고 또 오르면, 하늘 아래 뫼인 것이다. 그 미음. 그 마음. 영어로서의 메이흠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석관이 있고, 그곳의 묘실이 있고, 그것으로의 알 수 없는 통로가 있는 것일까?
사람은 반드시 퇴보하게 되어 있다. 나의 아버지가 나를 주산학원에 보내지 않은 것은, 집에 돈이 없어서이지, 나의 지능을 막아보려고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집이 마당까지 그나마 있는 곳에서, 아이들이 학원에 갔던 것이지, 그런 집에 딸려 있는 부엌과 작은 사각형, 그 사이에 각종 가재도구가 있는 집의 사람이, 아이들을 학원에 보낼 처지는 분명 아니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공짜로 아이들을 가르쳤고, 계속 다니고 싶으면 등록을 하라고 했었다. 그래서 그 말을 했더니만, 돈이 없다는 것이었다. 굉장히 아쉽기는 했으나, 또한 굉장히 아쉬울 정도로 내가 공부를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문제를 풀 때마다 산술이 약해서, 힘이 들고, 떨리고 했기 때문에, 방학 동안에 주산을 배우면, 자신감이 배가가 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산수도 괜찮았었다. 그래도 학교 분위기와는 다른 것이 너무 좋았었다. 그때의 감각을 옮겨보면, 꼭 폴모리아의 음악을 듣는 것 같았다. 딱 할 수 있는 만큼 끊임없이 문제를 내주는 것이 좋았다. 그것을 할 때가 있고, 가끔 틀릴 때가 있었는데, 그것의 횟수가 줄 수록, 그와 같은 급의, 그와 같은 단의 느낌이 있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자신이 없다가, 갈수록 자신이 붙는다는 것이 여간 기쁜 일이 아니었다. 그와 같은 이층과, 삼층, 오래된 사층짜리 건물이 내게는 여름 날의 선풍기 바람 같았고, 아이들의 천국 같았었다. 선생님들도 복잡한 사상이나 이념, 국어나 국민, 독립과 미술, 신학과 불교의 세상으로부터 벗어나 오직 산술만 가르칠 수 있어서 행복한 것 같았다. 이러다가 계산에만 능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하기 나름이다는 생각도 있었다. 나는 그때 주산학원을 떨어졌었다. 시험에 붙고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공간을 또한 따지자면 돈이 없어서 주산학원에서 그만 떨어지고 만 것이다. 나는 항상 셈이 어려웠고, 고등학교 때까지 그와 같은 망령이 따라다녔었다. 그래도 나는 퇴보하지 않았다. 도리어 잠깐 다닌 것을 좋게만 기억할 줄 알았던 것이다. 어째서 그토록 좋았고, 행복했었는지, 어쩌면 그것도 피라미드의 미스테리일 것이다.....
계산을 아주 잘하는 사람이 있다면, 사람을 아주 높은 계단에 있게 한 뒤에, 인생에서 사람은 퇴보할 수 있다는, 그와 같은 유희왕 카드를 한 번 사용하게 할 것이다. 자기 딴에는, 거대한 사각형의 위에 있다가, 사통팔달 자유로운 공간에 있다가, 내려 서게 되고, 왕위에서 쫓겨난 것처럼 여겨지게 되고, 적어도 한 방향으로는 막혀 있는 듯한 가슴 답답함 같은 것을 느끼게 되겠지만, 세상 사람들의 시선으로는, 그것은 매우 높은 곳에서 일어난, 일종의 정신적인 고난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어쩌면 그렇게도 아름답고, 매주 일퍼센트씩 시청률이 오른다는 백일의 낭군님 같은 영화로움이 아닐까 한다. 구조주의적으로 보면, 백일의 낭군님은 아무런 역사적 배경도 없는, 순수 순정만화 중에 순정만화요, 작화를 황미나가 해도 될 것이고, 신일숙이 해도 될 것 같은, 그래서 조선시대에 대한 특별한 공부를 했느냐고 하면, 딱 그 정도의 세계관에다, 복식 공부, 그리고 우리 옛날 건물들을 사진 찍으로 다녔었다 답만 할 것 같은 느낌 같은 느낌인 것이다. 그것도 물론 방정식이 개입이 된 것이다. 하여튼 순수하고, 편안하고, 도시 생활에서 배신 당하고, 스스로도 더 이상 지식을 연마할 힘이 없고, 성적인 매력을 발산해서, 데릴사위로라도 남자라면 들어갈, 여자라면 그런 순박한 숟가락을 어디서 가져 가고 싶은 미쏠로지, 그와 같은 태엽 시계가 모두 사라지고, 보이는 것은 산이요, 보이는 것은 바다 같은 시골로 돌아간 것 같은, 이제는 아무 것도 없는 느낌인 것이다. 이야기가 복잡해질수록, 더욱 그렇게 수학적으로는 단순해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와 같은 학문적인 통찰을 할 수가 없다. 해녀들이 전복을 캐고, 바닷가 바위에서 미역줄기를 따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거기에 바로, 우리 삶의 생물학적 방정식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화학 공식과, 엘지 칼텍스, 정유 공장, 강변 가요제 같은 것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옛날에 말한 적이 있는, 아주머니들이 그렇게 도시 조경, 보도 블록을 갈고, 그런 자리에다가 꽃과 나무를 심는 것은, 그것이 우리들의 독서와 물리우주적으로다가 일치하기 때문이다. 읽은 것은 남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읽은 것이 자기화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읽은 것은 분명 상호적인 도움이 된다. 도시의 한 모퉁이이며,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통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읽은 것이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나무와 꽃처럼, 관념이 아름다웠다는 것 뿐. 우리들의 상처가, 메이흠이, 딱 그 정도로 고착이 되려고 하니, 천사들이 달라붙어, 그나마 꽃의 무늬로라도 채우려 하는 것인 것이다. 그것이 도리어 나무가 되고, 스스로에게도 진열이 아름다운 상품이 되고, 관념에서 관념으로, 그와 같은 이력서, 자기소개서만으로도, 평생 그런 것만 써도 되는 에세이스트 같은 것이 된다는 것은, 기자나 칼럼니스트, 그것의 가능성인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것이 오목한 사람들이 있다. 홍심이를 볼 때 그렇게 반갑고, 흥분이 되고, 또한 반갑고, 젊고 어리지만 모습이 그나마 시대 사극의 여주에 합당하다는 느낌을 받지만, 또한 흥분이 되는 이유는, 칼집을 손에 들고, 자객에게 십자로써 맞서는 장면 같은 것은, 순간 놀라고 두렵고 하면서도 매혹이 되는 이유는, 어딘지 모르게 오목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것이 그렇게 안타깝고, 우리들 옛 시절의 사진 같고 그렇다. 분명 우리들은 세상에 나와 있다. 레고의 블록처럼. 그런데 이것이 수학인지, 생물학인지, 철학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블록한 표현인지, 오목한 느낌인지, 그것조차 구분이 되지 않는다. 우리가 첨단으로 나아가다 보면, 퇴보하여 오목하게 지낸다 해도, 사람들 눈에는 산드라 블록하게만 보일 것이다. 사랑은 오목한 것인가? 아니면 블록한 것인가? 십대 소년들이 과속으로 차량을 탈취, 목숨을 건 질주를 하는 것은 오목한 것인가 ? 아니면 그나마 블록한 것인가? 말과 사물이 정확하면, 작품과 평론이 아름답고, 평산 신씨와 같으면, 그것은 태극과 같고, 그래서 가장 블록한 것이 되는 것이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구광역시가 되는 것이다. 석가탑이 블록한 것 중에 블록한 것이라고 우리가 알고 있지만, 얼마나 공부를 많이 하고, 스스로도, 그리고 그것을 주변 사람들이 알고 있어서, 나도 저들처럼 섹스하고 싶다는 염원의 다보탑을 만들어 내도, 오히려 블록하게만 보이는 것일까?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탑을 놓는다면, 비슷하게 석가탑을 놓는 것도 상징적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강소라양을 사랑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다 사랑하는 것처럼, 다. 보. 탑. 오히려 다보탑을 놓는 것이, 인간이 사탄과의 전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한 것의 참다운 표현이 아닐까 한다. 우리는 그래도 이 말 즉시, 언더월드에서 산다. 피라미드는 피라미드이고, 불국사는, 다보탑은 다만 우리들 다보탑만 같기 때문이다. 세상 어떠한 학자들도 언더월드에서 살지 않는 이가 없다. 다만 생각이 자유로운 서민들이,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의 도를 마음껏 발휘할 수 있겠는가? 태초부터 오목하여서, 자기와 주변이 조금만 블록하여도, 오목한 것을 사람들에게 강권하는 사악한 유식 것들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럴 것인데, 그것의 삼각형을 깨달았다 해도, 끝없이 오목한 사람들이 또한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서양 언어와 클래식 음악의 차이점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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