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반민중문화이야기

국문학과 고전문학의 동일선상에서

by 마음대로다 2018. 10. 6.

국문학과 고전문학의 동일선상에서






국문학이면 국문학대로 드라마 추노가 연상이 되고, 고전문학이면 고전문학대로 우리나라 영화 올가미가 생각이 난다. 사람은 좀비가 있다. 그러니까 좀비로의 길이 있다. 어쩌면 마틴 하이데거가 죽음에의 존재라고, 현존재를 정의할 때, 그 죽음은 잔잔한 슬픈 사실이 아니라, 좀비였을 수도 있다. 물론, 그런 식의 무의 철학은 오래된 것이고, 신화와 상징은 숱한 영화적인 타락 이후에나 비로소 우리들의 관심에서 멀어지는 것이 될 것이다. 내가 자주 말했던 것이지만, 그 말하는 순간에도, 내가 너무 힘들어서 그렇게 뉴요커가 되는 줄 알았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기가 욕에 머미가 될 때마다, 미국의 뉴욕이 연상이 된다. 미국이나 영국 사람들은 요크가 지역명이지, 컬스나, 블레임, 메이크벳오브라는 것은 연상하지 못할 것이다. 주자는 욕을 하고, 뉴요커가 될 지, 브로드웨이, 그것을 한 단계 참아내는 사람이 될 지, 말이 쉽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욕을 할 수 있지 않느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버려진. 쓰레기. 복음서에서의, 영원히 이를 갈게 될 것이다는 표현 같은 것. 성경은 정말이지 성경 같고, 주자로부터 존경을 받는다. 주자와 좀비가 한쌍인 것은, 주자의 처지에 욕을 하다가도 지치게 되고, 주자보다 슬프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사람들을 발견하게 되고, 모든 것들의 확률과 통계에 이르러, 분명 존경할 만한 것들을, 심지어는 사랑까지도 되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좀비는 한단고기에, 존비라고 나온다. 누군가의 종으로 나오는데, 그 말을 뜻풀이하면, 존경할 것이 없는 존재인 것이다. 우리는 불로장생, 혹은 독불장군, 유아독존 하는 것을, 존비에서 생각할 수 있겠지만, 한단고기의 해석처럼, 결코 그렇지 않고, 결국에는 누군가의 종이나 되는 것이다. 그것을 읽은 다음, 나는 항상 존경할 것을 찾았다. 정신일도 하사불성이, 도리어 귀신의 이름이 된 다음에는, 사람들이 더더욱 정신을 집중해서, 그와 같은 주문을 외우고 외울 것이다. 콘세트레잇 스피리추얼리. 에브리씽 캐낫비 임파서블. 그와 같은 이름은 나의 존비, 나의 욕설과는 이미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학이 되지 못하고, 존비가 되는 숱한 댓글들의 향연을 스스로 경계하게 되는 것이다. 


개독으로 틈만나면 비난하는 사람들은 대게 성경을 별로 읽지 않는 것들이다. 그리고 만든 것인지 확인되지 않는 기독교의 살인적인 기사들을 갖고 흥분하기 좋아한다. 날카로운 면은 공산당 수준인데, 그렇다고 그들이 좀더 들어가고, 공허한 정신의 면을 채우는 묵직한 관념들은 별로 갖고 있지 않다. 그러니까 자기가 힘이 있을 때, 그것이 체제적으로 자랑스러울 때, 존재와 정신의 막강한 대상을 비난하게 되는데, 아무리 생각하고, 거듭하여 생각하고, 정말 더럽고 야비한 기독교의 어떤 특수 집단을 떠올리려고 해도, 이해가 되지 않고, 삼해도 되지 않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집단이 있고, 집단이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있다면, 집단의 우두머리, 그것이 아니면 적어도 간사 정도는 어떻게 있는지 궁금하게 된다. 박일도라는 이름에는, 박대기 기자가 조금 연상이 된다. 일도라는 이름에는 대기 상태라는 말이 조금도 담겨져 있지 않지만, 우리들 비상구 투성이 정신현상학에서는, 김제동이라든지, 박대기 같은 이름이 상시투약의 캡슐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생각이 담기지 않는 댓글 현상 같은 것들. 주자도 아니면서 뉴요커에 익숙한 이데올로그들을 볼 때면, 그것이 가능하다, 그것이 가능하다, 나로서는 백 번 생각하는 편이다. 사람은 존재 자체가, 마치 죽부인처럼, 남자가 아니라는 소리, 상처로부터 태어나는 것인지 모른다. 나도 주자가 되기 전에는, 여자 이야기도 많이 했고, 그런 이야기에 별로 부끄러움이 없었다. 글쓰기라는, 소설 쓰기라는 엄청난 경험을 겪게 되고, 나의 인격이 숱한 매개를 통해서, 외화가 되는 것을, 도야가 되는 것을 체험할 수 있었다. 내가 행여 남자라면, 여자에게 기쁨이 되는 힘이 있을 뿐이라는 느낌 정도. 항상 백원짜리가 주머니에 있다면, 버스를 타려면 열 번 이상 주머니를 확인하면 되지 않겠는가? 여자 친구와 영화를 보려면, 같은 자리에서 그 짓을 서로 재밌다고 하면 되는 것이다. 구차하다면 구차한 것이고, 차이가 나는 것이라면 차이가 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신문 기사들을 접하게 되면, 주자의 뉴요커와는 근본적으로 생의 시작이 다른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댓글들도 그러하다. 내가 주자가 되어서 가장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 가난하고 약한 주자를 상대로, 여자와 아이들을 이데올로기의 수단으로 삼는 일들이나, 사람들, 영화나 기자들을 만날 때이다. 주자는 핵심이요, 헤게머니라는 소리이다. 클래식이라는 말은 그 자체가, 자기들은 주자가 아니라는 소리 밖에, 엄청난 일을 벌인 뒤에도, 남지 않는다. 그것을 몇 번이고 반복하여도, 주자의 냄새조차 풍기지 않는 것이다. 여자와 아이가 무엇을 가리키고, 어떠한 주자의 행동에 관한 형식적이요 긍정적인 표현이며, 부정적이고 적대적인 입장인지 설명이 별로 없다. 아이들은 주로 교육의 동기이자 목적이고, 앨범이자, 교육 예산의 근거이고, 우리의 눈에는 절대의 선처럼 보이지만, 주자와 악마에게는 아직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존재인 것이다. 과정이고, 시간인 것이다. 과정이고 시간인 것들의 에세이는 대게가 사탄 앞에서 머뭇거리는 것들이다. 우리는 어려서 그런 생각을 별로 하지 않았다. 아이들을 만나는 사람들은 예수님처럼 착하고, 지저스 투에이 차일드, 법이 없어도 살 사람처럼, 티비에서 덮고, 채우고, 주인공의 인격으로, 흑백과 칼라 사이를 연결해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간의 에세이를 지나, 판단이 숱하고, 숱한 판단 속에서 선명한 것들을 엮고, 죽어도 선한 것들만 연결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깨닫게 된 다음에는, 목적과 판단, 그리고 이성 중심주의적인 세계관이나 형이상학도 싫지만, 돈 많은 크루즈 여행도, 생각 없는 짠내투어도, 구채구도, 싫은 것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시간이 목적이 되는 것, 그와 같은 상상이 과연 가능할 것인가? 시간은 시간이고, 시간인 것이기에, 얼른 나의 부족함이나 사소한 악함 같은 것을, 나름의 좋은 선과 연결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처음에는 그랬다. 그리고 그와 같은 처음을 허락하는 형이상학적 체계가 무엇인지, 지금도 궁금하고, 자유주의 세계 전쟁이 무엇이었는지 한없이 놀랍고, 경이롭기만 하는 것이다. 있을 수가 없다. 시간의 에세이가, 사탄을 판단하는 것은, 사탄이 자기들 사탄의 부족을 인식하고, 그들을 미워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인 것이다. 클래식의 음악 소리와 숱한 반복적인 철학적 문구라는 것이 바로 그와 같은 비사실성의 현상일 수 있는 것이다. 사탄이 사탄을 미워하는 것으로서의, 일종의 허수적 현상 같은 것. 


국문학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학생운동권은 분명 정신의 위계에 있어서, 공무원 칠급 합격자들보다 우월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공부까지 잘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피곤하면 지치게 되어 있고, 지치다 보면 눈 앞의 사람을 사랑하게 되어 있다. 영화가 그와 같은 기억과 추억들을, 아주 잠깐 그나마 똥냄새 풍긴 것들을 만들어냈었다. 그러니까 기가 막힌 허수의 순열들인 셈이다. 사탄의 특징은 선을 알아본다는 것이다. 해석학적 선이해 같은 것은, 정말이지 너무나 포괄적인 것이다. 그리고 선의 특징은 너무나 자기중심적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들을 종합한 크리쳐들을 얼마든지 그려낼 수 있다. 고전문학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학생운동을 싫어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때로는 우리는 얼마든지 들을 수가 있다. 적당히 어른들로 냄새 풍기고, 변해갈 때, 학생운동이 어린아이의 목소리를, 북한의 지령을 받은 척 흉내내는 차원에서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에, 오리온제과 초코파이 정이 가지 않는 사람은, 이 땅의 지식인이 아닌 것이다. 우리 학생들은 자기중심적이었고, 학생이니까, 사회적이였으며, 역사적이었고, 애국적이었으며, 동시에 독일영화 메트로폴리스보다 미래적이었었다. 그들은 로봇 같았고, 황순원의 소나기 같았다. 만일 선이 귀신처럼, 사탄이 귀신이겠지만, 늘 언제나 새로운 부대를 만나고자 했다면, 그런 식의 존재의 방식이었다고 한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선했었는지 모른다. 그들은 시간의 국문학 속에서 사라져 갔다. 국문학은 어머니의 산 무등산과 같아서, 소름이, 아무튼 그들을 좀비의 길에서 인도하고, 흐름을 차단하여 준다. 우리의 산은 미스테리어스 하고, 우리들의 읽지 않은 고전들은 늘 새롭게 읽히는 시간 벌기에 능숙하다. 영화도 거들고, 다시 보기가 얼마든지 된다. 그러나 고전문학이 무엇인지는, 중국의 계림 풍경처럼, 하롱베이처럼, 아득하고 요원하기만 하는 것이다. 


존재가 보편이고, 그나마 포괄이며, 완성을 목적하는 것이면, 우리는 이런 실험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인간이 처음 좀비가 되었을 때, 가장 먼저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하고 말이다. 시간의 에세이는 알렝드 보통이나 말의 온도 같은 것으로도, 얼마든지 진행할 수가 있다. 좀비가 편한 사람들은 그나마 그와 같은 숙제가 없는 것이다. 문제는 관계와 현상, 그리고 숱한 반도체적 변환 속에서, 갑자기 구원의 이니셔티브가 발동하게 되면, 파멸과 에너지 적정 흐름의 우주에나 빠져있다가, 갑자기 정말 그런 것처럼 순간에서 영원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얼마나 하나님의 경영은, 기업은 놀랍고, 경이로운지. 그제서야 우리는, 사탄이 사탄을 인지하고 미워하는 희한한 정신과 언어의 현상학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행여 그들에게도 자기 교육과 여정이 있어서, 특출난 정신이 될 수 있다 해도, 그들은 결코 고대의 교부들처럼, 그리스 철학과 성경을 동시에 언급할 수가 없다. 정말이지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처럼, 절묘하게, 아주 잠깐 그와 같은 절대적으로 보편적인 정신이 될 수 있다 해도, 사운드 바디 사운드 마인드처럼, 키케로류나 겨우 그럴 수 있지, 거의 전부가 반드시 파편화가 되는 것이다. 숱한 사람의 죽음이 영향이 되어서, 그것의 잠재태와 잠재태, 가능태와 어머니, 비슷한 구조의 후대 생명들에게 알 수 없는 같은 운명을 선사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나 그곳은 이렇게 보면 선명하여서, 사탄에게는 일종의 식사시간 같았던 곳이었던 것이다. 사탄은 사람에게 별로 관심이 없다. 인간성.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역사를 빠짐 없이 기록하고 있는 천사들도, 확률과 통계로써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천사들은 그런 것을 진리라고 여기지 않는다. 피라미드는 여자와 어린아이가 주자와의 관계에서, 어떤 관계의 지시이고, 해석이며, 비유인지 설명하지 않는 것처럼, 무엇이 구약이고, 무엇이 플라톤이며, 무엇이 첨가된 것인지 말해주지 않는다. 마지막 판단에 이르러, 솔로몬의 위대한 경우처럼, 그를 바라보는 어머니처럼, 자기의 생명과 우주가 파괴되는 것은 세상 그 누구도 바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