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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이야기

백두산은 과연 건축인가?

by 마음대로다 2018. 9. 21.













백두산은 과연 건축인가? 




생각보다 헐리웃 영화의 종말이 빨리 왔다. 사람들은 영화를 히피여기는데, 하찮게, 결코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비닐하우스에 살 수 있어도, 영화가 없이는 살 수 없다. 물론 비닐하우스에 산다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 영화 없이는 살 수 없다. 우리가 서양 문명을 생각할 때, 과연 영화가 없이 생각했었는지 생각해 볼 문제이다. 영화는 선발대와 같다. 우리가 대학에 가서, 꿈에 그리던 동아리에 들어가서, 그리고 꿈에 그리던 엠티를 간다고 할 때, 가장 먼저 무엇을 하는가? 계획은 먼저 세우고, 선발대를 보내지 않는가? 가서 놀 만한 공간이 있는지, 그리고 민박집 가격이 얼마나 하는지, 요즘에는 펜션, 묻고 다니지 않는가? 나는 선발대를 가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공부할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주자가 공부를 기억, 그러니까 백두산, 생각만 하여도, 우리나라의 역사는 바뀌어진다. 왜나하면, 주자에게는 세상은 지옥과 같기 때문이다. 주자는 주자가 되지 못하고, 주자 이전의 상태가 될 수 있었다. 주자 이전의 상태는 무엇인가? 그것의 특이점은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생각이 없는 사람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생각이 부족하거나, 지나치게 감성적이거나, 독선적이거나, 말이 많거나, 이기적이거나, 공포 영화 같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알고 본 적은 있지만, 생각 그 자체가 없는 사람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자연적인 조건에서는, 생각 그 자체가 없을 수가 없다. 그러나, 원스인더레드문, 시크릿 가든, 인공적인 조건에서는 충분히 가능하다. 원래 사탄의 조건에서는 그것이 자연적으로 이뤄지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보통 캡슐은 색깔이 다르게 되어 있다. 그 한쪽의 생각만 자기에게 돌아온다고 하면, 우리는 캡슐 열 개를 모두 반환받았다고 하지만, 결국에는 생각이 반절만 돌아온 것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공부를 열심히 하고, 대학 때까지, 대학원 때까지, 공부를 정말 신혼의 코피를 쏟 듯이 쏟고 했다고 하지만, 우리가 영화를 선택하는 것은, 소설은 말할 것도 없이, 늘 중학교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내가 틈만 나면 미국 영화를 비난하면서, 러브스토리 같은 것이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했는데, 여기서는 다만 그것이 싫어증 같은 것이 아니라, 제법 문맥이 선명해지는 것이 되는 것이다. 정확히 말해, 우리는 과분한 교육을 받는 것이고, 루쏘의 말처럼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자연은 말도 못하고, 춤도 못추며, 사회적 의견도 없고, 협동과 단결도 없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죽은 것이 그 때문일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떤 괴상한 왕이 자기 정원을 바라보는데, 아름다운 관상 나무 하나가, 갑자기 뿌리 채 잔디 위로 올라와서, 여자 무희처럼 춤을 춘다면, 너무 무섭고, 기둥에 둘러 있는 어떤 것은 비키니의 앞가림 같기도 하고, 저녁에 잠을 이룰 수 없어서, 감옥에 있던 세례 요한을 죽이라고, 다음 날 아침 명령하지 않겠는가? 물론, 요한을 죽인다고, 달라질 것은 없는 것이다. 원래 민중들은 다들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이다. 우리도 충분히 그렇게 살아왔고, 지금도 어쩌면 그렇게 사는 지도 모른다. 


헐리웃 영화는 죽었다 깨났다 죽었다 깨났다는 것을 반복하고 있다. 그것도 우리가 생각을 할 때, 내가 글을 쓸 때, 그와 같은 생명의 힘으로써, 우리 오타와 블루제이스가 힘을 얻기도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거의 모든 양명학적 공포 영화가 그런 것이 아니냐면서. 그런데, 그것도 그렇지 않다. 세계적인 손 더 게스트를 사 편까지 보도록 하자. 앞으로 우리 현균씨는 다양한 여자 배우들이나 가수들의 매니저가 되면 되지 않겠는가? 앞으로의 통일과 작업은 전문가들에게 맡기고 말이다. 도리어 열성적인 인자들의 모습이, 그와 같은 주자의 편안함을 약속하는 것 같지 않은가? 그러니까 그렇게 큰 토네이도를 보면서, 오히려 구원이 될 것 같은 반발심 같은 것이 생기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수지나, 선미, 은채의 매니저가 되어서, 그것들이 매니저의 집으로 놀러와서, 사람들의 전화를 받고. 배우나 가수의 집까지 배웅해주고, 나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렇게 살면서, 좋은 말과 글들을 연구하고, 사진 연구가가 되고. 서로 미술 전시회도 열고. 이 얼마나 아름다운 상상인가? 의자왕의 삼천 궁녀 같은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주자학은 신비로운 동네인 것이다. 사람은 섹스하고 싶어서 산다. 주자학이 섹스하는 것이면, 사람은 자기가 당하는 고통을 그만 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말이 복잡하고, 엉켜있지만, 자세히 생각하면 충분히 그것의 백두산 줄기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거지 같은 학자들이, 백두대간 백두대간 그렇게 불렀다. 백두산 줄기라는 말인데, 산맥은 엄밀히 말해 줄기라고 하기가 어렵고, 나무나 동물?들이나 줄기라고 할 만 한데, 그것도 우생학 등으로 진화론을 연구하는 찰스 생물학적으로, 백두대간 백두대간 하는 것은 무리가 있었던 것이다. 내가 숱한 말을 써왔으면서도, 지금에야 그것을 발설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주자학이 백두산 천지까지 서로의 말을 타고 올라가는 쓸쓸한 생명 연장을 그리는 것이기도 한다면, 하루하루 살다가, 주자가 결국 사람들의 평균 생명보다 오래 사는 일 같은 것, 어쩌면 장수왕 중에 장수왕이고, 충남 공주 중에 공주일 것인데, 주자 이전의 가난한 말잇못이나 더듬이, 가짜 앉은뱅이나 소경들을 데리고 함께. 주자 이전의 사람들은 주자가 가장 싫지만, 그러나 대한민국의 헌법처럼 그 어떤 사람보다 주자가 가장 좋은 사람들이 될 것이다. 그들을 모두 데리고, 이번 두 남북 정상들처럼, 천지에 오르는 것이다. 그러면 먼저 죽는 사람들이 생길 것이다. 왜냐하면, 가짜 죽음인 줄 알았더니, 진짜 죽음인 것들이 반드시 있기 때문이다. 처음 호명이 되었는데, 가족들이 대신 그 상장을 받는 것이다. 몸이 아프다고 하고, 솔직하게 죽었다고 말을 듣기도 한다. 그와 같은 부정성이 전부, 돌이켜 보면 거대한 산과 같은 것이다. 그냥 돈만 받고, 몸이 불편한 사람들과 등산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들도 모두 하나님의 아들 딸들인 것이다. 내가 한국 영화를 싫어했더니, 어느새 손 더 게스트에 다 집어넣고 있지 않은가? 거기서 실제와 아닌 것을 생각하고, 분간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한국 영화의 위용 때문에, 헐리웃 영화가 기가 죽은 것일 수도 있다. 그들이 그렇게 노력한 것은, 그들이 생각하기에, 그것들이 전부 주자학이기 때문인 것이다. 나는 잘 모르겠다. 나의 주자학은 캡슐 열 개를 모두 돌려 받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반토막 난 것들에, 자기들 쓸쓸한 경험들을 담는 것을 나는 행위라고 봐주기도 그렇고, 역행하는 것이라고, 역린이라고 하기도 그런 것이다. 불쌍하고 쓸쓸한 것들이, 그렇게 물도 담고, 가수가 잠깐 노래한 것이 그렇게 더욱 쓸쓸할 수가 없었다. 백두산은 생각하고, 전쟁한다. 어제 식당에서 누군가 북핵 문제고, 전쟁이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두고, 나는 무슨 전쟁 나발이냐, 이미 전쟁인 것이고, 사람들이 (아무런 원리를 모르고서) 좀비되는 것이나 막아야 한다고 했었다. 




* 사진 협찬에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