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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이야기

역사저널 그날에서 비춰진, 심의겸과 김효원

by 마음대로다 2018. 5. 22.


역사저널 그날에서 비춰진, 심의겸과 김효원






이번에는 감이 바로 오진 않았다. 다만, 어느 시간대의 사람들이 대단히 덜떨어지고, 그런 것들이 상호만연되어 있는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역사라는 것이 그렇다. 제법 요순 같은 성군이 있고, 다음에는 못하는 왕들이 나오고, 그리고 간신들이 나오면 끝인 것이다. 우리는 음식을 먹을 때마다 간신에게 아첨하는 법을 배운다. 그것의 자연적인 출발을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그것을 학문에까지, 신학에까지, 신화에까지 확장시킬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남녀간의 문제도 그렇다. 아무리 이성계라고는 하나, 심의겸, 공부를 하고, 동시에 주식을 하면, 반드시 그런저런 사회적 인물이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심의겸, 그러니까 양명학을 가로지르는 참된 주자학일진데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 자신의 심의겸을 제외하고는, 이것들이 먹는 것을 밝히는, 인라이트먼트, 사람들인지, 아니면 여자들을 밝히는 것들인지, 아니면 주식전광판 같은 무의식의 사람들인지 분간할 수 없는 것이다. 참된 심의겸이 있다면, 그는 동인 같은 사람일 것이다. 동방박사, 그리고 동방불패. 참된 학자가 있다면, 그의 복잡한 관념이나 클리쉐, 그러다가 주지육림에 빠지는 사이클론이 아니라, 아이들과도 잘 놀고, 일반 민중들과도 대화에 막힘이 없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다른 데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분위기를, 역사 프로그램에서는 잘 묘사한 듯 하였다. 동인들도 그렇고, 서인들도 적어도 자기들 무리 안에서만큼은 의사소통에 막힘이 없었던 듯 하다. 


의사소통은 다른 의사소통의 체적을 만나, 깨지고, 다치고, 심지어는 죽기까지 하는 것이다. 조선시대를 넘어, 그들 사색당파의 모습은 일본 사람들에게, 그리고 한국 사람들에게 소중한 안주거리가 되어 주었다. 적어도 의사소통에 닫힌 사람들에게, 여러 생각과 외계어 발설의, 라운드 테이블이 되어주었던 것이다. 그것은 오래 가지 못한다. 우리가 민중들의 생각과, 학자들의 것들을 구분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민중들의 생각은 육체의 증거일 때가 많고, 학자들의 생각은 신학적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민중들은 민중들의 생각을 좋아하다가도, 그것이 다만 그들의 자기들과 똑같은 육체의 증거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 도리어 먼 산 돌아가는 길일 지라도, 학자들의 권위를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 답답한 마음을 완전히 지우지 못하고, 사람들은 죽는 것일 수 있다. 서울의 매력이 그와 같고, 서울의 슬픔이 그와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의겸과 김효원의 최초 대결이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리고 누군가 그들을 가리켜 서인이라 하고 동인이라 하는 것에, 타오르는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을 느끼는 이유가 무엇인가? 서양 사람들은 지리상의 발견을 하고, 도대체 무엇을 알고자 했던 것일까? 다만 신대륙으로부터 처음에는 후추? 그리고는 금과 은을 그렇게 많이 가져가서, 서양의 무엇에 도움을 주었던 것일까? 그리고 지금의 이스터섬을 누가 이스터섬이라고 이름 붙였던 것일까? 무슨 영국 제독인가 하는 사람이 발견해서, 그 이름을 붙였다고 하는데, 항상 그런 것은 의사소통은 해결해주어도, 나머지 훌륭한 것들은 받쳐주지 못하는 것이다. 원래는 돌아오지 않는 길로도 생각했을 수 있다. 우리가 지옥에 산다면, 지옥의 최후의 풍경이나, 지옥의 최초 원인 같은 것을 알고 싶어 했을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지옥과 연관해서 읽지 않는다. 왜냐하면 너무나 많은, 너무나 아름다운 문학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추방당하고, 어린아이들은 버려지고, 노예로 살고, 그리고 왕들과 살고, 밤낮 없이 환청에 시달리고, 그것도 심의겸 약간 모자란 판에, 옆에는 바알을 섬기는 무리가 있고, 항상 동인을 선민으로 삼을지, 서인을 선민으로 삼을지, 마치 그렇게 마지막 선택의 시간이 오고, 선택한 다음에는 그 어느 한쪽에 하나님의 불의 심판이 임할 것 같은, 매우 단순한 지옥 실체감의 연속들. 예수님은 바른 말을 하시다가 고문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우리들의 기억에서나 부활하시는. 맨 처음 그렇지 않은 육체를 가진 독생자가 나타나셨으니, 그는 사도 바울이신 것이다. 그러나 훈민정음으로 쓰면, 우아할 뿐인 것이다. 이름적인 상관성은 거의 없고, 오직 그 뜻과, 빛, 그리고 성경 속에서 갖는 최초의 마르고 싱그러운 대지를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도행전이 나타나고, 편지 속에서 몇 차례나 맞고, 도망다니고, 표류하고, 고생을 많이 했다는 내용이 반증이 되는 것이다. 민중들의 기적 신화라는 것이,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어느 때는 희망을 주지만, 어느 때는 고통의, 육체의, 증거 같을 뿐인 것이다. 다만 그 풍성한 관념들이, 드디어 사람들의 신학에 침입을 하고, 그저 지옥의 실체적 증거인 플라톤과, 관계적 증거인 아리스토텔레스를, 구원해주시기에 이른 것이다. 성경이 이와 같이 지옥의 증거라면, 플라톤도 그러하고, 아리스토텔레스도 그러한 것이다. 우리는 솔직하게 심의겸을 요구할 수 있고, 그것에 그리 크게 반감을 갖지 않고 김효원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그와 같은 세 개의 존재는 아름다우나, 지리상의 발견을 가진 다음에는, 더욱 타오르는 해와, 아름다운 달과 별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안타까운 사건사고를 접할 때마다, 밤낮 없이 지옥을 연상하는 이유는, 주자학의 필연적인 결과이다. 필연적인 지옥은 사탄의 현상이고, 우연적인 지옥은 인간의 것이 그들의 것과 다르지 않다는, 슬픈 복음일 뿐이다. 때로는 필연적인 지옥이 우연적인 지옥으로 나타날 때가 있고, 우연적인 지옥이 뒤늦게 필연적인 지옥으로 증명될 때가 있다. 선조가 밤낮 지옥 놀이에만 빠져, 학문을 이이나 이황처럼 등한시했다면, 공부할 만한 충분한 시간과, 그를 돕는 무수한 여자들, 지금으로 보면 무한한 처녀들과 같았을 조선의 대지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습을 반복하는 책의 신화나 만들고, 적당한 그림자는 영락없이 서양을 추종하게 할 타임캡슐들이었다면, 그리고 선조가 밤낮 없이 지옥의 우연적인 가능성과 필연적인 가능성에나 빠져, 두 눈이 멀 지경이었다면, 그것의 심리적 한계, 그것이야말로 성경의 육육육과 같은, 완벽한 육체, 아무런 에쎄이도 없는 지금 미국 영화의 숨가쁜 연속들과 그것의 흐름이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이순신을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다만 지역 깡패이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 이상이 있어서인 것인가.....


조선은 이후에, 지옥에 빠진다. 하지만 그것도 타임캡슐과 같아서, 어찌보면 선조들의 업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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