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딩 같은 우리나라 여배우들. 국가는 무엇과 같은가?
김용옥과는 다르게 우리는 남진이란 무엇인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김용옥이 이데올로기적인 참 필로소퍼가 될 것 같았어도, 지나치게 동양 사랑적인 동양학자였기 때문에 그것이 차단된 것 같은 느낌이 있다. 나도 물론, 나의 기초적인 항목이 마땅한 대우를 받았다면, 서울에서 한복을 즐겨입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둔하고 어려운 손으로는, 무엇을 집기가 어렵다. 대게가 시키게 되고, 그때부터는 노동과 정신 능력이 분열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거의 모든 관념적인 상태의 병폐가, 독특한 동양적인 철학적 사상적 문화적 배경에서 비롯한다는 것을, 그것과 틀이 똑같다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는 매우 놀라게 된다. 우리가 성리학이 봉건적 지배 체제의 이념적 배경이 된다는 것을 매일 같이 비난하더라도, 마땅히 그것의 구체적인 문장을 한 번 인용한 적이 없는 것에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리학도, 무슨 효경, 그것을 비롯하고 근거로 하는, 주희가 썼다니까, 이런저런 집안 훈도 같은 것이, 문제가 있는 것이고, 우리들의 대충 비판하고, 시퍼렇게 이론적 문장의 과시를 해대는 것을, 한 번도 레토리컬하게 반성하지 못하는 것에도 문제가 있는 것이다. 마치 육이오가, 하늘에서 번개가 내리치고, 이제는 그리로 번개가 치지 않을 것을 약속한 상태로, 종묘의 싹이 오른 것으로도, 그렇게도 의미가 해석이 되는 것이다. 어떻게 지금 우리가 잘 살다보니까, 그와 같은 인과는 송두리째 잊고 만 것이다. 분명히 숱한 인과의 내용들 중에서, 마땅한 문장들을 다는 것을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매우 막중한 것이 없을 수도 있고,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을 수도 있으며, 아직까지 그 이름조차 모르는 것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옛날 영화들을 잊지 않은 채로, 새로운 영화나 드라마를 계속해서 개척하는 것이, 다만 흥행을 위한 것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육이오 전쟁이 끝나고, 종전이 선언이 되고, 그냥 육이오 전쟁만 끝난 것일 수도 얼마든지 있지 않겠는가? 그것의 수묵담채화가 사람들을 두렵게 하고, 그것의 말의 가능성이 세상 무서운 것이다. 미국을 보자. 미국이 다만 영국의 식민지나 될 것이지, 무슨 경찰 국가의 위용을 십년이건 이십년이건 과시하겠는가? 비행기가 난다 하면, 그냥 비행기가 난다 싶은 것이고, 항공모함이 있다 하면, 그냥 항공모함이 있는다 싶은 것이다. 이념이 사라지고 나면, 금세 사물은 차원이 축소되게 되는 것이다. 차원이 있다는 말은 거짓말 같다. 그렇다면, 세계가 있다는 말은 사실인가? 세계가 있다는 말이 가능하려면, 고통스럽지만, 차원이 있다는 말도 가능해야 하는 것이다. 사탄은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차원을 지배하는 것일 수도 있다. 세계를 아는 것이고, 세계의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것은 다만 인간일 수도 있다. 미국의 차원이 축소되고 나자, 금세 남미는 불우해지고 말았다. 미국이 선생이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공부 잘하는 학생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차원이라는 것은, 필름을 갖고 노는, 인문학적 엽서 같은 것이다. 그러나 축소되고, 사라지고 나면, 좀체 쉴 수 없고, 아무런 학교에 교보재가 되지 못하는, 교보재 이상의 영화를 누리는 영화는 만날 수가 없는 것이다. 옛날부터 미국을 그렇게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 도리어 두렵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을, 그 사실을 보도하는 사람도 없다. Rockwell, Knife. 사람들은 모두 착한데, 미국은 결국 솔직한 차원에 도달하였고, 비판하던 사람은 동시에 격려를 하지 못했다고 자책하고 있으며, 지금의 언론은 숱한 말장난에 능력 솔직하게 일언반구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아주 기초적인, 데스퍼레이트한 문장들은 있다. 그러나 공포의 포켓볼 같다. 모든 레포츠가 그렇듯이, 초심자가 다 해먹는 경우가 있는데, 초심자의 능력을 우리가 포켓볼에, 그러니까 그와 같은 능력이 동시에 포켓볼의 포켓에 빠지지 않겠는가 두려움이 생기는 것이다. 나를 보자. 나의 경우에는, 초심자의 건물과 같았고, 다윗의 장막과 같았지만, 처음부터 능력이 두드러졌고, 장르가 워낙에 민중적이었으나, 로크웰의 나이프와 같은 미국 언론 비평 혹은 기자들은, 별로 그렇지 않는 것이다. 아주 화려한, 구스타프 융의 황금풍뎅이를 연상시키지만, 이런저런 맘모쓰 방송국에서 정치인의 관을 멋지게 짜면, 사람들은 다시 그와 같은 기초질서로 돌아가고 마는 것이다. 정말이지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지 못할 운명이라는 것이 있고, 생각보다 공고하며, 자칫하면 영원할 수 있는 것인가? 처음에는 쇼맨쉽이라고도 생각했다. 그러니, 미국이 일본 편을 드는 것을 당연한 것이라고 우리는 여겼던 것이다. 일본이 한국이나 중국에 항거하는 것을, 어쩌면 같은 모리배 의식이라고도 여겼다. 생각이 엉키고, 아무튼 정리가 되지 않지만, 별로 그들이 식민지 상태에 있었고, 보스턴 티파티를 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차츰차츰, 미개발되고, 미발견되었던 피라미드를 하나씩 발견하게 되면서, 이 얼마나 마음 편한 양적인 제국으로서의 영국의 식민지 소질을 가지고 있는지, 뒤늦게, 그리고 드디어 놀라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과거에 두 번의 국가 시대가 있었다고 가정할 만 하다. 첫번째 국가 시대는, 인간을 실험하느라고 전체 인구의 십분의 구가 전부 소진되었다. 그것의 원인은 간단했다. 물질로써, 다만 선한 양심을 가지고서는, 물질의 인과를 따라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두번째 국가 시대는 그래도 무기로써 인간을 실험하느라고 인간을 소진하는 데 그치지는 않았다. 클래식 음악을 그렇게 좋아하고, 사랑하고, 한 음 한 음 놓치지 않고 따라갈 수 있는 열성분자인 경우에는, 미국의 한창 때의 팝송을 듣게 되면, 도리어 매우 한국 노래 같다는 인상을 갖게 된다. 대놓고 국악의 멜로디를 따라하는 사람도 있고, 거의가 말 끝이 내려가는 인상과, 습관, 대화의 높은 관습으로 보면, 서양인들이 듣기에는,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으나, 갈수록 매우 한국말 같은 것이다. 그렇다고 말을 속사포처럼, 오케스트랄하게 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그와 같은 이유에서, 그것을 시도하고, 다름 아닌 언론에서, 그런 사람을 멋지다고, 높이 사주기도 하였던 것이다. 간단한 말을 빨리하는 경우에는, 우습고, 고등학생인가 싶고, 외계적인 지식을, 그런 유사 과학 용어를 빨리하는 경우에는, 엠아이티 공대 학생인가 싶은 것이다. 지금의 미국의 정신이 살아있는 것의 증거는, 다만 한류 때문인 것이다. 다만 한국을 향하는 것 뿐인 것이다. 그렇다고 사탄의 가면으로서의, 영국의 식민지가 되고자 하겠는가? 고등학생 같고, 말만 속사포처럼 빠른 엠아티 공대 학생이 무슨 세계 차원의 진행을 가져오겠는가? 이제는 세번째의 국가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인간을 위해서, 참 인간을 향하여, 인간 실험으로써 사람들이 노력한다는 것은, 드디어 높이의 자충수가 되는 것이다. 한국말이 굴러다니는 형세이며, 자연적인, 중국적인 한국어마저도, 그들이 그래도 자랑하는 훌륭한 세계 권력이, 인간이건 법인이건 간에, 이겨내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이제는 지켜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소설이 있는데, 그렇게 비판의 기초가 있고, 신앙심이 있으며, 인간적인 매력까지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고맹, 옛날 팝송들처럼, 그것을 좀더 엣지있게 해서, 영화 음악으로 손색이 없게 드라마나 영화들을 만들면 얼마나 좋겠는가? 일단 그렇게만 해도, 차원의 축소를 따라가지 못할 판에, 점점 더 그와 같은 관심에서 멀어지고, 다만 확립된 제도 안에서, 자연스러운 동물들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미국에서 뭔가가 나온다면, 빌딩이건, 영화건, 매체건, 스포츠건, 서로 비슷한 것이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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