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과연 강요된 이데아를 상상할 수 있을까?
스스로 아는 것과 재산은 어떻게 다른가? 펜이씀은? 재산이라는 말은, 재산의 회의주의적 전통은, 사탄에게도, 생각 좋은 철학자에게도 두루두루 통하는 것이다. 재가 산을 이루는 것이다. 그것은 강원도 산도 그렇고, 노뜰담 파리도 그렇다. 바위가 버티는 것은, 바위가 타지 않는 것은, 천년의 지혜인 것 같다. 그러나 그렇다고 흠결이 사라지는 것은 아닌 것이다. 우리나라는 초능력의 흠결이고, 노뜰담 파리는 원인의 사치 어쩌고 하는 한국어의 흠결이다. 그런 것이 있다. 그와 같은 보정 편지를 받았다.
그러니까 간단하게 요약하면, 첨단을 가지면, 재산은 금방 재가 될 터이고, 재가 산이 되는 것은 가질 필요가 없다는, 그와 같은 곳으로는 여행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고, 강요인 것이다. 그러니까 이와 같은 망둥어의 변신이, 실제로 존재하느냐는 것이다. 말은 가능하고, 연극적인 날카로운 대사는 될 것 같아도, 분석하고, 토대와 원인을 규명하여, 여러 구조들을 포괄하는 대전제를 삼을 만한 것은 못되는 것이다.
그와 같은 이상한 변개소집성 같은 것이 없다. 이백처럼 시를 잘 쓰고, 잘 먹고, 잘 마시고, 두보처럼 시를 잘 쓰면, 잘 먹고, 고산에도 오르고, 악양에도 오르고 하지 않는가? 서경덕도 그렇다. 황진이가 있었지 않은가? 서경덕은 더더욱 시도 없고, 이름 서경덕만 있는데도 그렇다. 어째서 곡기를 끊는, 그와 같은 처참하고 어린아이 같은 초월주의가 욕구될 수 있는가? 사람들이 가난한 주자를 두고, 그가 초월주의이니, 우리들은 당연 먹을 것이 너무 많은 걱정을 하는 것이다 할 수 있는가? 매우 이상한 아프리카인 것이다. 피골이 상접한, 말 할 수 없이 빼빼 마른 두 사람이, 서로에게 바늘을 찌르면서 좋아하는 풍경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 그와 같은 풍경은 사람들을 컴백홈하게 만든다. 그러나 보는 이에게만 평균율을 얼마든지 쳐준다면, 얼마든지 주자가 모르는 곳에서는 죽음에 이를 정도로 빼빼 마를 수 있는 것이다.
끝없이 이상한 초월주의를 쏟아주더라도, 주자는 그것을 글로 쓰고, 사람들을 살이 찌게 하고, 건강하게 하고, 명랑하게 하는데, 짧은 글을 써도, 악사를 부르고, 짧은 글을 써도, 연예인을 부르고, 짧은 글을 써도 이성계(a heroic love story)가 있고, 짧은 글을 써도 교회와 성경의 인용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초월주의는 항상, 기가 막힌 단절과, 기가 막힌 시작과, 기가 막힌 도덕주의가 있는 것이다. 세상에 넘치는, 씨알 사상 같고, 씨알 같은 가시 같다.
주자가 바늘이 되면, 부자가 통과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사람들의 생각은 영원히 나를 알지 못한다.....
슬픔은 세상의 모든 강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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