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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이야기

어떻게 우리나라 말은 세계적이고, 그것의 원인은 무엇인가?

by 마음대로다 2019. 5. 22.


어떻게 우리나라 말은 세계적이고, 그것의 원인은 무엇인가? 






지금 세계는 문학이 마비되어 있다. 


문학이 답보상태에 있게 되자, 최자, 드디어 게구멍 같은 회전이 환히 드러나 보이고 있는 것이다. 다만 그것은, 어린아이들에게 공부를 많이 시키고, 일요일에는 교회에 나가게 하는 것으로다가, 사람이 성경에서만 나실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회전은 성경의 인용 속에서, 그것을 또 인용하고, 또 기억하며, 또 까먹고, 또 기억하는 것으로다가, 우리를 아주 목사님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회전은 얼마든지, 성경에 오뗀띠시티, 교회에 겉으로만 출석하고, 속으로는 얼마든지 그렇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식욕이 왕성하며, 성욕도 왕성하면, 교회의 크기가 크고, 문이 넓어도, 그리로 잘 들어가지지가 않는 것이다. 물론 그와 같은 자기 크기로써, 사회 사업을 왕성하게 하면, 그것은 당연한 것이고, 자연 속에서 일하는 포크레인처럼, 자연스러운 것이다. 우리는 기가 막힌 모습으로다가, 그 둘의 모습을 동시에 취할 수 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묘한 노우블 세비지 같은 웃음도 짓고,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으며, 심지어는 문학가의 모습을 자랑할 수 있는 것이다. 정말이지 그 정도의 삼투압이라면, 사람들은 모임에 일부로 가끔 나오고, 그다지 크게 발언하지 않는 사람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교회라고 해도, 다들 사람 사는 곳이기 때문에,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없으면, 힘이 빠지게 되어 있다. 다만 이성적인 좋아함이 아니더라도, 그 사람이 있으면, 기계가 잘 돌아가는 것 같은 인상을 가질 수 있다. 사회에서도 그렇다. 사회는 곧 종말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나, 사탄이 원래 사회학을 전공하여서, 묘하게 성경의 단어와 알 수 없는 문법을 쓰는 사람에게 귀가 쫑긋해지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옛날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날씬했고, 전후 미국 사회처럼, 그와 같은 모습으로다가 춤도 잘 추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그것의 원형을 찾아가고 있는 중인 것이다. 우리는 넓은 대지를 가리켜 콘티넨트, 프레이리라고 하지, 피그 혹은 요크셔라고 하지 않지 않는가? 그런데도 유독, 날씬하고, 그렇다고 누군가의 말처럼, 필라테스 사망, 그런 사망 유희 같은 열정으로, 살을 뺀 것이 아닌데도, 동작도 적당하고, 기능적이면, 이상하게 브라이트 리젼, 그러니까 광주 같고, 트와일라이트 리젼, 그러니까 공주 같은 것이다. 얼마나 클래식 음악은 가까이 있었는가? 신파만 봤다 하면, 반절은 슬픈 음악에 절여저서, 미워도 다시 한 번, 엉엉엉, 미워도 다시 한 번, 그것의 알파는 아나, 오메가는 잘 모르는 상태로 극장을 나오지 않았었는가? 그것의 원형을 중심으로, 우리나라 사람만큼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도 없었을 것이다. 이문세가, 그의 작곡가와 함께, 클래식의 사람이었다고 한다면, 유리상자, 뭐 이렇게 저렇게, 다들 사람들의 의아해할 것이다. 모든 음악은, 어택 엔 릴리스가 있어서, 배움과 자기 세포, 그것의 부단한 삼투압에 걸쳐, 어택의 스타트 라인이 정해져 있는 것이다. 지금의 우리 음악들이, 시끄러운 농악을 차용하여서, 매우 바쁜 리듬과 멜로디를 자랑하지만, 그것은 따지고 보면 그것의 맨 처음의 주먹이 약하고, 기능이 충분히 인정되어서, 편안하여 쉬지 못한다는것 밖에 드러나는 것이 없는 것이다. 그것의 맨 처음의 어택. 미술 시간에 그림을 그리게 하면, 우리가 나의 손을 처음 그렇게 관찰하는 것이다. 마치 만나본 것처럼, 설현의 손이 그렇게 불쌍하고, 그녀의 자기 의식이 가상하고, 내가 그녀에게 아무런 키스를 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운 것은, 그녀의 어택이, 권택영, 이택현, 그리고 임권택, 거기에는 있으나, 거기에만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춤을 기가 막히게 잘추고, 몸매도 아름답고, 전선인지 아니면 배터리인지 모르는 상태이긴 하지만, 이상하게 글을 잘 읽을 것 같지는 않은 것이다. 글을 잘 읽는다고 해서, 글을 잘 읽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글을 약간 못 읽는다고 해서, 이해가 떨어지거나, 적어도 방송 작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다. 틈만 나면 끼워팔기에 나선 하루키를 보면,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이, 그와 같은 기사들이 내게 고통스러움을 주기는 하나, 일종의 보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모든 영화가 그렇다. 우리에게 고통을 주고, 동시에 고발이며, 보고인 것이다. 어째서 그 처음의 어택라인이 갈수록 뒤쳐지는 것일까? 옛날에는 그냥도 날씬했다. 설현을 보면, 일부러 옛날 사진을 찍는 것 같은 기분이 있는 것이다. 때로는 기독교의 광신자들도 있었다. 까라마조프의 형제들처럼, 형제와 자매가 여섯이라면, 그 중에 한 명은, 광신자일 수 있었는 것이다. 영화 마부의 신영균도 그것의 숫자에 일획을 담당했었다. 우리는 직업을 선택하고, 그 하나의 칼라로 몸이 젓어들며, 나이가 들면 성욕도 떨어지고, 성격도 단순해지는 것이다. 꼭 깡패 같은 것들이 있었고, 옛날에는 여배우에 가까웠는데, 지금은 김태리를 거쳐, 조봉암을 가리켜 조봉암이라고 일러주는 역할로써, 극중 바깥에서는 깡패 같은 성격으로 정착되는 것들도 있는 것이다. 회전은 한계를 뜻한다. 이것들은 한계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처음부터, 서영채, 한계가 없었던 것일 수도 있다. 우리가 사각형 큐브에 있어서, 생각이라는 회전을 어느 정도, 각자가 하는 지는 아무도 모른다. 역할이라는 것은 그와 같은 회전의 한 가지일 수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을 때에, 한 아내가 여럿 같고, 한 여자와 섹스를 하는데, 백 명의 여자를 만난 것 같고, 그것의 맛이 느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코스모 폴리탄이라고 하는, 극단적인 튀니지 오버 더 기자 플라토우의 경지에서는, 큐브가 하나 던져질 때마다, 문어 다리 하나씩을 내놓는 사람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문학이 회전의 발생인지, 아니면 즐거운 일본 음식인지, 우리는 정확하게 감별하지 못한다. 문학이 회전인 것은, 인간에게 문학이 회전이어서 그럴 것이고, 문학이 다코야키면 인간이 그 정도의 관습에 익숙한 다코야키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정신은 회전하여, 모든 공간에 일정하고, 음악도 다채로우나, 항상 같고, 생각의 항목은 군대에서의 항목 체조처럼 갈수록 힘들어질 정도로 거대해지나, 정신이 없다 보면, 주자 앞에서 지구 상의 마지막 깡패가 되고자 하고, 그것의 아틀란티쓰의 회전에 깊이 빠지게 되는 것이다. 영화가 처음에는, 정신의 회전으로 자기를 인식하나, 갈수록에, 한쪽에서는 잔혹한 범죄 연쇄 드라마를 찍고, 다른 한쪽에서는 야마하 빵이나 계속해서 개그 프로그램에 던져주는 일을 한다면, 그것이 중심을 갖고 맹렬히 회전하여서, 존재의 승급을 이루는 일을 과연 기약할 수 있겠는가? 처음부터 심해 어류였던 것이고, 우리는 끊임없이 그것에다 투표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투표하는가? 일본에 정치가 있는 것이 그 때문이고, 정치가 없는 것도 그 때문인 것이다. 일본에 친한파가 있는 것도 그 때문이고, 엑스 재팬, 그러니까 극우파가 있는 것도 그 때문인 것이다. 우리가 앙드레 가뇽의 음악에다 투표를 하고 나오면, 심해 어류들끼리 투표를 하여서, 피라미드 아래로 뭐 하나 제대로 서 있는 것이 없는 것들이나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실제로 그러하고, 그와 같은 초단파의 경계를 아는 이가 거의 없다 싶다. 우리가 필름을 디지털로 바꾸어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사람들이 나의 정신이, 그와 같은 필름이나 디지털의 권력에서 힘이 딸리는것으로 생각한다면, 결국에는 그들과 함께 심해 어류 누워있는 영원한 방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튀니지는 그것의 시지푸스의 신화, 그러니까 자폭과도 같다. 오 튀니지. 튀니지. 수샌나. 투루 미닝 오브 리비아. 모어던 월즈. 튀니지. 모로코. 알제리. 이디오피아. 탄자니아. 우리 말은 세계 정신사에 뭐 하나 딱히 튀는 것이 없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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