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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이야기

서양의 절망

by 마음대로다 2019. 7. 23.

서양의 절망 






나는 서양 사람 같다. 왜냐하면, 서양 사람들은 너무나 불쌍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예술은 자연이 아니고, 진공이다. 우리가 서양 예술을 보고, 예수와 별반 차이없는 경각심을, 거룩함을 느꼈던 것은,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들에게도 자연은 예술은, 자연일 때가 있다. 지금 서양 영화 장르 중에서, 애니메이션이 얼마나 피터지게 싸우는지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아주 짧은 자연이기 때문이다. 자연은 누울 수 있다. 자연은 아름답고, 자연은 행복하다. 자연은 사상이 아예 없진 않아서, 노장 사상 같고, 오랜만에 찾아온 아버지가 어린 아이들에게 삼겹살과 상추 그리고 쌈장을 준비하는 것과 같다. 우리에게 과학은 충격이었지만, 그래도 일제를 거치면서, 어마어마한 불사조의 능력을 과시하였다. 그렇게 북한이 화석과도 같다. 북한은 예술마저도 그와 같은 화석과 인공으로 창출시킬 것만 같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에, 기록되지 않는 고대로, 그나마 살아있던 세포까지도 화석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렇게 전쟁이 끝나고 난 뒤에, 해서는 안되는 길로만 총집결이 되어 있었다. 김일성과 김정일 이데올로기가 사라진 지금, 그들에게는 희망이 있는 것일까? 그들에게는 우리에게 충남 공주가 있듯이, 황해도 개성이 있는 것일까? 보통 동양학은 개성이 없기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개성은 우리 옛날 고려의 수도이기도 했다. 뭐 이런 식의 첨단 스텔스기가 있나 싶다. 생각하지 않으면, 땅에 묻히고, 생각을 하면, 그때부터 비로소 시작하는 것이지만, 다만 그렇지 않고, 시장에서 장을 보다가도, 그와 같은 기다리는 시간에는, 가게 아주머니에게 인사를 건네는 모더니즘적인 영화에서는, 그와 같은 개성을 돌아볼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개성이 없었다. 개성은 자기가 재산을 가지고 있다는 것 밖에 없었다. 지식은 어쩔 수 없이 공유되는 것이며, 잔잔한 축제와 비슷하다. 그리고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과 같은 음악적 단절이 아니라, 거의 모든 상도에 이르러, 봇짐 장수에게 매달린 짚신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개성을 생각함에 있어, 사람들이 독립에 매진하고, 그것의 음각에서도, 그것의 양각에서도, 조선을 식민 침투한 일제까지도, 저녁에 귀신에 시달리는 계기가 되었을 수 있는 것이다. 대게의 제국주의나 파시즘의 기생충들은, 익살이나 과장, 엉터리 논리의 자기 의식 같은 것으로나 머릿 고기 훈련을 한다. 그것이 처음에는 아픔의 표징이었으나, 그런 지옥과 같은 조건도 적응이 생긴다고, 그런 선문답과도 같은 방원이가, 여기에도 생기고, 저기에도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흡사, 개성 비슷하게 생기기도 했다. 존재는 단순하고, 나무와 집 그림자와 같으며, 사람들의 다정한 모습과도 같으나, 엉터리 선문답을 잘하면, 처음에는 개성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권력이나, 군사력, 제국주의적 식민 지배력은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 그들의 장점이자, 로컬리즘이 되는 것이다. 일본이 안타까운 것은, 다만 그것만 있지 않았다는 것에 있다. 그러나 갑자기 누군가 물귀신이 되고, 블루투스 같은, 사람들이 잠자리에 드는데, 너무나 음질이 좋다는 역설, 파르메니데스, 개인의 힘으로서는 그와 같은 억지 개성이 도무지 해볼 수가 없는 것인 것이다. 천년 동안, 그와 같은 세이코 시계를 살아왔다. 그러면서도, 천년 동안, 앞으로도 영원히 그와 같은 세이코 시계를 살아갈 것이다. 사회주의 계열의 담론이 모두 그칠 때, 남는 것은 하늘 바다의 일렁이는 눈물 같은 것 밖에 없다. 사람들은 은혜를 받고, 지성이 충일해지며, 감성은 물론, 사회성도 변화하는 것을 경험하곤 한다. 하지만, 그것은 실질형식으로서는, 식민지의 경험인 것이다. 은혜라는 것은, 적들이 죽기 전에 착해지는 울둘목과 같다는 것이다. 그것은 반도체와 같고, 그것은 모든 순서이며, 원인과 결과의 부단한 반복인 것이다. 처음에는 형제였으나, 가인의 지성과 감성은 남다른 데가 있어서, 아벨이 미웠던 것이다. 소년일 때는, 그와 같은 소년원에 가는 살인사건의 범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아버지가 된 다음에는, 로마군 장교가 된 다음에는, 예수님을 찾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 철학을 조금 아는 것일까? 로마식으로 변형된 것을. 그리고 그리스 신화가 조금은 제국주의적으로, 실제화된 것으로서, 경험된 것들이 많았던 것일까? 그래도 남는 것은, 인간의 견딜 수 없는 비참함과, 살아남은 사람들 마음 안에 존재하는 단순하신 하나님인 것이다. 하나님은 화석이 된다. 울산반구대 암각화 같은 것이 된다. 나치가 독일 예술을 화석으로 만들고, 이차대전을 치른 다음에, 독일 사람들이 그와 같은 화석으로서, 죽고자 하여 살았고, 살고자 하여 죽었던 것이다. 예술이 이런저런 부침을 당하면, 다시금 나치가 나오는 것일까? 그럴 때, 차라리 한국 사람들 편에 섰던 일본인들이 나은 것이다. 개성도 이제는 없다. 노벨상도 이제는 없다. 애니메이션도 이제는 없다. 일본식의 유럽도 이제는 없다. 중국에서 때리고, 한국에서 단절하면, 갑자기 일본 사람들이 독일어를 잘하고, 에펠탑, 프랑스어를 잘하고, 튀니지, 에스파냐어를 잘하게 되는 것인가? 메그뜨나루도. 영어는 어려워도, 탁신 총리처럼, 구텐 탁? 구텐 모르겐? 경음과 격음이 반드시 있어야 하고, 필요한 것이지만, 사람들의 기계적인 하나님과, 주의와 주장에 아무런 개성이 없는 사람이 배출되다 보면, 그것들이 더더욱 유난해진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사람들의 영혼은, 말 그대로, 어딘가를 뚫으면 그리로 쏟아져 들어가는 것에 불과하니까, 그와 같은 정치적 레토릭과 적당한 주자학, 영원한 성리학을 버무리면, 말 그대로 영원한 제국이 나올 수도 있는 것인 것이다. 열 번의 울둘목을 경험한 다음에, 조선땅에서 한 번의 울둘목이 있었던 것일 것이다. 맹렬한 구멍 의식이, 어떤 사냥개로서의 콜렉티브 언켠셔스니스가, 성공하면 정신으로서도 승리한 것이고, 실패하면 억울한 젊어니들의 우주론적 제의가 되는 것이다. 그것에서 깨닫는 것이 없다는 것이, 사회주의이고, 반드시 깨닫는 자가 있다는 것이 기독교인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제국주의, 사회주의 전쟁을 했던 것들이, 다들 기독교와 기독교 경전의 전쟁이었을 뿐인 것이다. 아름다운 프랑스말과, 영어를 두고, 동양과 전쟁을 하려하면, 당연히 러시아말이나 독일말과 같은 것으로 변하고 만다. 러시아는 직접 침략을 하였고, 독일은 영국과 전쟁을 하였다. 이태리말도, 고도로 신경을 쓰면, 괜찮은 어감을 갖게 된다. 어감은 영원한 것이고, 로맨틱한 것이다. 한 소년이 한국에서 유학하다가, 자기들 나라로 돌아갔는데, 오르페우스가 부는 피리 소리를 듣고는, 현균이 삼촌이냐고 했다 한다. 그렇게 죽은 소년과 소녀가, 죽음의 바이러스를 견디지 못하고, 사탄은 만나지도 않았는데, 산더미와 같아서, 소문이 나고, 그래서 겨우 우리나라 사람들이 출정한 것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다만 믿음이라고도 여겨졌다. 어감은 실제하는 것이 아니며, 형이상학이 아니고, 또한 삶의 목적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어감이 좋은 깡패나, 영화처럼, 사기꾼들이 얼마나 있을 수 있지 않은가? 그래도 디도서의 디도를 보면, 우리 어린 디도를 보면, 단지 남들 다 하는 고생을 참지 못한 것이 아니라, 지성과 감성이 있어서, 죽음을 택한 것일 수 있는 것이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면, 언덕은 쉽게 올라간다. 삼촌이 이야기를 하면, 그렇게 재밌고, 끝이 아름답고, 올해는 여기까지 야생화가 피었으니, 다음에는 저 언덕까지 가득할 것이라는 것을 예상케 한다. 그러나 자기들 나라 사람들은, 전쟁 뿐이고, 돼지 뿐이고, 돼지 고기는 먹어도 되는가? 개고기는 먹어도 되는가? 하는 논쟁 뿐이다. 정신이 맑을 때는 괜찮으나, 아프고, 의식이 흐릴 때는, 그와 같은 무분별이 정말이지 아찔한 것이다. 사람이 육년을 공부할 수 있다면, 나머지 삼사십년을 사탄이 되느냐 마느냐 하는 것으로 고민할 수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은 불쌍함이 없고, 그와 같은 단순함이 없다. 지리나, 역사, 이런저런 위인들이 서양에는 가득하나, 예수님은 말씀으로서 홀로 계시고, 그들은 맨 처음이 항상 불분명한, 침대와 과학으로서의 베드로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전쟁을 위한 것이었던 것이다. 전쟁을 하는데, 양심이 고래의 심장처럼 크고 거대하면, 어찌 가능하겠는가? 양심을 어느 정도는 팔아먹을 줄 알아야만, 지략이 생기고, 모략이 생기고, 기묘가 생기고, 모사가 생기는 것이 아닌가? 사병들의 삶은 퀘이커 교도나, 야바위와 같고, 계급적 위계라는 것은 관념과도 같아서, 결국에는 전쟁과 평화의 기간에서, 장교가 되는 것이 전부가 아니겠는가? 어느 누가, 사도 바울의 편지를 읽고, 다 읽고, 세바스찬 바하의 음악을 들으며, 독일의 영원한 총리와 같은 프리드리히 헤겔의 철학을 공부하겠는가? 공부해서, 전쟁할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가 식민지 침탈을 당하고, 육이오 전쟁을 치러야 했던 것은, 다만 헤겔과 맑스 때문이었을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디도에게 아버지와 같고, 삼촌과 같은 말만 하여도, 그들은 도무지 전쟁을 준비할 수가 없는 것이다. 미얀마 바간의 성지에서, 아름답게 피어오르는 열기구들을 보면, 그렇게 아름답고 그렇다. 헤겔도 있지만, 버지니아 울프도 있고 그렇다. 바이런의 유명한 표현처럼, 공부를 그렇게 많이 했는데, 결국에는 전쟁 뿐이고, 더 나아가 사탄이 되는 것 밖에 남은 것이 없더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