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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이야기

지정생존자라는 드라마가 보여주는 건축이야기

by 마음대로다 2019. 7. 30.


지정생존자라는 드라마가 보여주는 건축이야기 





그렇게 댓글자들이 시발점이 되어준다. 그렇게 반한운동이라는 것이 그들과 하나가 되었다가, 반일운동이라는 것이 멀쩡한 사람들까지도 댓글자들과 하나가 되게 하는 것 같다. 댓글자들은 누구일까? 댓글자들에게 실명을 쓰게 한 적이 있다고 하면, 지금 청소년들은 믿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댓글자들이 그냥 약소국가나, 섭정, 친정, 피씨방, 휴대폰, 그런 것들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들을 모두 모아놓고, 특징들을 보면, 매우 의지가 있는 어떤 것들이 그려지는 것이다. 앙코르와트가 그려진다면, 그것은 이상한 것이다. 다만 파고들어가서, 지내는 어떤 것들이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은 댓글들과의 파행은, 사요나라는, 헤어짐은, 마치 헤이즐넛 향기의 원두커피처럼, 여간 안타까운 것이 아닌 것이다. 상대가 예쁘지 않을 수도 있다. 처음에는 예쁠 수도 있고, 지금도 가꾸면 예쁠 수도 있다. 옷이 날개라고 하지 않는가? 그리고 연결되는 것이야, 드라마들이 연결되고, 영화들과 연결되어 사탄의 대리자가 되는 것은 제법 오래된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한다면, 댓글들이 그와 같은 사탄의 발성기가 되는 것이 무슨 대수이겠는가? 연결은 여자들이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사탄을 여자들로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오류의 법칙이며, 그것이 실낙원의 문처럼, 아내의 음, 그러니까 처음이라는 것이 늘 고통스러운 것이다. 사탄이 그와 같은 자원과 보고를 그냥 놔둘리가 없다. 사람들이 학교를 다니다가, 직장에서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그와 같은 학교의 기쁨을 잃어버리는 것은 스티브 잡스 애플사처럼 당연한 것이다. 스티브 잡스가 갤럭시를 싫어했다지 않는가? 그냥 코메디 프로그램이었나? 엎질러진 물이 그렇게 고통스러운 것이다. 우리가 국어 수업을 마치고, 아무리 영랑영랑한 시일지라도, 이렇게 선을 긋고, 저렇게 동글뱅이치고, 이렇게 시험 예상 항목들을 듣고 배우면, 시는 시대로 아름답고, 우리들의 언어능력도 배가가 되어서, 다음 음악 수업이 있던 곳으로 달려갈 수 있었던 것이다. 선생님이 오분 늦게 와서 우리들을 배신한다. 누군가 그랬다. 베뉴가 이렇게 제법무아인데, 스토닉은 어떻게 할 것이냐고. 스토닉을 타고 다니는 사람은, 영화관람권이라도 열 장 줘야되지 않느냐고. 사람들은 베뉴처럼 있다가, 스토닉처럼 된다. 사람들은 고전주의나 낭만주의는 배울 수 있어도, 봄의 제전이나 원시 사회 같은 것은 따로 배우지 않는다. 점점 더 그것을 알아가게 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지정생존자에 있다. 우리가 댓글자들과 헤어지게 되는 순간, 명청교체기, 혹은 청명교체기의 아이디어를 하나라도 놓지지 않고 싶은, 북경대, 칭화대 교수, 삼상명, 은이걸. 집을 한옥 목재 인테리어로 아름답게 가꾸면, 아버지가 책을 읽고, 어머니가 음악을 들으며, 아이들이 좀더 본질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시간 몇 시간. 그렇게 훌륭한 집안이라면, 드라마처럼 오십일은 될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다. 연락도 없이 지내다가, 상을 치르고 났더니, 생각지도 않는 세후 일억의 유산이 주어진 것이다. 그래서 제일 좋은 모델을 택해서, 인테리어를 바꾸게 된 것이다. 그랬는데, 보통의 사람들은 일주일을 간다. 그리고 원래대로, 티비에 빠지고, 인터넷에 빠지며, 다시금 입시위주의 찍기 시험 공부에 매진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가끔은, 비오는 날 같은 경우에는, 아버지가 살아서 집을 찾아오는 것 같은 착각도 드는 것이다. 우리들의 댓글들이 그랬다. 처음 댓글들은 영미국가의 것들처럼 사납지가 않았다. 아직은 한국말을 익히는 외국인들이 많지 않았기도 했다. 정말 댓글들 같았고, 욕도, 비난도, 개인적인 느낌이 있었지, 사탄의 배치를 받는 것 같지 않았다. 지금도 영국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을 것이다. 무조건 댓글들을 보던 때도 있었다. 기사들이 양에 차지 않거나, 나의 정치적 입장과 달랐을 때는, 나의 입장과 같은 댓글들을 찾아 위로를 받기도 했었다. 그러나 무한도전이 오랫동안 방영되던 시간 그대로, 외국 사람들이 한국어를 익힌 것 같은 것이다. 선진도 싫지만, 후진도 아닌 무한도전의 이런저런 야부리까는 기술들이 그만 사탄들에게 훈련이 되고 만 것이다. 처음에는 무한도전도, 헤이즐넛 향기처럼, 그렇게 체력적이고 선진적이었었다. 하지만 티비 시간이라는 것이 그처럼, 가족적인 고기 세포의 것이 되어도 좋을 만큼, 얍삽하거나,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닌 것이다. 문을 열면, 우리가 위로를 얻고, 문을 열면, 처세의 뉘앙스를 훈련받았던 것이다. 그들도 그 사실을 나중에야 들었을 것이다. 어째서 우리가 죽자사자 문학을 하겠는가? 그와 같은 것이, 조금 느리긴 하여도, 순기능만 한다면야. 느리게 가다가, 알 수 없는 연막을 보고, 이게 죽음인가 싶어서, 모나리자 같은 웃음을 지어보려는데, 사탄이 사람을 쳐먹고 있고, 그걸 보고 지옥의 한 부분인 것을 알게 되면 얼마나 식은땀이 나겠는가? 



우리들의 편안한 말과 글은, 서로 연결이 되어서, 하늘의 피라미드가 되는 것이 아닌가? 연결이 되어서, 지옥의 피라미드가 되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