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에 관하여
사람들이 자국의 무능한 왕을 두고, 죽기까지 해를 보내는 것에서부터 처음 벗어난 것은, 아무래도 근대적인 사태일 것이다. 뉴욕은 지옥과 같았고, 사람이 보이는 것에 강하기도 하지만, 약한 것이 사실이어서, 미국이 우리나라를 침략한다 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주 빙하였을 것이다. 신문이라는 것은, 그 모든 높이와 관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축약하여, 한 사람을 높이는 기능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신문에서 벗어나면, 사람은 늘 언제나 통곡의 벽처럼, 그곳에서 사람이 죽어야만, 시니피에가 발진하는 것 같다는 원시인들의 형이상학에서 벗어나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풍경이라는 것으로 글을 썼지만, 공교롭게도 보편적이 되고 말이다. 왕이란 이름은 그 자체가, 무녕, 그러니까 무능하다는 것이다. 광개토대왕은 이름이 지옥의 사자 같다. 업적이 있어서, 우리에게는 개가 불을 뿜는 인상을 가지지 못하는 것이지, 한자도 알아서, 시골 할아버지가 소와 함께 쟁기질을 깊게 하는 것을 연상하지, 한자도 모르고, 시골 할아버지도 모르면, 어느 외국인이 만든 가습기처럼, 새 마리의 개가 불을 뿜는 것 같은 인상을 주는 것이다. 그것을 새로이 발견할 수 있다. 국사라는 것이 그렇다. 대무신왕. 그런 것을 좋아라 한다. 소수림왕이나 장수왕 정도로 와야지, 겨우 그와 같은 믿거나 말거나와 같은 고대 연개소문에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미국은 왕이 있었던 것일까? 그래서 미국은 처음부터 두려움이 있었다. 우리가 두려울 때 어떻게 하는가? 완전히 얼어버릴 때가 있고, 작은 용기가 있다면 그것을 모아서 보다 가열차게 운동하지 않는가? 미국은 프론티어니즘, 프래그머티즘, 고 웨스트 그런 운동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무엇으로부터 피해 그리로 날아갔는지, 아니면 정복하기 위해서 마침내 태평양을 보았는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남북전쟁도 레토릭으로 해석이 되는 것이 여간 고통스러운 것이 아닌 것이다. 결국은 구시대적인 봉건 노예제로부터, 근대 자유 민주주의로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서, 고통스러운 자기 반복을 하였던 것인 것이다.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다. 북한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가 있고, 심지어는 조선이라는 이름도 이어받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그냥 학도병 같았다. 지금까지 그렇고, 과거에는 더더욱 그랬다. 잘 모르고는, 북한을 지지하는 발언도 곧잘 한다. 지지하지 않을 수는 있어도, 지지할 필요는 없으나, 생각이 짧고, 오래지 않으며, 무엇을 읽어야 할 지 모르고, 이것저것 다 읽고, 그래서 단호함의 틀이 생기지 않고, 남자는 그나마 군대를 다녀오나, 여자를 기준으로 하면 입학하자마자 졸업하게 되는 것이다. 여자는 그리고 운동에서부터, 몸과 마음이 멀리 있는 것이다. 도대체 육이오 이후에 어떤 장군이 있었던 것일까? 신현균 육성장군이 나타나기는 했으나, 가난하여서, 몇 년 후에는 캐나다로 취업이민을 가고자 한다고 한다. 만나는 사람마다 그렇게 말하니, 듣는 사람은 없던 힘이 더더욱 빠지고 마는 것이다. 그것은 작전이다. 내용이 분명한 작전이 아니라, 거기까지 가야, 우리나라가 보다 강해진다는 뜻이다. 정말이지 우리나라의 사상적인 특징이 드러나서, 대단한 이념가와 함께, 책까지도 하늘의 다리 같은 것이 몇 권, 고질라나 기라성 같이 나타났다면, 북한도 또한 멍청한 동상들을 거두고, 좀더 시니피에나 피앙 같은 것들을 노력하였을 것인가? 아니면, 북한이 아무런 학습 능력을 가지지 못하고, 자연붕괴의 길을 뚜렷하게 걸어간 나머지, 우리나라에도 그만한 문화사상가가 나타나지 못한 것일까? 그래서 일본이 지금까지 경제적으로는 발전하였으나, 이념적으로는 퓨얼컷을 당한 것일까? 영화는 확실히 민주주의의 피를 빨아먹고 자라는 것 같다. 민주주의가 그랬다는데, 그것은 부정확하고, 영화가 그런 것 같다. 그래야 조건이 맞고, 구조가 드러난다. 엉터리 영화들 사이로, 필요한 프래그머티즘, 누군가의 피를 빨아먹은 것 같은 영화를 보고, 홍콩 사람들은, 그리고 홍콩 영화를 좋아했던 사람들은 그만 운명을 보았던 것이다. 운명은 문화인가? 운명은 문학인가? 그것이 핵심이다. 어떻게 이념과 이론과 학습은 자연붕괴의 길을 가고, 영화는 그렇지 못한 영혼만이 모여서, 겨우 피를 빨아먹은 것 같은 운명을 사람들과 공유하면서 지속하고 지탱되는 것일까? 영화를 만들지 못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그것의 국민성, 그것의 계급성, 그것의 이웃국가성, 그것들을 바라보면서, 신현균 장군의 피를 빨아먹은 느낌을 가지니까, 그의 지금까지 죽지 않음의 이력이, 사람들에게 반도체 처리가 되는 것일까? 만일 사탄까지 보인다고 한다면, 그것은 의도된 장치인 것일까? 아니면 우연한 효과인 것일까? 미국이 제일국가가 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은행을 지으면 은행가가 나오고, 은행이 일을 하면, 신문사가 나온다. 그것은 능동적인 것이기도 하고, 피동적이기도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사랑을 하면, 사랑가가 귀에 쏙 들어오고, 로맨틱 코메디 영화를 만들면, 여간 못 만든 것이 아닌 이상,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는다. 미국도 한국 사람들처럼, 돈을 모아서, 프랑스 파리 여행을 가는 것으로, 생의 기쁨의 절정을 향유하는, 난장이들이 될 공산이 있었고, 그것의 형식은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미국은 자연이 기괴하다. 그리고 국가가 생겼다고 해서, 그것들끼리 연합할 수 있다는 것은 꿈에 불과하다. 유럽에서 전쟁을 했으니, 미국이 분열하여, 이제는 미국에서 전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일본이 미국을 쳐서, 얻어보고자 한 것은, 일본과 연합하는 지역이 있느냐 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최소한 분당의 기미가 있느냐 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너무 인종주의적인 생각이 없는 것 같으나, 사탄은 원래 피부색이 없어서, 생각이 우리 인간들처럼 자연스러운 데가 없는 것이 있다. 그러나 유럽의 문명이 사탄의 생각과는 다르게, 매우 훌륭하여서, 그것의 시니피에가 너무나 아름답게 진행하였던 것이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자유의 여신상보다 높은 빌딩은 짓지 않기로 하자, 그런 말을 할 것 같았으나, 애초에 그런 생각이 없었던 것처럼, 하늘 높이 스카이 파르페를 지었고, 뉴욕이라고 이름을 가지고 있으니, 사탄들이 어떻게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몇 개의 글로벌한 대도시를 제외하고, 백만도 되지 않는 유명도시가 여기저기 있는 것이다. 조금은 위태롭게도 보인다. 사탄은 여기저기에서 그들의 세력을 확장해갔다. 온갖 이상한 사라사태들은 전부, 사탄이 관여한 것이다. 그러나 사탄이라는 이름을 어떠한 언론에서도, 기자에서도, 관훈클럽에서도, 언급할 수가 없는 것이다. 언터쳐블이라는 것도, 다만 밀주를 만들어 돈과 권력을 쥐었던 깡패에게 붙여졌던 수식어였던 것이다. 사탄이 언터쳐블이 아닌가? 달나라에 갔다가, 사람들이 차갑게 마음이 식어졌던 것도, 가옥이 부서지고, 사람들이 죽은 것처럼 누워있고, 먹을 것이 있는지 돌아다니는 준 좀비 상태의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던 것이다. 차출되어 훈련받고, 달나라에 가면, 거기서 신비한 암석을 채취하면, 한국 친구가 방문하여 선물로 주고간 백설기 떡이, 은박지에 싸여, 말라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과 백퍼센트 모습이 일치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만두었던 것이다. 우주라는 것은, 결국, 사탄의 점막과도 같다. 사람들은 내성이 있고, 노출이 아직 되지 않았고, 워낙에 주자학적 훈련이 뛰어나서, 마치 사랑하는 사람에게 말 못하는 것처럼, 도무지 확고하게 사탄을 언급하지를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디스커버리 호가 발사되어 하늘로 오르다가 폭발하고 만 것이다. 사탄은 너무 많고, 그래서 미국 사람들은 문학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문학을 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것을 알아보고는, 미국을 가리켜, 미국이라고 이름붙였던 것일 것이다. 그 단 하나의 이름때문에, 미국은 힘을 얻었던 것일 것이다. 미국도 열차가 아주 유명하다. 그것은 제일 재밌던지, 아니면 별 재미가 없던지 하는 것이다. 익스프레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이 확고부동하게, 미국이라고 해주니, 또다시 포켓볼 안으로 사람들이 들어가 돌아오지 않아도, 사각형 반듯하지 않는데, 원망하는 마음이 사라졌던 것이다. 유럽의 문명이 아름답다는 증거는, 높고 훌륭하다는 증거는, 미국이 태평양에 이르도록 제출되었던 것이다. 여자가 아름답게 가꾸고는, 책을 벨린다의 화장대에서처럼, 읽지 못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남자도 여자들처럼, 게임을 한다. 그러니까 남자들이 열중하여 게임을 하는 것처럼, 여자들은 화장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책을 못 읽지 않겠는가? 사탄은 그 틈바구니로 들어온다. 우리는 슬리브즈를 가질 수 밖에 없다. 영국 민요도, 민중들은 책을 못 읽지만, 사탄은 들어오지 못하기를 하는, 그런 기도하는 마음인 것이다. 게임을 많이 하는데, 사탄이 들어온다. 화장과 패션에, 가방과 구두에 열중인데, 사탄이 들어온다. 남자와 여자가, 찢어진 우산을 하나 들고, 열심히 뛰어가는 것이다. 둘은 서로가 누군지 모른다. 사탄은 우주 같고, 사탄은 슬리브즈 같으며, 사탄은 피라냐 같다. 그래서 마침내 헐리웃 영화가 영화와 인간의 마지막을 우리에게 보여준 것인 것이다.
일본과 전쟁을 하였다고 해서, 일본을 아는 것도 아니고, 한국이 자기들을 뷰티풀 스테이트라고 부른다고 해서, 한국에 대해서 일거수일투족을 아는 것이 아닌 것이다. 어려서부터 배울 것이 너무 많았고, 그것을 하고 나면, 저녁에 아무 것도 하기가 싫었다. 건물들은 습물들과는 달라서, 사람들을 천국으로 이끈다. 건물들을 높게 잘 짓고, 아름답게 조경하여, 도시가 전체적으로 우람하면, 사람들도 반드시 그와 같은 도시를 닮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미국을 좋아하고, 돈만 있으면, 반드시 미국에 가서 공부를 하고 싶은 것은, 나는 공부까지 할 수 있으니까, 그와 같은 도시가 갖는 선험적인 데이티가 어마어마하기 때문인 것이다. 대신에 자세히 보면, 매우 많은 부분 아티피셜한 것이 발견된다. 그리고 도시만 벗어나면, 고속도로만 질주하면, 엄밀히 말해, 우리나라 중부고속도로와 비슷한 것이다. 사탄은 끊임없이 숱한 점막과 통신을 통해서, 리크루트, 그런 표현들이 발달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신입사원을 영입하려고 한다. 그러나 자연적인 흐름이 모두 끝이 나고, 자기를 매우 문선명하게 사탄으로 메니페스토를 하려고 하면, 기억들이 이상한 것이고, 로맨틱 코메디가 아직까지도 재밌는 것이다. 사탄이 애덜트한 것이고, 단지 굿한 것은 한국적인 것인가? 미국의 애니메이션이 훌륭한 것은, 실사 애니메이션들도 훌륭한 것은, 누군가 그렇게 우리들을 향해 모종의 애덜트후드를 선언하게끔 종용하기 때문인 것이다. 다시금 미국이 제일국가였던 때의 노래들이 있다. 아직도 로멘틱 코메디가 좋고, 프레데터처럼, 제임스 라스트, 사탄과 싸우는 영웅들이 좋은 것이다. 사탄이 되지 않고, 아직은 망설여지고, 거의 모든 사탄과 싸운 영웅들이 도리어 사탄이 되고, 로멘틱 코미디가 질이 떨어지고, 편의점의 시커먼 튀김 기름이 되고, 흘러간 팝송들은 빵구난 구멍으로 들어오자 마자 나갈 때, 너무 많이 들어서, 그럴 때 몇 개 안 되는 한국의 명곡들이 마치 시카고나 필라델피아, 샌프란시스코처럼 보이는 것이다. 자기들에게는 할리 데이비슨이 있으나, 더 이상 가기를 멈출 때, 케이알 모터스의 미라쥬가 보이는 것이다. 팀이 내게 그랬다. 힘도 좋고, 작고 아담해서, 풀 숲에서도 돌아다닐 수 있었다고. 모습이 사라지고 있었는데, 자기들도 공부하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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