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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이야기

옛날에

by 마음대로다 2020. 3. 21.

옛날에

 

 

 

 



 

동서가 속 시원히 붙었던 적이 있었다. 중국과 일본까지 한국이 확대된 것이, 그 즈음이었을 것이다. 인도유러피언이나 아프리칸들을 보면, 서로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전쟁이 발발하고, 무수하게 인구수를 확보하고, 백구징포, 그렇게 해서 사람 별로 없던 한반도에까지, 일본 열도에까지, 극동인들이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전쟁은 그렇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가 졌던 것일까? 오직 추측 뿐인가? 이현세의 남발. 오직 추측 뿐인가? 모더니즘 드라마가 기차를 타고 달릴 때, 여자 친구는 얼굴이 예쁜 듯도 하고, 요가에 관심이 많고, 읽는 책들도 고전과 상관이 없지만, 옷이 조금 짧아, 옆구리가 살짝 드러나 있는 것이다. 함께 기차를 탈 때, 그것이 보였고, 그것은 에피퍼니, 보이는 모든 것에 축복을, 그와 같은 문학 기법에 어울리는 것이었다. 오직 추측 뿐인 것이다. 그것은 성경에도 나온다. 도마는 알 길이 없었다. 그래서 추측하였고, 동양 사람들은 그것을 가리켜, 추측무후라고 하였던 것이다. 멀리 여행을 다녀온다면, 함께 여행 프로그램이라도 찍는다면, 서로 했는지, 동사원형, 안 했는지, 그것의 안정감, 알 수가 없지 않겠는가? 우리가 안다는 것은 그렇게 무수한 추측들의 피라미드를 지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소련과 서방 유럽이 대립할 때, 우리가 그것을 동서냉전이라고 불렀다. 일본과 미국이 서로 대립할 때, 대립군, 전후에는 그랬던 적이 없어서, 냉전도 없었고, 온전도 없었다. 우리들의 독립운동사는, 동서냉전을, 동도서기를, 그렇게 규명할 수가 없다. 중국과, 일본이, 한국 본연의 독립성에 늘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쑨원이던지, 손기정이던지, 늘 배반자 같은 이광수의 무정을 보면, 이광수는 정말 동학농민운동을 한 것 같고, 전주에서 부산까지 한달음에 달린 것도 같은 것이다. 사회적 운동의 더스트로, 스포츠 스타의 근대적 영웅으로, 그 사람들이 그쳤다면, 이광수가 처음으로 쿠푸왕의 피라미드 내부에까지 탐험한 것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피라미드의 실루엣만 보아도, 감동할 수 있다. 우리가, 정말이지 우리가, 노래 가사의 시작 부분처럼, 우리는, 정말이지 피라미드의 저녁만 보아도, 눈가에 이슬람이 맺히고, 그 돌들을 모두 셀 수가 없고, 하나로 보이는 감동에 젖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라는 것은 서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란, 앉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란, 어딘가를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많은 왕들의 이름들이 있다가, 나중에는 사람으로 되었던 것은, 그들이 실제로 존재했고, 얼마나 고통의 나날을 지냈는지를 증명하는 것이 될 것이다. 우리는 감히, 우리들의 독립운동사를, 일본을 무시하고, 동서냉전으로, 규명할 수가 없다. 피비린내 나는 민주주의 학교를 지나, 일본이 소니를 비롯한, 경제의 사령탑으로만 그치게 되었던 것을, 딱 그 정도의 무게로만 만드는 능력을 가질 수가 없다. 너무 스포츠의 한일전을 좋아해서 그랬을 수도 있다. 한일전만 하다 보면, 목욕탕에서 두 시간을 지내고, 없던 때도, 두 시간 이후의 때까지도 미리, 어떤 프로그램적 착시의 효과 사이로, 뽑아내어, 씻고는, 돌아오는 느낌을 가졌던 것이다. 우리는, 부족하였고, 우리는 민족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우리는 부족하였다. 우리는 민족주의의 늪에 빠졌고, 우리는 여름날에 미역을 감다가, 수영 천재의 새벽 물놀이를 보다가, 갑작스런 지역적인 기상 이변으로 살얼음이 얼고, 그것들이 매우 얇아도, 그것들이 깨지지 않는 현상을, 마치 율리시스의 시선 오에스티처럼, 경험한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솔직하고, 누구도 두둔하지 않고, 우리가 가난하니, 우리들 편을 들면, 그 자신이 보편적이 되는 것의 도로를 지났으나, 우리가 곧 부자가 될 것인데, 그 때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에는 아무런 답을 준비하지 못했던 것이다. 동서냉전은, 이제 선명해졌다. 성경이 기성 목사들을 지나, 평범한 독자들에게까지 선명해졌기 때문이다. 어째서 부족한 교재를 사용하는가? 어째서 그리스는 가난하는가? 어째서 독일은 가난하는가? 어째서 프랑스는 가난하는가? 어째서 유대인들은 구약만을 신봉하는가? 우리가 어려서 성경을 읽고, 우리가 어려서 그리스 철학을 배우고, 홍길동전도 배우고, 아이들에게 피곤한지, 혹은 계속 공부할 만 한지, 묻고, 할 수 있다 하면, 독일 철학도, 나를 등용시켜서, 전국민 강의를 한다면, 프랑스 철학도 신청하면, 통장에 현금이 들어온 것을 확인하고, 환하게 웃는 자본주의적 그런 것으로, 강의를 시작한다면, 국민들은 똑똑해지지 않겠는가? 그런 피라미드. 확고부동한. 쿠푸왕의 피라미드. 헤겔에서부터 자신이 없고, 프랑스 철학은 겉멋만 들 수 있으며, 영문학은 이상하게도 야만적인 데가 있다. 그나마 기성 목사들이 성경을 낮이건 밤이건 가르친 것이, 우리들의 문학적 능력의 전부를 만든 것일 수 있다. 그것에 대한 불만이, 처음으로 나를 통해서, 성공적으로 빠져나오고, 그 옛날의 여의도 활주로에 안착한 것일 수 있는 것이다. 처음에 서양이 몇 명 없는 한국에 도전했을 때는, 우리에게 처음 졌을 것이고, 돌아가는 길에 진 것이니만큼, 크게 신경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 갇힌, 그들은 이미 세계를 돌았으니까, 사자에게 쳐들어간다는 일종의 종교적 의례처럼 선단을 구성하였을 것이다. 대게의 사탄의 세계관은, 일종의 적을 상정하여서, 자기들의 분위기를 일신시키는 것을 부단히 반복하는 것으로 이뤄져 있다. 그리고 신족과 같은 스파르탄들도 필요했던 것이다. 그들의 패배가, 그들에게 인지가 되지 않았던 것이, 우리에게는 무척 다행한 일이었을 것이다. 우리끼리의 시기와 반목, 대립과 분쟁, 그리고 좋아하는 마음만으로 세상을 서로 하직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 거대한 사이렌이 울리고, 화백회의가 열리고, 지금 우리에게 인구수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믿음의 조상이 있어서, 건강한 한 여자에게서 스무 명의 아이가 태어나게 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서로 싸우지 않고, 북한과 남한이 싸우지 않고, 일본과 서로 침략하지 않고, 방화하지 않고, 격려하고, 서로의 장점을 알아주고, 그것으로 반드시 결과물을 찾는, 새로운 인문학적 분위기를, 전 사회에 걸쳐 만들어갔다면, 삼국지의 분위기 그대로, 저기 먼 지역, 남경이나, 장안에까지, 지금의 티벳에까지, 사람들이 먼저의 사람들과 들어가 찼을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쟁을 한다면서, 오층 높이의 기가 막힌 목선을 끌고 와서, 적들도 우리에게 했던 것도 사탄의 전도였던 것이기 때문에, 도리어 속도를 내는 우리에게 시간이 부족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지역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동남아 사람들이 수더분하고, 중국 사람들이 무례한 것도 다 근거가 있는 것이다. 고대의 장치는, 반드시 나중에 정리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자연이 우리에게, 우리의 나이에 걸쳐, 부단히 침략하는 것과 그들이 무슨 차이일까 싶을 것이다. 자연이 우리에게 빔을 쏘고, 어느 날은 구름으로 덮치고, 어느 날은 바람을, 어느 날은 정신나간 사람들을, 어느 날은 좀비 영화를, 어느 날은 셰익스피어 연극들을 내보내지 않는가? 우리는 어느 날은 독감에 걸리고, 어느 날은 건강했다가, 어느 날은 시상에 빠지기도 하고, 영화도 만들면서 지내는 것이다. 중경삼림이라는 영화가, 오독이라고 하기에는, 우리가 중경이라는 내륙 도시를 좋아하는 것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 것이다. 그것의 설정이, 기가 막힌 것이다. 홍콩은 메인 디쉬이고, 중경은 사이드나 디저트가 되는 것이다. 내가 음악을 듣다가, 나를 만나면서 점점 가슴이 커지는 여자에게 그것을 들려주면, 항상 아직도 우리에게 문제적인, 오직 서양의 아름다운 클래식 음악들인 것이다. 나는 항상 그런 식이었다. 항상 영문학적이었고, 항상 클래식 음악을 슈퍼맨처럼 입고 날고 다녔었다. 일부로 그런 것일까? 어떤 심각한 전기가 있어서. 아니면 원래,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랬던 것일까? 한국말로 음을 띄워, 말을 하고, 주장을 하려면, 하나의 앤티크 라디오처럼, 서로 주파수가 잘 맞아서. 여자라고 요가책만 보고 싶겠는가? 테크노는 나도 좋아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더욱 사람을 낚는 어부처럼, 얼굴은 얌전한데, 분위기는 영락없이 베드로 같은 것이다. 나는 오층 높이의 목선이 불타오르는 것을 보았다. 다섯 개의 것이 불타자, 동지나해의 바다가, 밤바다가, 아주 환하였다. 그리고 나머지의 배들이 내게 오는 것을 보았다. 어째서 함께 오지 않는 것인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그와 같은 것으로 열 번을 치렀다. 우리가 백만이 있으면, 그들에게는 천만이 있었다. 우리에게 일만이 있으면, 그들에게는 백만이 있었다. 치장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배가 고파도 먹지 않고, 그렇게 뭐든 태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마음에 병이 있는 것처럼, 원래는 배를 태우고, 그것의 힘으로써 공격하는 느낌이었던 것 같다. 불화살처럼. 그러나 오다 말았고, 우리가 텔라파씨로 그들을 공격하여, 자기들의 전우가 죽었다고 말을 주고받는 것이었다. 지옥은 공격성이 없거나, 적극성, 영화적인 의지가 없으면, 쉽게 열리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나는 그때 지옥을 추측하였던 것이다. 판타지가 셀 수 없었고, 멜로드라마도 있었다. 적함에는 우리와는 다르게, 여자들도 많았다. 자주 해전이 일어난 것은, 처음에 우리가 적들의 숫자를 해보지 못해서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자주 우리가 승리하자, 해전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아무도 그들의 사탄의 제의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적들에 편에 서는 사람들이, 우리 지역에서는 사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믿기지 않는 일이, 백년 이내에, 그러니까 아주 최근에 발생한 것이 아닌가......

 

지옥의 뚜껑이 열리고, 그것이 폭로되려 하자, 이차대전 이후에도 전쟁이 자주 발발하였다. 그들이 돈을 보태고 무기를 쓰면, 전쟁의 처녀국가에서는 그것이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동시에, 근대의 의식에서, 전쟁이라는 무한수가 처음으로 기록되는 일을 전 세계가 경험하게 되었다. 서양은 아직도 입장이 불분명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을, 예언이라고도 하고, 대언이라고도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나 어렵고, 때로는 코메디 같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니까. 그러나 사탄의 대언은 쉽고, 인터콘티넨탈, 배우지 못하고, 완장을 차면, 사흘이면 그와 같은 말을 모두 뗀다고 누군가 그랬었다. 우리는 어떤 사각형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라디오 영화음악실이 사라지고 난 다음에는, 그것의 하강을 집단적으로 경험하게 된 듯 하다.

 


여행은 영화와 같다. 여행은 지식의 하강을 뜻한다. 가이드가 많은 말을 해주면

 

예수님이 나의 손을 잡아주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