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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이야기

영어 성경이라는 희한한 시공간

by 마음대로다 2020. 4. 1.

영어 성경이라는 희한한 시공간

 

 

 

 

 

성경을 읽고, 사람들이 괴물로 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 것인가? 사람이, 옆에 사람들이 많이 괴롭히면, 매에는 장사가 없다는 말처럼, 인성이 변하고, 조인성, 사납게 변할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그렇게, 성경에도 들어맞는 말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얼마든지 통독할 수 있다. 그것은 독일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고, 뜻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과정으로는 뜻하고, 실재로는 뜻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어찌 우리가 과정을 무시하겠는가? 우리가 성경을 읽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어려워서가 아닌가? 그리고 우리들의 성정과 맞지 않아서가 아닌가? 우리가 성경을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느 정도 우리의 뜻에 맞게, 우리가 읽고 싶은 만큼만, 읽을 수 있고, 해석할 수 있어서일 것이다. 성경을 읽고는, 금방 평범한 정치인 이야기하고, 마음 착한 철이 이야기하고, 노동자, 건설자, 그리고 병원 이야기하기 좋아서일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을 모아서, 어떻게 선이 되지 않는가? 우리 인간들을 모두 모으면, 선이 되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사는 도시들을 모두 모으면, 가장 먼저 선이 되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전쟁을 겪은 다음에, 우리는 선이 되었다. 우리는 슬펐고, 그렇게 하나님의 라디오가 듣기 좋았었다. 그때도 통독은 조금 어려웠다. 통독은 천구백구십년대에나 이뤄졌던 것이다. 성경은 조선시대에는 통독이 이뤄지지 않았었다. 언급조차 없었다. 통독은 우리가, 어머니들이 먼저, 집에서 라디오를 갖고, 가장 먼저 달성된 것처럼 보인다. 신학생이 읽는다고 할 때, 그것은 자기 목소리일 때가 많았고, 그와 같은 보이지 않는 자기 목소리로 인해서, 알고도 지나가고, 모르고도 지나가는 것들이 많았었다. 그리고 항상 우리는 성경을 인용하고, 목사님들이 자기 이야기하고, 미국 이야기하고, 위인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것이 삼국사기 열전 할 때, 사기 열전 할 때, 그와 같은 위인들과 어떻게 나란하는지는 우리가 아는 바가 없다. 우리가 영화를 좋아하는 것은, 그것이 신성해서인 것이다. 우리가 과거의 영화를 좋아하는 것은, 어쩌면 죽은 사람들 같았기 때문인 것이다. 돌아가는 삼각지라는 영화를 보면, 문희가 나온다. 그리고 이런저런 사람들이 나온다. 배경은 주로 어둡고, 철봉이 겨우 달린 육교도 나온다. 그것이 과거에는 어째서 재밌었을까? 우리가 어째서, 돈을 주고, 그것을, 그와 같은 인물들을, 실재로도 올려보았을까? 우리는 인격을 달성하지 못하고, 죽는다. 일본말로 하면 신학대학교인 것이다. 그것의 정자 같은 것. 우리는 그냥, 가고 오고, 나고 들고, 찍고, 좋아하고, 떠들고, 수다 떨고, 미야자키 하야오, 영화 보고, 목적하는 여행처럼 아름다운 결혼을 하는지, 성악설의 가장 대표적인 문구와 같은, 욕정을 참지 못해서 결혼을 하는지, 그와 같은 귀를 영원히 비밀로 한 채, 우리는 결혼의 가지산 터널을 지나, 결혼해서는 인격은 제도에 맞기고, 육체는 방구석에 맞기면서 지내는 것이다. 우리가 모든 사회적 문제를 직면할 때마다, 놀라게 되는 것은, 한국말이 영어권에 비해 그래도 경쟁력이 있다는 사실이고, 다시 한번 놀라게 되는 것은 항상 그것의 해석의 과제는 물음표로 놔두고, 프로그램 무한도전의 재밌는 그림처럼, 항상 헤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분명 사탄을 보고, 악을 보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놔두고, 라스베가스, 지나친다는 것이다. 언급도 지나치는 것이고, 기록도 사환이 임금이 되지 않는 이상 지나치는 것이다. 인간은 섹스를 하지 않는 이상, 무수한 이성을 지나치는 것이다. 그런 수학적이고, 필연적인 동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책임하고, 결과적으로 악에 동조하는 패턴을 뜻하는 것이다. 항상 그것의 빈틈을 보면서, 우리는 악에 동조하는 패턴을 또한 지켜보는 것이다. 우리가 역사 저널 그날들을 보면서, 매일 같이 세종이 등장하고, 어쩌면 일 년에 세종이 철마다, 시기마다, 한 수십 명 되는 것처럼 등장하고, 아무런 메시지도 남기지 않고, 그럴 듯한 패턴만을 남기고, 그것이 악으로 기동하는 것을 또한 지나치는 것을 이렇게까지 용인했던 역사가 있었던가, 사랑하는 사람의 피라미드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볼 일인 것이다. 이순신도 매일 같이 등장하고, 그렇다면, 그와 같은 패턴과 악행의 연결 속에서, 그나마 세계 위인들보다, 우리들의 사기의 열전 속의 인물들이 보다 낫지 않은가?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다. 박정희는 분명 경제를 발전시켰다. 제발. , 형제여, 제발. 김경재. 그랬을 때마다, 우리는 서구 정신들이 바쁜, 베토벤, 모차르트, 그것의 음악방송적인 인용, 스타츠카프레, 베를린 필, 그리고 연주자 미야자키 하야오, 그런 시커먼 그림자 사진에 우리는 보다 매혹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사기 열전들의 인물에, 패턴을 느꼈지만, 눈 앞에 현전하는 예술들의 영향에 보다 많이 노출되었고, 심각히 매료되었으며, 생명의 양식이 되었던 것이다. 만나 중에 만나요, 메추라기 중에 메추라기가 되었던 것이다. 김구도 그렇다. 안두희가 죽였다는데, 안두희가 가족도 없었나 싶었다. 그러나 스타츠카프레, 우리들의 익숙한 대화의 패턴에서는, 예쁜 사람들과, 연구자의 정성만이 노출될 뿐이었던 것이다. 세상 어딘가에 정말 훌륭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패턴을 무찌르고, 그러면 어둠 속에서, 괴물이 괴성을 지르면서 마침내 사람들의 눈에 나타나고, 다시금 그 사람은 일상으로 돌아가고, 어쩔 수 없이 그것이 시가 된다면, 그것은 사람들에게 과시되는 것을 피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역사가, 서구의 것에 예술적으로, 학문적으로, 미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에도 마땅한 준비가 없고, 능력이 없는 것인 것이다. 그런 것들은 서울에 넘치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이 어렵다 보니까, 사도 세자도 자주 등장한다. 사도 세자는 한 번 죽었지만, 사람들의 기억에는, 의미로 한 번 확고한 주장을 펼치지 못하는 한계로 인해, 매일 같이 뒤주의 바지를 입는 사람처럼 보이는 것이다. 뒤주의 바지를 입으면, 상체는 그래도 노출이 되어야 하는데, 형태적으로 보면 기이하고, 논어에 기이 편이 있는 것처럼, 영조는 그와 같은 마술쇼나, 투명인간의 실험에 보조자로서, 어쩌면 프랑켄슈타인 박사처럼, 성공한 사람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인 것이다. 우리는 영조가 살인을 방관한 이유도 모르고, 무엇보다도 내가 그들의 고통스러운 사태를, 다만 민중들의 답답함으로만 알았지, 다른 어떠한 관심도 없는 것으로 지금껏 지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는 것을, 그런 사이다는 것을, 삶은 달걀 두 개, 우리는 그 모든 현상들을 잘 모르는 것이다. 미국 좀비 영화도 아니고,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이 연구 조사가 되었는가? 그런데도, 어떠한 사람 하나 담론의 빼어난 문장을, 마치 일제시대 아래서, 기가 막힌 철학적인 선구자가 있어서, 그를 인용할 때마다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빼앗긴 들판과 대조가 되어서, 그런 것을 발견하였다면, 항상 전문가, 대가, 최고 전문가 하면서 그를 동시에 언급하였을 것이다. 박찬 교수는 이렇게 주장하였고, 신균 교수는 이렇게 말하였다면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범주적으로 인지하고, 기억하고, 동시에 진행하니까, 역사적 현상을 두고 그렇게 나아갔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역사학자가 한 명 없다보니까, 다만 남의 나라 로망스 기타 음악과 함께, 그렇고 그런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삼국사기의 열전은, 그것이 현상에 있지 않고, 인물에 있다는 것에서 사람들은 심각한 고통을 느낀다. 인물은 대부분, 죽고 나면, 구멍으로 끝이 나기 때문이다. 건축은 그나마 그렇지 않아서, 바람이 불면, 훌륭히 버티고 있는 모습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건축이 바람에 버틴다는 말 자체가, 바람 불 교, 버틸 훈, 교훈인 것이다. 그러나 세종대왕이라던지, 이순신, 그리고 삼국유사, 사도세자, 백범 김구라는 인물들이, 우리에게 서양의 방패막이가 되었다면, 우리는 그 말을 과연 믿을 수 있겠는가? 사탄에 대한 방패막이는, 사탄에게 승리한다는 말인 것이다. 백범 김구가 사탄을 온 몸으로 잡고 서 있고, 안두희가 총을 쏘아 괴물을 죽이고자 하나, 차라리 빨리 죽이라고, 이 지적인 괴물을, 사람 말을 기가막히게 하는 흉노를 지금 죽이지 않으면, 우리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그래서 총을 쏠 수 밖에 없었고, 백범 김구도 운명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구멍은 그렇게 무서운 것이다. 그것은 인물을 파먹는 괴물이기 때문이다. 괴물이 출현하고, 괴물이 빠져나가는 구멍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배흘림 기둥을 좋아하고, 때로는 싫어하는 이유는, 그것이 구멍 같고, 때로는 건축 같고, 때로는 숨을 쉬는, 말을 하는, 높은 인격 같고 그렇기 때문인 것이다. 항상 건축은, 학교에 밀리고, 학교는 수많은 책들을 가지고 있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학생 중 몇몇이, 하나님이 보낸 천사의 인도에 따라, 책을 읽는다고 할 때, 그것은 금방 한신대학교,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읽지 않고, 보지 않고, 학교는 금방 횡령되고, 몇 명의 학생이 입학하고자 하였으나, 반려하고, 스스로 폐쇄되고 그러는 것이다. 서양이 코로나 바이러스와 함께 몰락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서양의 다큐멘터리가 아름답고, 강력하고, 그것의 조형력이 빼어나지 않는가? 서양의 다큐멘터리를 보면, 인물들이 부질없는 이야기 속에서 사라져갈 때, 처음으로 삼국유사의 패턴이긴 하나, 승려가 나오고, 공주가 나오고, 학자가 나오고, 그것들과 벗을 하는 왕이 나오고 하는 것 같은 것이다. 다큐멘터리 어디에 그렇다는 것인가? 일방적으로 읽는, 무수한 일반적인 관념들이, 개념들이, 보이지 않는 성이 있는 것처럼, 착각이 들어서, 수많은 이집트의 벽화들처럼, 그런 것일 수 있다. 이집트의 인물들을 보면, 별로 중요치 않다. 영원히, 주체의 피라마드, 그것의 저녁의 실루엣과 같은 입체가 중요한 것이다. 누군가 어떤 사각형을 남자라고 하고, 다른 사각형을 여자라고 하면, 그것은 맞는 것인 것이다. 아무리 좋은 이야기일지라도, 남자가 말을 하고, 그것을 비밀로 하고, 다른 이가 그것을 알아듣는다고 할 때, 그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성경은 세종대왕의 한글 성서로 보면, 그렇게 통독에 적합한 것이다. 한글은 하루 만에 땔 수 있다고 하는데, 누군가 옆에서 읽어주는 한글 성경이라고 하면, 일주일이면 다 읽을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끝에 이르러, 깨달음을 얻고, 위로를 얻으며, 죽음의 권세에서 벗어나고, 세상 만민들과 함께 구원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은 최고의 재료를, 언젠가 어느 교수님에게 프라임 매터가 무엇인가? 아퀴나스의 문장에 있는, 그것을 두고 이야기 한 적이 있는데, 사탄이 그것을, 사람들을 코로나 바이러스 갈아먹는데, 사용하지 않았겠는가? 인간 실험이라는 것은, 하늘과 같은, 참다운 신앙의 인내심이, 인내력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못만 갖다대어도, 금세 놀라고, 금세 충격을 받고, 금세 심장마비로 죽는다면, 백명이 모였다고 해도, 그것의 숫자는 열 명도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믿음의 공동체가 되고, 마땅한 설교자가 없어서, 성경으로 통독하고자 하면, 이제는 통독하였으니, 죽음의 실험으로, 지식의 재산으로 나아가자 하면, 때로는 아우슈비츠에서 죽어갔던 유대인들이, 형슈비츠에서 살아갔던 독일군들과 하나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평가자가 없고, 아는 이가 없고, 참다운 해석학 학자가 없는 세상에서, 마침내 그것이 메시지가 되고,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이런저런 작은 구조들로써 따랐을 것이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주술목 구조에서의 문학은, 우리의 아름다운 강변과는 다르게, 어떻게 살자, 굉장히 쭈뼛서는 것들의 연속인 것이다. 그렇다고 보면, 성경을 읽을 때, 귀가 아름답고, 마음이 아름다운, 그 한없는 청년은, 소년은, 소녀는 치사량을 넘기게 되는 것이다. 서양의 철학이 영원한 불가지론으로 나아가고, 영국의 문학이, 겨우 스톤 에어인 것은, 그것이 다 고고학적 원인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탄은 재산이 아닌 것이 없다. 우리는 바이러스는 재산이 아니라, 적이라고 여기지만, 사탄은 체적이 넓고, 우리는 스핑크스에서 살지만, 사탄은 선과 악의 쿠푸왕의 피라미드만한 평수에서 살기 때문에, 바이러스까지도 종류마다 다 재산인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을 읽고, 한글이 아닌, 주술목 구조로다가, 정신이 백광상태에 휩싸이게 되면, 그것을 사이드 이펙트로 놓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문학에도, 사람들을 어렵게도 하고, 마침내 성경에 이르게 한 다음에는, 그 귀가 아름답고, 마음이 아름다운, 그 한 없는 청년은, 소년은, 소녀는, 그와 같은 성적인 구도 때문에 반드시 성에 중독되고 말았을 것이다. 또한 공부를 잘하면, 감동과 은혜는 마땅한 위치가 있기 때문에, 훌륭해진다. 그래서 사탄은 할 일이 많고, 사탄에겐 세상이 넓었던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도. 그들이 단 한 사람이라도, 성경 내에 가필된 것처럼, 천사가 되었다면, 천사가 단 한 사람이라도 되었다면, 도리어 문건으로 그 사실을 기록에 남겼을 것이다. 하지만 어찌 그랬겠는가? 우리가 천사가 되기 위해서 술을 마시지만, 대게가 개가 되지 않는가? 그리고 나중에는, 수많은 과학적인 기술이, 과거에 없어도 좋은 것이다, 이 정도의 내실이라면, 이차대전 이후에 수많은 군인들이, 프랭크 시나트라에서, 커트 코베인으로, 니르바나에서 죽어갔을 것이다. 그들이 변했다는 것은, 진실로 다른 존재가 되었다는 것은, 아무런 예술 평론가도, 세상에 나 말고 있다 해도, 토를 달 수 없는 것이리라......

 

 

 

한글 성경을 읽으면, 아주 짧게 아멘 하는 소리가 입에서 나온다. 눈물이 조금 그렁그렁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