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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이야기

세상 모든 학교는 어떻게 생겼는가?

by 마음대로다 2020. 4. 4.

세상 모든 학교는 어떻게 생겼는가?

 


 

 

 

 

피아노가, 아름다운 주제가 사라지고, 특정한 화음의 전격적인 진행으로만 활용될 때, 그것은 씬디, 씬디 로펌, 우리는 이미 인류가 벽에 도달했구나 하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세종만 해도 그렇다. 세종만 해도, 서양은 해볼 수 있었다. 그러나 숙종에 이르러, 서양은 아무런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서양은 보면, 왕권이 약화되어 있다. 그것은 동양이 내내 숙종, 왕권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민중주의나, 한글을 비롯한, 어떤 즉문즉설의 세상을 살았다면, 왕권이 없고, 지방 자치제나, 명승고적 중심주의, 축제 중심주의적인 삶을 살았다면, 서양은 그와 같은 폐해를 보면서, 왕권을 강화했을 것이다. 중국도 그렇지만, 방송이라는 것은 그와 같은 대동 세상에 대한 염원이 담긴 것처럼 보인다. 일본이 왕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방송이 활성화된 것이, 괜히 정치 권력적인 것들을 비난할 때, 권력이 정치 권력의 편을 드는 것을 이슈로 삼지만, 결과와 현상만으로 보면, 대단히 기호적이고, 즉흥적이며, 개인의 감각이 살아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홍콩도 그렇다. 홍콩이 그와 같은 물리적 현상을 일으킨 것도, 자세히 보면, 어떤 정치적 수장이 없다는 것에 대한, 그와 같은 조건의 불확실성에 대한 보고였을 수도 있다. 세계 전체가 그러하다. 작금의 코로나 바이러스의 처지에서, 민중들을 염려하는 것은 권력이자, 민중들인 것이다. 과도한 권력이 엿보이는 것을 두고, 벌써부터 분석에 들어간 사람들이 꽤 있다. 서양은 과도한 민주주의적인 성격이 있다. 그런데 그것의 행정은 늘 언제나, 권력적인 단순함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다. 숙종 이후로, 정조 이후로, 그다지 훌륭한 왕 한 명 내지 못했던 조선이 몰락하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다. 대게의 학자들은 그것을 바라보지 못한다. 왕의 얼굴을 잘 보지 못한다. 조광조가 왕의 얼굴을 보았고, 왕이 그를 높이 사서, 힘들고 괴로운 처지에서 자살을 선택하고, 너무 마음이 어두웠던 모양, 왕족도 아닌 그에게 왕위를 선양한 것을 보면, 우리의 역사라는 것이 얼마나 제한된 인물에게만 열리는, 아파트 창문 같은 것인지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모든 난맥상을 놓고 볼 때, 숙종이야말로, 버티는 힘과, 어려운 처지를 극복하는 드라마틱한 의지를 과시하는 것 같다. 세종이 우리나라 사람을 닮았는지, 아니면 숙종이 우리나라 사람을 닮았는지, 그것은 누구도 판단할 수 없다. 다만 세종에게 여자가 없었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세종에게 동서남북이 없고, 대동법이 없고, 늘 새로운 나머지, 성숙함이 없었다는, 이름에서 풍기는 단순한 인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숙종이, 사탄의 토플리스 요구에, 응하지 않고, 매우 오래 산 것이 대단해 보인다는 것이다. 우리는 세종을 잊고, 숙종의 전성시대를 선언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얼마나 그것이 조잡한, 인상주의이고, 역사에 관한 주마가편, 그러니까 이미 가고 있는 버스에서, 버스 운전사 아저씨에게, 좀더 빨리 가자고 하는 것 같은, 약간의 몽유병적인 표현인지, 우리는 알 수가 없는 것일까? 세종이 있고, 문단세 등이 있고, 비로소 숙종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조선왕조실록을 읽지 않는 이유는, 왕권이 갖는, 영원히 판단 내릴 수 없는 과거성 때문인 것이다. 그것을 읽어서, 현명해졌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어떻게 보면, 전 세계의 왕권의 역사 속에서, 가장 지식소가 풍부하고, 인식소가 아름답게 진쳐 있는 것이 그것일 것인데, 왕권이라는 인상 자체가, 인간에게는 영원히 이질적인 것인 것이다. 그렇게, 숙종에 대한 소문이 서양에 이르렀고, 숙종의 삶이 그들에게는 낭패를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우리는 서양의 학자들을 읽지만, 좋아하고, 낭독하고, 논문으로 인용하지만, 서양은 존재의 왕권을 알아보고, 그것이 숙종처럼, 사람들에게 재생산된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숙종이 있고, 그들에게는 숙종이 없는 것이다. 세종만 해도, 대단히 잘생긴, 어떤, 젊은, 똑똑한, 영민한, 종의 느낌을 준다. 그것을 우리가 역사학현상적으로 아는 것이다. 세종을 언급해서, 박정희를 벗어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용비어천가가 가장 싫은 것인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서적들이라는 것이, 그저 혹세무민하는 것인 것이다. 한글로 적으면, 한글로 그것을 읽겠는가? 사람들은 얌전하고, 달밤에 하는 일이 없었다. 조용한 아침, 점심, 저녁의 나라에서, 반드시 한글로 쓰여진, 그런 효경과 같은 책을 읽었을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의심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서양 서적에 대한 인식이 존재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인 것이고, 우리의 왕권에 대한 인식이 지나치게 후한 것인 것이다. 그것을 몽유병이나, 요즘 유행하는, 시쳇말로 좀비처럼 반복되어도, 사람들이 흥분하고, 좋아하는 것은, 우리의 인식이, 스타트 포인트가 있고, 그것이 매일같이 끝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심지어는 규장각이 어떻게 있었고, 사람들이 실제에 걸쳐, 어떻게 책을 진열하고, 공부하면서 꺼내 보고, 책을 인용할 때, 책을 책상 어느 부분에 놓고, 그것을 상대에게 어필했는지를 우리가 상상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와 같은 대코로나 바이러스의 시대를 맞지 않았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드라마가 그것을 채워주고, 누군가 나노 크기의 병균을 향해, 기계적인 나노의 효과가 있는 엘이디 불빛을 쏘면, 그것들이 사라진다고 하는데, 하루 빨리, 백신보다도 먼저, 그것의 장치를 만들어, 우리 사는 곳곳에 그것을 설치했으면 좋겠는 것이다. 경복궁에 대한 것은 불완전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사는 세상에서, 학교와, 정부, 연구실, 기업, 도서관 등의 것은 바이러스가 끼어들 틈이 없이 매우 선명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숙종이 가장 정확하게 조선을 드러냈고, 종숙, 그와 같은 현상과 맞물려, 더 이상의 왕이 불가능했을 수 있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났더니, 학교가 바이러스 때문에 차단되어 있고, 집에서 강의도 듣고, 옛날 같으면, 사서삼경을 읽고, 달달 외우고, 국가에 충성하고, 날카롭게 비판하고, 이런저런 어려움을 문제 삼아 대안을 제시하고, 그런 것들, 달달 외우는 지적인 우주를 우리가 벗어나 있기 때문에, 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전화번호를 외운다는 것. 친구나, 집 전화번호를 외우다가. 그랬던 우리들의 정신현상학이 있었는데. 남자들은, 어느 시인은, 군번을 외우고, 그것을 잊었다고 하는. 그게 시로써 있다. 그러니까 그 시인은, 전생에 여자였던 듯. 애니웨이, 드디어 한국 사극이 한계에 도달해 있는 것이다. 다만 킹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한계에 도달해 있는 것은, 사람들이 사람들을 먹고, 산 채로도 먹었다는 징비록에서 이미, 그런 책을 왜 읽는 것인지, 드러나 있었던 것이리라. 공부 못하는 분위기. 우리들의 마음이, 선조와 더불어, 학교를 버리는 것이다. 선생이건, 가족이건, 친구들이건, 공부를 하지 않고, 바깥으로 돌아다니는 이를 얼마나 싫어했겠는가? 그렇다고 정식 운동 선수도 아니고, 예고 특례 입학이나 전학 같은 것을 하는 것도 아니고, 순전 집에 돈이 있다는 이유로, 머리를 파마하고, 물들이고, 비싼 차를 사고는, 어떤 여자화 돌아다니는 것이다. 스님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의 유산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숙종때까지 한번 이르렀고, 숙종에서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 이런 악연이 있을까 싶다. 정말이지, 숙종은, 종숙과목강문계, 세상 모든 생물의 정리 같은 것이다. 만일 우리나라에 여의도가 없었고, 기라성과 같은, 아사히 같은 여배우들이 없었고, 드라마가 없었고, 가족이 없었고, 감독이 없었다면, 북한은 지금까지도 제법 제 3세계의 조선 역할을 했을 수도 있다. 가슴 아프지만, 그들에게는 미래가 없고, 다만 사탄의 기능만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사탄의 피라미드를 보면서, 내가 있는 피라미드가 그것과 연결이 되어 있거나, 닮아있거나, 내가 하는 말이 그들을 대언하는 것은 아닌지, 깜짝 놀라곤 한다.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신성한 양심의 영역인 것이다. 그들도 따지고 보면, 불쌍하다. 내가 독하게 말하면, 나는 금세 조선 시대 독종이 되는 것이다. 독종은 아름답고, 독종은 만화 같고, 독종은 외로우나, 독종은 세상 모든 생명의 친구인 것이다. 그것은 피라미드 중간에 있는 사람들을 좋아하는 민중들도 마찬가지이다. 세종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없다. 한글을 창제하고자 하는 전제가 사실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숙종이 한글을 창제한 것일 수 있다. 세상 권력은 반드시, 허무하고, 다만 철학적인 것이 아니라, 어느 때에는 방향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주변의 신하들이, 유난히 원시적인 방향에서, 기호에서 빙빙 돌았던 것은, 그나마 숙종이 아무런 사화도, 당쟁도, 사람들을 가두고, 고문하고, 귀향 보내고 하지 않아서 그랬을 수도 있다. 대체 무엇에 숙종하다는 것인가? 나의 글을 보면, 나름 매력적인 데가 있다. 나중에 정조가 정약용 때문에 죽은 것처럼, 나의 글을 보면, 사람들이 살아날 수 있는 여지가 많은 것이다. 우리가 어려서 그렇게 학문을 갈고 닦는 것은, 다만 나중에 치질을 걸릴 것을 염려해서가 아닌 것이다. 그것이 아름답다는, 칸트의 미적 판단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것이 선하고, 그것이 사람들에게 실재하며, 연기와 바이러스와, 공갈빵의 악순환 구조에서, 우리가 빠져나오고, 발전하고, 그 사람들을 우리가 고치고, 구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인 것이다. 그것도 한국 사람이다. 한국 사람이 전세계의 수학 시험, 기능 시험에서 일등하지 않는 적이 없다. 노벨상만 못탔을 뿐. 분명 상을 많이 받았고, 그것이 사라지지 않고, 지금과 같은 대코로나 바이러스의 국면에서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마치, 한글을 숙종이 개발하고, 사람들에게 반포한 것처럼 착각이 드는 것이, 그와 같은 마음이, 세종이 표현 바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젊었을 때는, 금호고를 다니고, 한신대를 다니고, 서울에서 공부했던 것은, 세종 같고, 군대를 제대하고, 그리고 무어라고 정리할 수 없는 지금에 이르기까지는, 숙종 같은 것이다. 나의 글은, 경춘선의, 강촌 가는 철길의, 두부와 같은 데가 있다. 빛은 두부와 같다. 그것은 결코, 빙판이나, 뱀의 허물 같지 않다. 샹들리에보다 밝고, 환한, 두부와 같다. 내가 약하고, 여자가 지나가는 음식 판매대를 좇아, 이런저런 과자와 음료수를 사오는 것이다. 내가 시켰다고 하기에는, 여자가 내게 행복을 주는 것인 것이다. 청바지를 입었다고 해도, 아름다운, 하늘 높은 두부와 같고, 청치마를 입었다고 해도, 세상 아름다운 좀비와 같은 것이다. 내가 한 번 경춘선을 간 것인가? 한 번의 기회를 놓지지 않는 백구의 대제전, 배구 선수처럼, 그렇게 거대한 학교가 중요한 것이다. 어떤 이들은, 지금, 코로나가 끝날 때까지, 집에서 공부하게끔 하자고 한다는데, 그것은 제법 비교육적인 것이며, 과학에는 문외한인데다가, 주장의 피라미드가 사탄의 것에서 많이 시커매 보인다 하겠다......

 

학생들은 반드시, 단단해지고, 자기만의 학교를 구성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정부 역사상, 교육부 장관에게 이런 종류의 철학까지, 존재의 피력, 강요되었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엎질러진 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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