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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이야기

정신없는 유산에 관하여

by 마음대로다 2020. 4. 27.

정신없는 유산에 관하여

 

 

 

 

 

 

 

 

 

더 이퀄라이저 2도 재밌게 보았다. 그들은 영화를 하고 싶으면, 어느 정도 사탄의 돌을 취하는 편이다. 사탄의 돌은 사탄이 아니고, 다시금 해석자에게, 개울에서 깨끗히 씻기게 하면, 수석의 흔적만 남기고, 고르바초프라던지, 산토끼던지, 반짝반짝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가, 사탄의 눈치를 보면서, 영화를 시작하고, 그 영화가 또한 사탄의 장치가 될 수 있음을 반기겠는가? 그것의 흔적이 다만 시간을 품고 있고, 그것의 종이봉투가 오래도록 불쌍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코로나 바이러스로, 우리나라는 아니더라도, 조금, 전 세계가 힘든 와중에, 정신없는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내가 해왔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긴 하나, 그래도 그것이 서로 접선할 때는, 스파크가 일고, 나의 정신 회로에 별로 좋은 영향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모처럼 더 킹이라든지, 루갈도 보고자 하였으나, 역시나, 보다가 정신이, 퓨즈가 나갈까봐 볼 수가 없었다. 더 킹의 여자 주인공은, 옷차림이 너무 여자 경찰 같지 않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는 것 같다. 어떤 꿈인 것도 같다. 꿈은 그렇지 않다. 꿈은 현실이 아닌 것이다. 누군가의 자식들 이름이 있는데, 하나는 꿈이고, 하나는 현실인 것이다. 하나는 현실이고, 하나는 꿈인 것이다. 꿈이 와도 반갑고, 현실이 와도 반가운 것이다. 그러니 우리들은 항상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꿈이 없는 현실은, 둘은 사이가 좋아서, 매우 힘이 들고, 현실이 없는 꿈은 금방 악몽으로 변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의 모든 드라마가 그렇다. 우리가 좋아하는 SF, 액션, 러브 로망 같은 것은 꿈이 직장을 구한 것과 같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산뜻함을 갖고, 대학의 문학과를 졸업할 수가 없다. 그와 같은 한국시도, 김희보, 없다. 나그네나, 공존의 이유, 그리고 벤치, 그런 것은 있지만, 꿈과 현실이라는 가족 로망스는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하다가, 우리들의 활자 문화는, 영화나, 지금의 드라마에, 이렇게까지 밀리게 되었는가? 우리가 우리들의 실천문학을 생각해볼 때, 가장 완벽한 구성이, 라디오 음악과, 대학교 공부와, 문예지에 당선이 되는 신화였을 것이다. 그와 같은 창비나 문지의 시선집이, 라디오 음악과, 디제이의 멘트와, 조용한 주택가의 공기에서는 연합을 하였던 것이다. 욕심이 없고, 해외여행을 다녀오면, 사람들에게 수박을 고루 돌려야 했던 것이다. 영화는 늘 언제나, 정신 나간 대화들을 이어 갔다. 그것을 어떻게 아는가? 우리들의 현실이, 우리들의 현실적인 꿈이, 이미 훌륭한 표현력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김소월이 정말 김소월이 되었고, 우리들은 논문적인 필력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맑스주의 문학 비평은 우리들의 실천문학적인 시각에 도움도 되고, 우리들의 비평적인, 그러니까 우리들의 우상, 좌상, 영상의 늪에서 처음으로, 문학 대중, 학생 연합으로서의, 평상을 뜻하는, 그것의 현실적인 목표에 다만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해도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맑스주의 비평이, 독일에 있는 것도, 미국의 아이비리그나, 소련, 중국 공산당, 쿠바, 북한에 있는 것도 아닌데, 일단 다른 곳에는 있을 수가 없다는 사탄들의 자신감과 함께, 그들 나라들이 싹둑 잘리고 만 것이다. 별로 좋은 국가도 아니었는데, 싹둑 잘리고 나니, 아니나 다를까, 우리들에게 필요한 선풍기가 많이 부족한 사태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그 아름다운 홍콩 영화들. 홍콩 영화의 대표적인 평론가, 원화평, 그런 말을 우리가 들은 적이 없다. 중국 영화의 대표적인 감독, 장첸, 첸카이거, 그리고 대표적인 평론가, 미당 서정주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없다. 이영애가 남자 주인공에게 라면 먹고 갈래요 한 말은, 그것의 구조주의적인 운명을 뜻한 것이었을 것이다. 영화적인 표현은, 창세적인 괴물에서부터, 지금의 학생까지 다양하지만, 하나씩 돌아가면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늘 제네시스만이 사랑을 받는 것이다. 라면 봉지에도 글자가 있고, 글자의 약정에 따라, 상품이 공중을 날아, 가게에 진열이 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은 마지막에 이르러, 붉은 색으로 반짝이고, 남자가 혹은, 여자가 평강할 수 있는 가능성은, 보이지 않는 눈에 의해 빼앗기고 마는 것이다. 그것의 평론적인 붕괴는, 도정환부터 예정되었을 것이다.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별로 생각하기 싫다. 이광수의 무정이, 마치 이과수 폭포처럼, 만경창파 흘러만 갈 뿐, 그것을 돌려 최소한 사진 찍는 작업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늘 어려웠던 것이다. 우리가 대학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준, 한국 대학, 처음의 인물이자, 어쩌면 마지막, 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이었을 것이다. 말은 문법으로 이뤄져 있지만, 통사론에 이르면, 다만 범주로 분열되기 시작한다. 속성이 속성인 것을 숨기고, 다만 그것들끼리의 역사에 사람들을 몰고 가면, 나노 크기의 사람들은 쓰레받이처럼 몰려가게 되는 것이다. 씨네마 천국. 의미적으로도 그러한 것이다. 그러다가 돌아오는 것이 문학 동네의 힘이고, 저력이기 때문에, 나쁜 것만도 아니다. 그러나 처음의 학교에서나, 처음의 병원에서의, 노동자 상호간의 의식이 끊겼다는 원죄는 지워지지 않는 것이다. 이광수의 무정은 지금의 영화 시대에 비춰보면, 차라리 평론 같다. 어째서 그럴까? 해바라기의 노래들도 지금의 영화 시대에 비춰보면, 차라리 평론 같다. 우리가 지금 헤어져도, 하나도 아프지 않아요. 그저 뒷모습이 보였을 뿐. 우리는 다시 만날 테니까. 사람들이 이것이, 시지, 무슨 평론인가 할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마만한 아름다운 평론을, 대중적인 평론을, 평론이 도저하게, 그러니까 불도저, 고슴도치, 고구마처럼 흐르는 것을 만난 적이 한 번도 없었는 것이다. 김부식이 고사를 적고, 토를 단 것이 원형적인 잘못처럼 느껴지지만, 그가 시를 적고, 시를 남기고, 모든 유감이라는 평론을 남겼기 때문에, 그것이 같은 것이지만, 우리들의 의식이 그나마 지금까지 살아있다는 거짓말을 해야 하는 것이다. 김부식의 여러 유감들을 우리가 중고등학교에서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평론이 어째서 시심을 잃는 것일까? 사람들이 늘 그렇게 라면 먹고 가면서, 구미호에게 간을 뺏기는 사태를 두고, 평론은 언제나 작품은 원래 그런 것이라는 포기 선언을 하는 것일까? 그렇다고 뺀질한, 잘난 것 같은, 그런 평론을 우리가 만난 적도 없지 않은가? 우리들의 언어는, 작품이라는 어린아이적인 현상에 대해서나, 겨우 용돈 줄까 하는 것이지, 마땅한 다른 회사 사람들을 만난 적이 없는 것이다. 상업적인 세계에서는 허구한 날, 이런저런 적대적 머져를 행하는데, 글을 쓰는 사람들은, 라면을 너무 오래 끓이다가, 농촌 지역에 있는 아파트가 불타게 되는 것이다. 내가 방사능에 끊임없이 노출되어 있는 것의 유일하게 좋은 점이, 북한과의 관계일 것이다. 그것들은 맑스주의적 평론이 그나마 잔존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보다도 나노화되어 있는 것인 것이다. 바이러스 크기라고 해서, 바이러스는 아니지 않는가? 그와 같은, 산비탈에 만든 이런저런 밭처럼, 위태로운 상태인 것이다.

 

사람들은 그리스 문화와 이집트 문화가 서로 너무 떨어져 있다고 말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아닌 것 같은 것이다. 그리고 시옷 시옷을 보고, 나는 소설에서, 섹스라고 말하고, 연상된다고 했는데, 기자 지구의 거대 피라미드가 두 개여서, 그리고 하나는 오르게 되어 있고, 비밀리에, 다른 하나는 오르지 않고, 호텔에서 쉬라고 되어 있다고 해석하였는데, 인터넷의 어느 개그맨은 나와 비슷한 사람에게, 어째서 머릿속에 섹스만 가득하느냐는 것이었다. 약간 지독한 간접성을 보았다. 짓굿성을 본 것이기도 하지만, 별로 불편할 뿐이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맞는 말도 같았다. 우리가 철갑선을 만들 때, 가장 놀라게 되는 것은, 철이 있느냐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공장을 만들 때, 놀라게 되는 것은, 철이 있느냐는 것일 것이다. 모든 가옥을, 나무로 지으면 될 것이다. 철갑선을 만들 때, 우리는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가? 장군의 갑옷? 포기할 수 있다. 창과 칼? 생각이 필요하다. 시대가 다르지만, 말을 감싸는 갑옷이나, 투구, 그리고 군사의 갑옷도 포기할 수 있다. 시대가 다른 것에서부터, 포기하고, 그것을 가져다가, 임진년 이전의 조선에서, 다만 철선이 아니더라도, 철갑선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대단한 효용성에다가, 민중성, 그러니까 민주주의적인 의지를 내비치는 것이 될 것이다. 어째서, 장군의 철갑 철을 포기할 수 있는가? 하나의 거대한 칼을 만들 생각을 할 수 있는가? 그가 보기에, 나무로 만든 것이다 보니, 멀리서 날아온 대포 탄환에 터지고, 깨지고 하는 것이다 생각한 것이다. 철갑선을 만들면, 속도가 느리더라도, 접근하여서, 부딪히고, 대포를 쏘고 하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것의 판단은 그러나 오래된 것이다. 죽음의 형상에 충실한 사람들은, 아가멤논 장군의 장식을 포기할 수가 없는 것이다. 대리석도 깨질 수가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은, 생전 처음 보는 태초의 풍경이 있을 수가 있는 것인가? 장군의 모습과, 여자들의 모습은, 보기만 해도 아름답다. 평범한 크기에, 말만 잘하고, 글만 잘 쓰는 남자는 언제나, 주자학의 근거나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들의 글이,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처럼, 다만 그리스의 형상을 향해 쌓여만 있는 것인 것이다. 그렇다고 보면, 과연 그리스 문화와, 이집트의 문화가, 서로 시대 구분이 있고, 왕래가 거의 없고, 이집트의 문화가, 그리스의 문화 이전에,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시간적인 역사를 가졌는가? 이와 같은 정신 없는 구분에 의하면,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것인 것이다. 피라미드가, 바퀴나, 철제 기구가 없이, 겨우 동으로 만든 막대로 만들었다고 하는 것이 이제는 조금 이해가 되는 것이다. 사탄에게 인간의 형상은 늘 형이상학적인 것이다. 우리가 어려서 조금 조숙하고, 나이가 들어서, 남자가 그리고 여자가 서로에게 육체파 배우처럼 여겨지고, 극장이 있고, 필름이 있다는 가정이긴 하지만, 나이가 많이 들어서도 서로가 말을 타고 싶고, 코끼리도 보고 싶고 하는 것은, 그리고 그런 사실을 숨긴 채 죽는다고 하는 것은, 진정 좋고 아름다운 일이 아닌가? 그런데 사탄은, 늘 언제나 만리장성을 넘어, 이 정도의 것이면, 그리고 이 정도의 이유면, 흉하지 않지? 하는 인간의 의식의 시험을 늘 요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죽어서 차원을 이동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살아서 차원을 이동할 수 있다고 말하고, 그것에는 추진력이 필요하다고, 옛날의 라마승들은, 마라승들 미안, 늘 말해왔던 것이다. 인간들이 그와 같은 이설에 놀아나지 않는 것은, 아직 순서가 되지 않았을 뿐, 무슨 생각이나 의식이, 그리고 정신의 크기가, 매우 높고 훌륭하고, 각성되어 있어서가 아닌 것이다. 그리스의 축제와 같은 형상들이, 그와 같은 지옥을 불러왔다는 것은 아직까지도 믿기지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하면, 기자지구의 피라미드를 보고, 섹스를 생각하는 것은 어폐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생각과 감각이 영원히 서로 충분치 않는, 그런 앵글로 색슨인 것도 아니지 않는가? 기자의 피라미드는, 차라리 확고부동한 섹스가 아닌가?

 

 

 

여단, 군단, 그리고 계단이라고 말할 때마다, 우리는 허리가 끊어질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