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우리는 많은 말을 할 수 없다. 그러나 세상은 턱도 없이 많다. 영턱스클럽. 사람들은 걸을 수 없다. 그러나 걷는 것처럼 착각을 하고, 그것이 어쩌면 아담과 하와의 사랑이었을 것이다. 평생을 깊은 착각 속에서, 피라미드 속에서, 걷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피알아이도 그렇다. 우리가는 케이투소총을 옆에 끼고, 전진무의탁을 연습하고, 또한 이런저런 포복을 연습한다. 그들에게 학습이란 없다. 다만 총기에 관한, 그리고 병기에 관한, 그리고 전투에 관한 학습만이 있을 뿐이다. 어제 드라마 두 개를, 그래도 첫사랑의 앨범처럼 보았는데, 둘 다, 실험실의 클로르포름만이 넘실거리는 것이었다. 실험실은 범죄가 아니다. 실험실은 피라미드이고, 피라미드는 뜻이 여러 가지이다. 레드 피라밋, 벤트 피라밋. 그것들은 범죄가 아니다. 다만 야트막한, 그것의 표기가 동의를 구할 수 있을지, 날이 풀리면 가겠어요 하는 것이 서막을 알렸다면, 어떤 범죄와 좀비에서 벗어난 세계, 아름다운 세상, 그러나 거기서도 누군가는 코로나 바이러스 바리케이트를 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코로나 바이러스인가? 아닌가? 하는 절대적인 이분법의 세계로 진입해 있다. 무슨 오이씨디, 지이십, 그런 것은 비교도 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나의 이런저런 최근 소설들을 보면서, 경악을 금치못했다. 경악을 영어로 하면, 베쓰인데, 우리나라에 베쓰가 갑자기 넘친 것은, 우리나라가, 나를 비롯하여, 전부가, 거의 전부가, 세계 문화 귀족들이나 인민들에게, 경악을 금치 못하는 대상이 되었다는 일종의, 암구어, 저녁에 초병과 다른 사람이 나누는 말 같은 것, 군밤, 베쓰, 보초전 몇 보 앞으로. 그런 것인 것이다. 우리가 애써 외국 드라마를 본달 때, 외국 음악을 들은달 때, 그것이 예전처럼 재밌게 들렸던 적이, 보였던 적이 언제인가, 사랑하는 사람의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볼 만 하다. 요즘엔 거의 없지 않은가? 드라마는 사랑하는 사람을 닮아가는 것이다. 드라마는, 옛날에는, 다들 인간을 닮았었다. 우리가 외국 드라마를, 외국 소설을, 어떻게 읽었는지는, 티비 문학관에 잘 기록이 되어 있다. 일본이 한국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일본 에이브이에 잘 기록이 되어 있는 것처럼. 그것말고는 사랑의 표기가 없고, 그것이 없이는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설 수가 없다. 사탄의 기호를 따라간다. 일본의 드라마가 먼저 그랬고, 날이 풀리면 가겠어요 하는 것과는 다르게, 일년 삼백육십오일과 반의 반은 드디어 우리에게 사탄의 기호를 따라가는 것이 등장하였구나하는 신호탄, 기분 같은 것을 선사하는 것 같았다. 일본 에이브이가 장점이 있는 것이, 사탄의 기호를 모두 털기 춤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맹점은, 그렇게 해서 살 수 있는 스페이스가 어디에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의 드라마는, 매 비디오마다에, 아지랑이처럼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사탄을 볼 수 없다. 드라마가 인간을 닮은 것이 아니라, 바이러스를 닮았다는 말도 생경할 것이다. 우리가 옛날에, 드라마가 바이러스를 닮지 않은 것은, 방송국이나, 드라마 제작사가, 전 세계에 걸쳐 많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떠한가? 바이러스만큼 많지 않은가? 사람은 바이러스만큼 많다. 그러나 드라마는 그와 같은 바이러스만큼 많은 인간들을 닮을 수 있고, 세시풍속,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아내의 부모님을 찾아가, 선물하고, 인사하고, 함께 잠깐 여행을 다녀오고, 그러나 드라마는 동시에, 인간들을 무수하게 등장시켜서, 내가 모른다고 해도 인간적인 흔적이 없는 것은 아니니까, 다만 자객으로 등장하여도, 기능과 애잔함을 동시에 피 뿌릴 수 있는 것이니까, 제법 아는 사람이 등장하여도, 지금 뉴욕에 등장한 새로운 랜드마크처럼, 꼭 그렇게 비인간적인 능선만을 찾아가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이다. 논문을 읽으면, 두 가지로 나뉜다. 요약에 급하지 않고, 무수한 변칙을 부러워하지 않으며, 인간적이며, 의미적인 깊이에 매료되고, 그것을 모범으로 삼는 것이 있고, 요약에 급하고, 교수들이 괴수 같고, 변칙이란 변칙은 고행석의 비겁자 남자주인공처럼, 그것의 슬픈 지시대상들처럼, 사바세계, 따지고 묻고, 이렇게 된다 하고, 저렇게 세상이 바뀔 것이라고 하고, 지구에 재앙이 닥친다 하고, 사이코패스라고 하고, 패스워드라고 하고, 패딸로지컬이라고 하고, 포랜식이라고 하고, 질본이라고 하고, 질본대로 말하라고 하고, 그렇게 바이러스가 되다 보니까, 제발, 나를 만날 때, 반의 반이라도 비슷했으면 좋겠다고 하소연하는 것인 것이다.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이 되는 것이다. 그런 말들, 말라르메, 말라 있는. 물감. 너무 배고프고, 심볼리즘적으로다가 구석을 조금 먹었더니, 곳감 맛이 났고, 며칠 후에 알 수 없는 독성 성분으로 인해 죽게 되는 것이다. 원래 그렇게 셜록 홈즈들은, 무슨 안토시니안 안료 같은 것을 잘 알아서, 바르는 것에는 문제가 없으나, 직접 먹는 것에는 독성 성분을 나타내게 된다는 것을 뒤늦게 알려주는 것이다. 나는 어째서 이 모든 것들을 반의 반만이라도 닮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고, 나의 글은, 그것들과 항상 코로나바이러스처럼 절대적으로 구분되게 되었는가? 그 때문에, 사탄이 좋아하는 인간의 근본적인 구분, 그것의 시지각적 현상으로서의 귀족에 대한, 새로운 정형률이 되어버린 것이다. 나의 맞춤법이나, 모든 나의 문법은 의미적이며, 통사적이고, 동시에 즉각 형이상학 같은 것이어서, 기존의 한국 시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있다. 나는 이순신 대교를 지나, 여수산단의 밤 깊은 불들을 볼 때에, 정말이지 베쓰, 경악을 금치 못했었다. 어떻게 이렇게 잘 맞아떨어질 수 있을까? 미국 문명이 이처럼, 전 세계적으로 파급력이 대단한 것인가? 아니면, 블레이드 러너가, 일종의 나처럼, 피라미드, 죽음을 가로지르는 인간 마지막 문법으로서의 데드 싸인 같은 것이었을까? 그렇다 보니, 그것의 진정성에 주변의 코스모 폴리탄들이 호응을 하는 것이다. 내가 먼저 호응하고, 좋게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영어를 매우 주권적으로다가 잘 하는 나이를 생각해볼 때, 그것은 반드시 2019년이 되는 것이다. 한국어와 영어가 대결하여서, 대결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시간 같은 것. 오대수의 피나는 연습 같은 것. 전두환 같은 것. 그리고 지금의 한국의 질본 같은 것. 재래식 티비를 몇 번이고 내던지고, 깜깜해진 티비를 다시금 껴안고는, 내가 미안했다, 내가 미안했다 하는, 혼자 사는 한국 말 아저씨 같은 것. 과거에는 그런 파이트와, 근본적인 비판, 그리고 비판 속에서 피어난 사랑 같은 것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나의 권력에나 파고들어가, 다른 나라의 원형적인 이데아를 어떻게든 이용하려는 사탄의 지략밖에 남은 것이 없다. 이렇게 댓글들이 조직적이며, 이렇게 드라마가 아닌 사회적인 사건들이, 흉노족의 인간 동물 변신 실험들의 증거 조각 같은 것인지, 영화는 처음부터 주라기 공원의 호박 고구마 공간이라고 했다지만, 도대체 무엇이 영어가 한국을 무서워하고, 때로는 아첨하면서, 오직 좀비 영화로 옵사이드 작전을 쓰게 되었던 것일까? 참으로 궁금하게 되는 것이다. 학교를 열심히 다니면, 블레이드 러너는 꽃을 피울 수 있지만, 구멍이나 계속해서 만드는, 영화 교육 안에서는, 스스로의 창작 패턴 속에서, 결국, 그렇게 이뤄진 나라, 킹덤 3에서는 좀비들과, 그 깊은 블루 라이트들과 함께, 우주선이나 등장하지 않겠는가? 그것은 일본 에이브이들이, 한국을 사랑하는 증거라고 축적되었다가, 마침내 인간 신체 에스에프들로 덤핑, 덤핑, 마치 사무라이 케이팝 같은 순간이고, 모습이기도 하는 것이다. 한국어는 분명, 좀비들도 가지고 있다. 우리들의 미개발 고전, 환단고기에 분명, 존비리고 명시되어 있다. 그러니까, 꽤 오래전부터, 그들이 있었고, 그들의 이름이 있었던 것이다. 위계와 존엄의 극치가 기독교라면, 그리고 그와 같은 것에서 민주주의가 그릇되어 나타나게 되면, 원래는 더럽고 잔인한 지식 귀족들을 고발하기 위해서 선민사상이 의도되었으나, 일종의 필로니즘처럼, 그런 선민사상이, 바이러스도 아깝다는, 이름도 예쁘게 치장하면, 지옥을 전부 자기가 뒤집어 쓰는 절대 형이상학의 파이널카운트 다운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를 가지고 있는 언어는 무엇인가? 데커트? 그것은 영어인가? 아니면 한국어인가? 지저스 크라이스트. 영어인 것이다. 영어는 자기들이 지저스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주선과 같고, 서로에게 자유로우며, 우연적이고, 자연적이며, 우리가 야호하는 것이, 여호와는 아무 상관 없는 것처럼, 우리가 돌을 던지면, 반드시 그것에는 그 옛날의 화석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고고학이라고 부르는 것, 생물학, 의학, 종교학, 조류학, 비뇨기학, 질본학, 질본대로 말하라 학 같은 것은 모두, 근대의 학문인 것이다. 현대의 학문인 것이다. 그러니 그 모든 말들이 이상한 것이 아니겠는가? 공룡의 뼈 하나를, 토마스 아퀴나스가 들은 적이 없는 것이다. 아니면 너무 뼈가 많이 나왔을 수도 있다. 틈만 나면, 먹을 것이 부족하고, 틈만 나면, 땅굴을 팠을 것이니, 행동은 하나이고, 단순한데, 결과가 늘 거대한 것들인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사탄의 심성이 강한데, 그런 것들을 보면, 반드시 사탄이 되었을 것이고, 혼자가 되어서, 신 앞에서, 반드시 사탄을 신봉하게 되었을 것이다. 여자들의 옷자락이라는 것은, 푸른 옷소매와는 달라서, 늘 그렇게, 치맛바람, 보릿고개, 사탄들의 자연 순환 사상 같은 것이다. 자연은 순환하나, 사골곰국도 순환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자연처럼 귀엽고, 예뻤으나, 여자는 점점 솔직한 근대적인 커밍아웃적인 사탄학으로서의 공룡학을 닮아가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은 기독교는 자기들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무리 영어가 좋아도, 그것의 세포가 부서지는 것은 이틀도 걸리지 않는다. 이 씨팔일은 너무 길다 생각된다. 지금 사탄들은, 거울로 자기를 볼 때, 너무 귀엽고 예쁘고, 밝고 화려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드디어 써바이벌이 시작되는구나 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아주 극단적으로 말해서, 한국이나 일본에서, 그나마 사탄의 자연 순환 사상을 몇 가지 가져와서, 홍콩이, 그 때문에 공백이 조금 생겨서, 그랬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포위당한 느낌과, 자포자기의 느낌, 한번 커밍아웃, 그리고 열 번의 커밍아웃,
그런 것들로부터
2020이, 우리 모두 조금 자유로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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