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건축이야기

서양은 갈림길에 있다.

by 마음대로다 2019. 7. 25.

서양은 갈림길에 있다. 





전치사가 그것을 위해 있진 않았을 것이다. 아름다운 의문대명사나, 명확성을 위한 가주어 진주어가 그것을 위해 있지 않았을 것이다. 뭐든지 명확한 것이 좋고, 뭐든지 아우르는 것이 좋으며, 뭐든지 인격이 드러나는 것이 좋다. 사람들은 늘 대충 말하고, 개똥 철학을 주고 받으면서 산다. 한국전쟁이 아니었으면, 사탄이 자기들의 예술 범주를 우리에게 나누어주지 않았을 수도 있다. 우리는 사탄에게 그것을 상의한 적이 있는 것인가? 나는 상의한 적이 없지만, 다른 개똥 철학자들은 모르겠다 싶다. 정신적인 아픔이 있던 가수가, 피를 토하는 것 같은 지방시를 노래하자, 성형 미인처럼 보이는 여자가 눈물을 감추지 못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개똥을 대충 보거나, 친구들과 보거나, 약과 함께 연상을 해서 그렇지, 진짜로 개똥을 보면 개똥 철학 개똥 철학 하는 말을, 보통의 유튜버들이나, 소설가, 철학과를 다니는 사람들은 싫어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괜찮은 철학마저도, 이해할 수 없다는, 이해의 범주를 내밀어, 시는 이해하는지, 개똥 철학이라 불렀던 적이 많다. 서양은 우리들의 파르테논이 되었고,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자아비판하면서, 파죽지세로 온 몸이 죽창에 찔려 죽는 것을 마지막으로 여겼다. 말이 통하지 않는 이들과는 대화를 피하는 것이 좋다. 대통령이나 정치인들은, 말이 통하는 것들인가? 아니면 명색이 그러한가? 처음에는 개똥의 빛깔이 독재정권에게 있었다. 그들이 분주히 개똥 집을 만들고, 그것이라도 약에 쓰고자 하는 사람들을 줄세우면서, 나름으로는 한국에서 오래 살았던 것이다. 그것은 화소와도 같다. 영남 사람들이 영어를 잘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어쩐지 그렇게 영어를 잘하려고 해도, 잘되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호남 제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태조 왕건이 호남 사람들과는 어쩌고저쩌고 하라고 했다지 않은가? 그런 개똥들에, 자기 온 몸과 영혼으로, 주화입마를 하는 것들이 있다. 죽는 것보다는 낫고, 늘 죽음과 개똥 보다는 낫다는 기가 막힌 화소가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진화가 어렵고, 온 몸이 주경철 박사처럼 가시밭길인 것이다. 그러니까 바르트의 백색의 신화가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갖는 기본적인 색감으로서의 개똥이 문제인 것이다. 우리들에게는 영화도 개똥이 있고, 우리들의 어린 시절 친구 이름 중에도 개똥이가 있었던 것이다. 악어적으로 활을 쏘면, 너무나 들어맞아서,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그의 부모님은, 세상을 향해 도무지 나아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우리들의 독재 정권은, 우리들의 천국처럼, 어쩌면 우리들의 출구를 위한 미학적 마감재가 아니었나 싶다. 결국은 일본 정치인들이 한국화가 되어서, 한국 정치인들이 하지 않는 일들을 저질러주니 말이다. 그만큼 한국 정치인들은, 주자인 나를 향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같은, 매우 기본적인 인지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중요하다. 반면에 한국 정치인들도, 입장이 불분명하였기 때문에, 본질과 속내를 모르는 일본 정치인들이 사탄과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나의 말과 글이 한국을 돌고, 일본과 중국을 돌며, 세계를 도는 것 같은 화소는 별로 중요치 않다. 성형 미인인 것 같은 여자도, 그와 비슷한 세포 속에서, 울컥하지 않는가? 어떻게 소년 하나가, 북한군과도 싸우고, 미군과도 싸우고, 일본군과도 싸우며, 못된 선배들을 이겨내며, 시를 읽고 해석하고, 영어 공부를 잘하며, 수포자가 되지 않고, 학교에서 발표도 잘하고, 진학하여 사람들의 리더가 되고, 전세계 레즈비언들에게도 리더가 될 수 있겠는가? 소년 하나는 불쌍한 개똥이인 것이다. 그렇게 성형 미인인 것 같은 여자가 울컥한 것이 당연한 것이다. 우리가 수많은 노래를 듣고, 형이상학을 이겨낸 것 같은 착각은 처음 칠년 동안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다음 칠년 동안은, 그와 같은 소가 다른 소를 잡아먹게 되는 것이다. 성경에 나온 말이 아닌가? 우리는 성경 속에서도, 좋은 화소를 좇아, 세계 여행을 삼일 만에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모든 안좋은 에피소드들이 살아있는 시체들처럼, 우리들의 가난한 철학을 덮쳐 오는 것이다. 철학자가 나치에 협조했다는 내용이 차라리 나은 느낌을 줄 때가 있는 것이다. 좀 더러운 데서, 개똥 철학이 들어온다 싶으면 괜찮은데, 스스로도 만족스러운, 매우 꾸미기를 잘한 곳에서, 누군가 내 코에 개똥을 집어넣는다면, 이제는 상실의 시대에 이르지 않겠는가? 영국 문학이 아름답고, 영국 영화가 개똥이 되는 것은, 그와 같은 레이어의 차이 때문인 것이다. 손더게스트나, 프리스트를, 이제는 어떻게 할 줄을 모르는 것이다. 너무나도 반복적인 문학 경험 때문에, 문학과 비평을 이렇게저렇게 알 수 없는 인과들로 가득한 세계들로 만들어 놓고, 영화는 무조건 고통스러운 배관공의 세계를 꿈꾸었던 것이다. 배관공으로 갔는데, 그곳에서 낸시와 하는. 그리고 그와 같은 관점으로 보면, 전 세계의 사탄의 구도를 완벽하게 읽을 수가 있는 것이다. 만일 문학이 개별자들에게도, 해방적인 전능감을 선사하였다면, 스스로의 등급 하락을 방조하였겠는가? 영문학이 그렇게 미스테리이다. 공포영화는 도무지 자연발생적일 수가 없다. 당연히 형이상학인 것이다. 태어나자마자 공포인 것은, 일종의 서커펀치처럼, 빨면서 치는 것인지, 매우 이상한 권투, 상상을 초월하는 노력 끝에 도달하는 것이다. 문학적 전능성은 차단되었으나, 영화적 전능성은 수학적으로 환히 열려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거기로 한 번 인사하면서, 시드니 폴락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도 한국문학도 아니고, 영문학인데, 빛과, 이런저런 퀼트, 개똥이도 있지만, 수애도 있는, 서로 낭독회도 갖고, 꿈과 낭만의 이상향, 시집이 하나 나왔다고, 교회 친구 둘이서, 피크닉을 가서는 낭독회를 하는, 한 사람은 여자 친구가 있고, 악기를 연주할 줄 아는, 당연히 그와 같은 아이덴터티가 도시로 유학하면서 문제시 되겠지만, 유지되는, 유지인, 그를 중심으로 천사들이 트로이카를 만들어주고, 세상 아름다운 유화처럼, 자기들끼리 벗고창생하는 공간도 만들어주는, 그 모든 것들이 카세트 테이프의 길이 같기만 해도, 인생이란 반복하여, 소리내는 것일지라도, 그것이 훌륭하다 아름답다 말하지 않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우리는 지옥의 수학을 하고 있고, 우리들의 거짓말은 전부, 하나도 빠짐 없이, 지옥의 아리스토텔레스인 것이다. 우리는 햇빛을 보고 살면서도, 생각의 패턴은, 눈이 없이 촉각과 청각으로만 관계를 맺던 흙 속 검은 조상들과 비슷한 것이다. 


사탄이 전 세계를 도는 인공위성처럼 우리들의 땅과, 삶, 권력과 이야기 바깥을 도는 것일까? 아니면, 서양의 하는 짓 그대로, 비례에 맞지 않는 정치적 언사와, 그것의 노출을 덮기 위해서, 동양 정치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찌르고, 자극하는 것이 일상인 것처럼, 서양의 심부, 여러 장의 펜타곤에 있는 것일까? 만일 사탄이 인간과 별개로, 그러나 인간을 철저히 통제하고 있다면, 어떠한 인간이 자유롭게 세상에 태어나, 살아갈 수 있겠는가? 어떤 순간에는, 지능이 매우 떨어지지 않겠는가? 지능이 없던 사람은, 뱀처럼 따로 넘어질 데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의 권력이, 여러 개의 펜타곤으로서, 사탄이라고 한다면, 대체 어느 것부터 사탄의 짓을 시작할 것인가 고민이 되지 않겠는가? 거기서도 화폐의 가치가 급격하게 떨어지는 것은 한 가지인 것이다. 집에서는 빵도 안먹고, 유럽으로 여행을 가는 일본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정치 드라마가, 사탄의 얼굴을 매우 자주 보여주는 것은, 그래서 당연한 철학인 것이다. 우리가 옛날에, 학생 운동 때에, 부르조아 이데올로기라고, 거의 모든 관념의 탑을 개똥 철학이라고 불렀던 적이 있다. 그때는 야학도 있었고, 농활도 있었다. 그러니까 친구들과 농활을 다녀오고 나면, 사람들은 이상하게 김소월도 읽고 싶고, 다 읽고 싶고, 박목월의 시세계도 보고 싶고 했던 것이다. 김영랑의 생가도 으스스하게 지나기도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