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아름다운 사탄
우리가 삼일 독립선언서를 읽거나 들을 때,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학교 제도가 있어서인 것이다. 그것이 학교 제도에 의지하지 않아도 독해가 가능했던 것은, 우리가 공동체적으로다가 너무나 막대한 고통을 당해서인 것이다. 그것은 어제 누군가와 이야기했던 것처럼, 식후작업하겠습니다 하는, 발음이 불분명해도 그런 말은 귀에 쏙 들어오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이다. 그것을 두고 로고스적 존재, 인간의 언어적 본질이라고 하기도 그렇고, 안하기도 그런 것이다. 우리가 독립선언서를 두고 하늘 높이 여기는 것은, 그것이 역사적 산물이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역사라는 말의 구조주의적 본 뜻이 그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동시에 그것이 우리들의 심장에 정확히 안착하는 것이, 전혀 다른 사회적 구조에서는 불가능하겠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모든 캐츠프레이즈에서 드러난다. 그리고 우리는 영원히 불가능할 것 같은 지행합일의 완벽한 파르테논에 있는 것이다. 손오공의 경우처럼, 근두운이 내려와, 우리와 함께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너무나 숨이 막히고, 두렵고, 떨리고, 그것이 우리가 산 높은 곳에 있어서, 추워서 그런 것인지, 지행합일의 존재론적 칼날이 너무나 두려워서 그런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대게의 인간 물텀벙들은 지행합일이 없고, 그것을 등한시하거나, 다만 관료의 권력으로 살기 때문에, 그것의 학교제도가 결과짓거나, 미래를 약속하는 타임 머신 안에서는, 내 목숨이 두려워서도 떨리지만, 역사 바깥에서의 선대 사람들의 죽음과, 사람들의 미래적 죽음에서도 두려워 떨리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가장 우리 몸과 마음이 이상한 것은, 마가의 다락방의 경우처럼, 사도 바울이 가르칠 때에 피곤하여 이층에서 떨어져 죽은 젊은 사람처럼, 분명 학교보다 어렵고 빽빽하며 힘이 부친데도 불구하고, 성경은 늘 언제나 자기들의 노력에서 그런 것이 아니다 하고, 성령이 이끄신대로 했다고 하고, 준비도 안 되었는데, 가라고 하고, 다만 따라다니기만 했는데도, 베드로는 전후서 사도바울처럼 근사하게, 보기에 따라서는 더욱 근사하게 신학 편지를 잘 쓸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시황제 경전이라고 부르는, 동양의 모든 자짜 돌림 고전들도 그러하다. 그것을 읽을 때에, 시경처럼 읽을 수 있는지, 아니면 성경의 높은 철학처럼 읽을 수 있는지 좀체 분간이 되지 않는 것이다. 내가 깊은 잠에 들어, 설악산의 봉정암에 누군가의 등에 업혀, 그런 등. 산. 올라, 깨어나 돌아보니, 시스루 한복을 입고 있는, 내 여자들 중에 넘버 나인이 있는 경우, 그래서 나인? 마. 사. 까. 미시마 유키오. 그래서 점심을 먹기 전까지, 자연을 향유도 하고, 나의 자유에 저 깊은 등급의 차원까지 아무런 장애가 없다 하면, 내가 무슨 말을 하려다가, 아무튼 동양의 고전은 그 다음을 무엇으로 해야할 지 좀체 구분이 되지 않는 것이다. 동양의 무협이 홍콩 저 깊은 시간에 이르기까지, 그것도 깊어서, 의미가 있는 것이, 그와 같은 문제를 풀어내려한 마지막 시도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처음으로 한국학적 문제제기에 봉착한, 자연스러운 반응이었을 것이다. 황제의 교육을 위한 것이다고, 누군가 호랑이뼈 연고 비슷한 것을 바르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 말에 반응을 하면서도, 그래서 서투른 해석을 하는 학자나, 훈장, 그리고 영원히 서투를 수 밖에 없는 지방의 도련님들을 상상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정말이지 지저스 크라이스트, 사미인곡의 정철이 학자들을 고문하는 것 밖에 연상되는 것이 없는 것이다. 읽어서 정확한 것이 없다. 맹자가 정확하다는 것은, 당연히 논어가 있어서 그러한 것이고, 논어와 맹자가 정확하다는 것은 당연히 장자와 노자, 거기다가 순자와 열자까지 있어서 정확한 것이다. 그리고 한비자와 대학 중용은 어째서 있는지를 모르겠는 것이다. 묵경은 뭘 먹을 때마다, 대한 사람 대한으로 우리나라 만세 하는 것으로 이끈다. 묵자로 하기에는, 경전의 느낌마저 있는 것이며, 말 그대로 고린도전후서 그리고 요한일이삼서와 함께 읽으면, 허구한 날 저녁에 죽어도 좋은 것이다. 그와 같은 것이 되는 것이다. 정확히, 그 모든 경전들을 익혀서, 될 수 있는 것이 없으며, 정확히 허난설 헌 같은 소설이 아니면, 다음의 최진행을 기약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가 나이가 들어, 결혼도 파하고, 직업도 있는 둥 마는 둥 하면, 오랜 친구를 만날 때, 만나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그와 같은 최진행을 기약하지 못하게 된다. 그럴 때가 생기게 된다. 그와 같은 히말라얀 상태에서, 얀느, 혹은 얀테, 그리고 YMMU라는 콘테이너 이름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도 아니고, 그렇다고 소크라테스도 아닌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황제를 교육하기 위한 서적이라는 말이, 정신 내부적인 지적이 아니고, 순전히 때려맞힌 외부적인, 혜성과 같은 충돌이었을지라도, 그것의 어쩔 수 없는 단단함을 이겨내기가 어려운 것이다. 사람들에게는, 예의와 권력을 가르치고, 황제에게는 통치의 여러 다정한 생각들을 가르치니까 말이다. 민중의 사람들에게 애민을 가르치는 것은, 채널이 이상한 것이고, 말만 통했을 뿐이지, 착용하여 기쁨을 느끼는, 자기 소유의 장갑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째서 미움이 생기는 것인가? 어째서 욕망이 발생하며, 그것은 어느 선까지 정당한 것인가? 미움과 섹스가 사탄에 의해서 조정되었을 때는, 사람이 어떻게 형태가 이상해지는 것인가? 하는 내용은 없는 것이다. 황제의 교육의 차원에서 벗어나, 민중들이 홀로, 동학군의 전봉준처럼 그것을 읽었다면, 그러니까 최제우 최시영과는 다른 것이다. 그것은 동양 권력의 반만년 역사를 가로지르는 것이며, 드디어 삼국사기가 비좁은 왕권의 역사에서 벗어나는 것이 되는 것이다. 민중들에게 미움은 상시적인 것이다. 권력이 자금이 부족할 때, 수탈할 것이 아니라, 민중들의 미움을 관리하여 몇 개씩 추진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수탈하여도, 민중들의 미움을 몇 개씩 새로 파면, 사람들의 관심은 그리로 향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 영원한 우물 안에, 아이들이 있고, 영원한 아이들이 있으며, 시황제의 고통이 있는 것이다. 노자와 장자가, 유독 자연스러운 것은, 자연에 있는 사람조차, 읽을 수 있는 내용이다는 의도와 의지가 있어서일 것이다.
예수님이 생기고, 얀네, 얌브레, YMLU, 금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정비되었다. 사람들은 전도해도, 금세, 전기적인 양가성을 띠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정한 전도라는 것은, 아름답고 감동적이며 스펙타클한 영화가 나왔을 때, 그것을 두고 영화평을 아름답게 달 수 있는 칼럼리스트가 있느냐 하는 것인 것이다. 홍콩 영화는 동양 고전의 황제 교육의 철학적 이념에, 반하면서도, 결국은 항복하고 말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노자와 장자와 같은 칼럼리스트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것은, 사탄의 나라에서 좀비 영화를 찍는 것처럼, 우리 자신이 그냥 연속극 같았기 때문이다. 연속극은, 누군가의 말처럼, 러시아 사람들의 마지막 보온의 기능을 해주었다. 그러니까 연속극이 아니라, 심령적인 포르노였던 것이다. 혼다의 포르자라는 스쿠터의 이름도, 원래는 보드카였던 것일 것이다. 우리는 모든 말에 책임을 져야하는데, 그렇게 감옥에 갈 것 같아도, 막상, 지금은 없는 야마하 막삼, 가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렇게 후퇴한다. 결국은 전도되어, 숱한 방향으로 전기가 들어오고, 숱한 방향으로 빠져나가게 되는 것이다. 배터리가 전선보다, 존재의 관점에서는 나은 것이, 거기에는 끝이 있기 때문이다. 배터리는 자의식이 있다. 그러나 전선에는 아무런 자의식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전선을 높게 여기면서도, 때로느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은, 예수님이 항상 비유로써 말씀하시는 것과 같은 이유에서인 것이다. 전선 같은 사람이 있고, 배터리와 같은 사람이 있다. 원래는 그리스 철학에서도 죽는 사람이 많이 나왔고, 예수와 아볼로, 그리고 바울에게서도 죽는 사람이 많이 나왔다. 다만 황제의 교육에 따른 것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그와 같은 존재의 실체를 두고 싸웠던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상상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문건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지, 스스로의 생각에따라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때문에 카톨릭 여러 철학들처럼, 그것이 혼융이 되어있는 것은, 다만 우리의 영향 때문이지, 스스로의 자연은 아닌 것이다. 틈만 나면 신체가 절단되고, 처음에는 잔인하다 하였으나, 뭘 하나 배웠다고, 갈등의 재미가 반복되어서, 둔감해지고, 마침내는 예수 그리스도로 뭉쳐있는 카이사르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들이, 자기를 솔로몬 앞에서 구분짓고자 하는, 인간 소우주적인 성전으로 확립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모르지만, 그만큼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막강한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피라미드를 성경과 늘 연결지어서 그렇지, 플라톤과 연결지으면, 내일부터 당장 그럴 수 있는 것이다. 힘이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사탄은 그 모든 정신들이 즐겁고, 향연 같고, 자기들의 정신적 권력을 막강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무슨 마태, 마가, 누가, 요한, 기쁨이 넘쳤던 것이다. 그러니까 아무런 본질적인 힘이 없는, 드라마적, 영화적인 공자 사상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래서 사탄의 권력자들이 그 추운 날에도, 처음에는 이집트에서였으나, 짐승과 자기를 정확하게 구분하는, 인간적이고 건강하며 반듯한 신체를 과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인간의 정신이 본질적인 힘을 잃고 나면, 당연히 지금도 회전하여 전기를 일으키고 있는 그곳으로 우리는, 흐르는 강물처럼, 흐르게 되어 있다. 내가 언젠가 말한 바 있는 것처럼, 현대의 숱한 영화들은 항상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탄에 대한 믿음을 감추지 않고 있다 했는데, 이렇게 정리하다 보면, 그 말이 없지 않아, 그들의 믿음도 마찬가지, 대단한 실체적인 근거를 갖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건축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양의 절망 (0) | 2019.07.23 |
---|---|
어떻게 우리나라 말은 세계적이고, 그것의 원인은 무엇인가? (0) | 2019.05.22 |
우리는 과연 강요된 이데아를 상상할 수 있을까? (0) | 2019.04.17 |
빌딩 같은 우리나라 여배우들. 국가는 무엇과 같은가? (0) | 2019.01.27 |
과연 한국 전쟁은 언제부터일까? (0) | 2018.12.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