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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이야기

과연 한국 전쟁은 언제부터일까?

by 마음대로다 2018. 12. 11.

과연 한국 전쟁은 언제부터일까? 






부산에서 이상한 젊은 스님이, 몸이 아프면 가족도 없는 것이거든요, 그런 식으로 내게 분발심을 자극하는 것이 우습고, 이런 것도 다면체의 미학인가 싶어서, 같은 자리에서 두 번 우습고 그랬다. 머리가 아프면, 몸이 아프면, 글이 진행이 되지 않는다. 아름다운 사람으로 걷지 못하면, 베엠베를 타는 것 같은 철학적 가식으로도 나아가야 하는데, 몸이 숱한 내면적 프랭키들로 고통스러울 때는 아무런 전경이 확보가 되지 않는다. 가족을 사랑하라는 것 같았다. 가족은 불쌍하다. 사회적 성공인자들이 선험적인 것이라면, 가족들은 평범하고, 사회적으로 절대적으로 성공하지 못할 것 같은 사람들이다. 나의 말과 글들은, 그렇게 다보탑의 아름다운 허공으로 진행하기 좋아하는데, 절로 진행하는데, 현실은 늘 언제나 어마어마한 석가탑의 수직과 거대한 면 아래에나 있는 것이다. 가족들은 티비에 등장하는 사람들만 같고, 다보탑의 아름다운 공기에 있지 못하고, 얇고 어려운, 그 옛날 슈퍼맨 영화에서 감옥이라 설정되어 있던, 액정 화면에 갖혀 있는 것이다. 다보탑은 보이나, 엄밀히 말해 석가탑에도 이르지 못하는, 저 멀리 고려인 강제 이주의 이집트 피라미드에나 우리들은 살고 있는 것이다. 글자는 아름다우나, 해석하면 생명의 양식이 되지 못하는, 그렇게 설정되어 있는 시간이라는 것은, 절망 그 자체가 아니겠는가? 학교는 계곡과 같고, 하루키가 보고 싶어 했던 유니콘들이 쎄브럴 그러니까 여기저기 눈에 띠고 배회하는곳이다. 불국사를 그렇게 아름답게 지을 것이면, 아예 바닷가까지 장관을 이루면서, 사찰을 짓고, 천불천탑, 탑을 지을 것이지, 다녀오면 너무 작은 것이다. 뜨거운 인체를 닮아서, 데이스타를 타고, 야간 주행을 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으나, 도착한 부산 영도까지 불국사라고 하면, 부산에서 평생 살면서, 불국사 한 번 제대로 다녀오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되겠는가? 확률이 굉장히 궁금했다. 광주 사람들은 그런 사찰이 없기 때문이다. 부산에 살면서, 불국사에 한 번 가본 적이 없는 사람. 손 더 게스트? 얼마나 많겠는가? 호떡 사먹고. 외국 잡지 사보고. 일본 갔다오고. 학교 공부 바쁘고. 취직 공부 바쁘고. 시험 보느라 바쁘고. 결혼하느라 바쁘고 하지 않았겠는가? 우리가 기단에 있는가? 그나마 나를 위해, 사람들의 관념의 진행에 관심을 가질 만큼은 되는 것인가? 또 다시 알 수 없는 열이 올라온다. 그만큼 인간은 약하다.세상 쉽고, 보편적이며, 누구나 입학할 수 있는 다보탑 시험마저, 행여 통과하지 못한 사람을 귀신들이 데려갈까봐 치르지를 못하는 것이다. 


만일 인간이 부산에 살면, 불국사에 한 달에 한 번 정도, 평생에 단 한 번 정도 다녀올 수 있는 존재라고 하면, 세계는 사탄의 지배에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한국과 한국어가 주자의 평생에 걸쳐 도드라지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누구는 에베레스트도 다녀오는데, 사람들은 개인적 존재에 걸쳐 아무런 잉여 가치를 생산하지 못하는 것이다. 생산 경험이 있는 사람만이, 비슷한 꼴의 인간에게 관심을 갖게 되는 법이다. 다보탑을 좋아하는 이유는, 나의 글쓰기가 그것과 닮아서인 것이고, 다만 그것을 감지하고 좋아할 줄 알아도, 개인적인 내면적인 이력이 있는 사람은 모두다 좋아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남자친구 드라마를 보면서, 순간순간 채널을 돌리고, 순간순간 억지와 판타지로 보고, 순간순간 리얼리즘 비평을 행하며, 대학을 다닌 적이 없지만, 인간의 종합적인 감각은 그것을 분명 알아서, 어느 때는 이제는 나머지 내용이 무엇일지가 정말이지 내 일처럼 궁금해지게 되는 것이다. 불국사의 스님들이 아무 것도 아닌 석가탑을, 마땅한 핑계가 있어서, 분해하고 다시 쌓은 것도 답답해서일 것이다. 미륵사지 석탑도 그러하다. 굉장히 야만적인 생물 같았던 것이, 단정함과 항목적 미학의 독재자와 같은 나를 만나, 그와 같은 신비한 가치를 모두 버리고, 탑으로서 재탄생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대는 어떻게 하겠는가? 석가탑과 다보탑을 부인하겠는가? 다보탑을 부인하겠는가? 그렇다면 사람들은, 부인하면 살려주겠다는 것이요? 아니면 부인하지 않으면 살려주겠다는 것이요? 물을 것이다. 무등산의 뒷 모습처럼 거대한 칼을 쥔 나로서는, 도리어 그 질문에 영원히 멈춘 모습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태양 만이, 청룡언월도 같은 산세 위로, 뜨고 지고, 높히 진행하고를 반복하는 것이다. 우리는 다보탑을 부인하지 못한다. 드라마를 부인하지 못한다. 우리가 남자친구를 부분적으로 보면서, 탄식하고, 여자들은 일어나서 박보검 박보검 하듯이, 어떻게 하다가 그런 소리를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들었다, 그러니까 그것은 일종의 생존의 신음 같은 것이다. 관절이 돌아갈 때마다, 생각이건 신체건 간에, 여자들은 한 사람의 임을 구하게 되는 것이다. 너무 병에 걸린 것 같지만, 병사가 있어야 장교가 있고, 전체 육해공 군인들이 있는 것이 아닌가? 남자들은 송혜교 송혜교 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여자들도 그렇다고 할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여자들을 위해서, 송혜교 송혜교 한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입술에 뽀뽀를 하고 싶어도, 너무 유에이치디해 보일까봐 꺼려지는 것이다. 대신에 그 순간순간적인 임팩트가, 그렇게도 석가탑과 다보탑의 교체기 같은 것이다. 내가 언아이덴티파이드, 그런 비행물체로 늘 언제나 다보탑을 향하니까, 아름다움을 향하니까, 어려운 말을 할 때는 우주까지의 높은 면과 같은 석가탑을 지나니까, 우리 세대는 그와 같은 것에 눈을 뜨게 된 것일 것이다. 어떻게 돌과 함께 바다에 가라앉겠는가? 아니면 화해하고, 다만 입도 벙긋, 나쁜 말은 가족들에게 하지 않겠는가? 내가 가난하여도 돌아다닌 길을 보면, 돌아볼 신이라는 한자가 지금은 지워지고 없는데, 신과 같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영원히 알 수 없는 거리도 아닌 것이다. 


얼마나 서양의 건축물은 슬픈지 모른다. 지고선이라는 것은, 슈프리마 보누스? 그들 중세로부터의 신학적 체계이기도 한데, 그래서 전통 형이상학이라고 하면, 도대체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어거스틴이나 아퀴나스, 그리고 군소 신학자들을 거쳐, 지금까지도 학습 가능한 조직신학적 체계를 가리키는 것인지, 헤겔은 어디에 있는 것인지, 우리로서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당사자는 몰라도 된다. 나그네는, 기억에 남지 않기 때문에, 시간이 다만 유도되어 지나치게 엎혀진 것으로 끝이 날까봐 걱정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리적 당사자는, 여기저기,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천주교 권역의 사람들은 편안하고, 영원히 모르는 상태로 죽어도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그네가 될 것인가? 그렇게 자문해야 하는 우리로서는, 그것의 차이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가지런한 기둥 구조의 건물들은, 그것들의 반복적인 층들의 결합은, 분명 형이상학을 가지고 있다. 적어도 먹을 것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영원히 전쟁하는 탱크와 같고, 슬픔과 기쁨이 미래를 향해 끊임없이 교차하는 것으로 있다. 그러나 주자의 전쟁 중에 발견하게 된 체계라는 것은, 우리에게도 아름다움의 극치와도 같은 그들 신학적 철학적 체계가 아니다. 일종의 중간 악마와도 같은 시간이며, 생명체들인 것이다. 철학적 체계는 학생들을 향해 있으며, 우리는 전력으로 노력하다가, 비슷한 다보탑을 내비치고는 졸업하는데, 졸업하여 죽기까지 만나는 것은 중간 악마들인 것이다. 시황제는 한비자를 마지막으로, 마땅한 저작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 그러니까, 자기가 인류의 끝에 이르기까지 유일한 내면적 신학자가 될 것이라는 생생한 유언을 남기지 못한 것이다. 베드로 전후서가 자기의 저작이고, 요한일이삼서가 몸이 많이 아플 때 쓴 것이라는 말을 어데고 남기시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까, 생각보다 죽음이 빨리 닥친 것인 것이다. 그것의 속도는 오직, 중간악마들의 침입으로 밖에 다른 것을 생각할 수가 없다. 중간악마는 신학적 체계와 공존하는가? 아니면 인자와 절대적으로 대립하는 것인가? 우리가 고작 몇 년에 걸쳐 경험하기로는, 신학적 체계와 별로 갈등하는 것 같지 않은 것이다. 서양의 신학자들은, 최후의 인간들은, 나의 이 말에 아우성을 칠 것이다. 자기들과 같은 교양인들이, 학습자들이, 세상에 어디에 있겠느냐고 말이다. 에베레스트에도 오르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아느냐고 말이다. 한국은 항상 그렇게 하다가 당하고 말았다. 그 두 가지의 것을 때로는 하나로써 여길 줄 아는 강력한 마음이 없어서일 것이다. 지옥이나 악마의 존재를 우리는 따로 찾아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중간 악마라는 것은, 형식미만을 과시하다가, 자기 자식들은 질식시켜 죽이고, 주자가 내면적인 신학을 이어가면, 오직 그리로만 콧구멍을 향하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뻔히 보고도, 인정이 넘치고, 별다른 형이상학적 체계를, 갑옷처럼 입지 못하는 사람은, 다만 같은 영원적 객체가 되는 것이지, 단순하고 소박한 내 친구 같은 주체는 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반복과 강화는 갈수록 선명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