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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민중문화이야기

팔루스 센추리즘: 슬픈 앙드레 개그뇽.....

by 마음대로다 2018. 11. 26.

팔루스 센추리즘: 슬픈 앙드레 개그뇽.....






오늘은 내 생일이다. 와따시와. 애니웨이. 생일날 현정이를 만난 것 같지는 않다. 고등학생일 때는 학교 생활 때문에 내 생일에 둔감했을 것이고, 대학 다닐 때에는 그와 같은 반근대 봉건주의 시대의 잔재 같은 것은 따지지도 묻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여자 친구가 있었다면, 불러내었을 것이나, 그때부터는 이데올로기가 부식되기 때문이다. 정말 여자 친구가 있고, 내가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적극적이고, 나는 영원히 부족한 문학 공부를 하고 있고, 우연히 자취방에 찾아왔는데, 문뜩 내 생일이었다면, 나는 오케이 도장을 찍어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무슨 국왕의 잔치마냥, 생일이랍시고, 불러내고, 케익을 먹고, 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래도 안 생일인 적도 없었다. 적당히 알아주는 사람들이 반드시 있었고, 이상하게 생일 선물이 빠진 적이 없으며, 자동차나 오토바이, 크루즈 여행권 같은 것은 아닐지라도, 옷 같은 것이라든지, 겨울 옷 같은 것이라든지, 그리고 청소년의 우주 안에서는 정말이지 손편지 같은 것도, 내가 준 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다가 받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뭐 그렇게까지 안 생일인 적도 없었던 것이다. 나 혼자서라도, 수원역이나, 팔달문 근처의 영화관에 가서, 혹은 무등극장이나 제일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고, 가볍게 서점에 들러, 내가 나에게, 책을 선물하였을 것이다. 담아가실 건가요? 점원이 물으면, 사람들은 전부 그 날이 내 생일 날인 것을 알아서, 내가 예 하면, 속으로 소화가 안되고, 슬프고, 울컥하고, 클러치 오토바이를 타면 그렇게 울컥할 일이 많은데, 능숙하면 조금씩 부드럽게 기아 체인지가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점원은 전라도 어느 산의 석불이 되어서, 감정을 감추고, 내게 계산된 책을 봉투에 담아 건내주었다. 책은 무엇인가? 책은 도시와 같다. 보통 체크 카드라고 하지 않는가? 현균씨는 일부로 성욕을 감추거나, 일부러 성욕을 승화시키면서 사는 것일까? 나는 참 그런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나의 학상 시절 별명이, 색마는 아니었으나, 아무나 붙잡고 반 아이들이 그렇게 부르면, 그것의 대상 중에 항상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대신에 다른 색마 색골들은, 실제로 학생들 공부하는 시간에 여학생들을 만났고, 나는 다만 교회 사람들을 언급하는 것에 불과했고, 그와 같은 불빛이 광주에서 갑자기 사라졌던 것에 그쳤던 것이다. 여자를 밝히는 것. 저녁에 환히 불을 밝히는 것. 그것은 대체 무엇일까? 그리고 그와 같은 태국어학과 출신, 한국 대표 배우 안성기에 가까워진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우리는 반드시 부산이 있다. 공부의 부산은 무엇인가? 영화가 아닌가? 공부의 부산이 공부이고, 바로 그와 같은 공부의 부산이 공부인 사람은 천재일 것이다. 천재의 과정인 것이고, 다만 성실할 뿐인데, 천재인 것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대게의 경우에는, 공부를 하다가, 부산해지고, 조금 부산해 있다가, 공부를 하면 다행이나, 잠을 자는 것이다.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은 그렇게, 잠을 많이 잔다.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한다. 사람을 형태를 갖고 나누어서는 안 되지만, 그들은 분명 부산 출신인 것이다. 물론 광주 출신도 있다. 그것이 공부를 한다는 의미에서 공주 출신과는 다르다. 공주가 좋은가? 아니면 광주가 좋은가? 광주에는 공주가 포함되어 있다. 그렇다면 강주는 어떤 것인가? 강객주인가? 어디선가 들어보았던 이름 같은데. 만일 강주도 공부이고, 공주도 공부이면, 그리고 그것의 옛 이름이 무진주이면, 너무 이런 성명학적, 지리성명학적 소설로다가 사람들을 가두고, 영혼을 함양시키고, 담양시키고, 정읍케 하여서, 사람들의 키와 같은, 그것들을 모아서 다만 거대할 뿐인 내장산을 뚫고 하늘을 오를 수 있는 것 같은 것이다. 오토바이를 타다가 사라지고, 사람 없는 높은 산의 도로에서, 보다 솟아오르는. 지리산의 노고단을 오르는 것에도, 그와 같은 기미가 엿보인다 하겠다. 보통의 절에도, 사람들은 같은 영혼의 맞바꿈 같은 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 우리가, 독재 정권 아래서, 영화 제작자들과 아닌 사람들이 연대하여서 담아내던 필름들. 산딸기. 산딸기. 산딸기. 그렇게 차창 가득히 군내 버스를 타고 지나다 보면. 내가 영혼을 줄 터이니, 세상이, 나의 가난한 나라가 이것 이상이라는 것을 내게 보여다오 하는 것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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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는 어디서부터 탈락하는 것일까? 탐라도라는 말에는, 목소리는 어디서부터 탈락하는 것일까? 하는 것 같은 것이 있다. 충청도도 좋고, 강원도, 경상도, 전라도도 좋다. 그것이 서울말씨로 접어들고, 저마다 공부하고 있던 방에서, 모든 사투리가 빠져 나가는 것을 경험하는 것도 좋다. 오랫동안 광주 집에만 있었더니, 사람들이 나더러 광주 분이 아니시냐고 했다. 아니요? 반문하였더니, 사투리를 쓰지 않는 것 같아서 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서울 사람인가? 서울은 얼마나 사투리가 심하고, 의리가 별로 없는가? 영웅본색을 보고 서울 사람들이 열광을 하였던 것은, 그들에게 없는 것이 자극을 받아서, 전기 자극을 받아서, 마음 가득히 통닭 구이가 되어서 그랬을 것이다. 의리를 갖기가 부족한 사회 환경이다. 보이는 것이 그렇고, 들리는 것이 그러하며, 방송국도 늘 지방으로 같은 말이지만 로케를 떠나기 때문이다. 공부하는 학생 같은, 그런 달동네의 정다운 지적 풍경 같은 것은, 사실 묘사되기가 어려운 것이다. 방송국에서 그것을 묘사하기가 어렵고, 그렇다는 것은 결국에는, 방송이란 선비가 길을 지나다가 목이 마른데, 물을 청하니까, 얼굴 고운 아낙이 바가지에다 우물물을 떠서, 버드나뭇잎 하나를 놓고 건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 서울은 원래 지방이고, 솔로몬이 아니고, 항상 국회의원들의 정치적 행보에 관심이 많다보니까, 공부는 별로 않고 지방으로 지방으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공부에 사투리가 있다. 그와 같은 인정과 리미니쓴쓰, 추억이 얼마나 높고 아름다운지 모른다. 그러나 주자를 앞에 두고, 분명한 문학적 이슈를 앞에 두고, 자기들끼리의 비유에 골몰하고, 사투리가 아닌 새로운 카테고리를 쓰기 시작하다 보면, 주자의 항거와는 다르게, 처음에는 조금 비슷해 보일지라도, 결국에는 매우 색다른 뉴요커들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영어는 못하는. 일종의 뉴저지주 같은. 사탄이 의미적으로 관통하여, 지방 관리하게 되는. 그것의 앙드레 말로는 정말이지 참혹하다. 우리에게는 낙차가 있고, 그렇게 비행기에서 추락하는데, 시간이 육십년이 걸릴 수도 있다. 중간에 착하게 되면, 의리에도 착하고, 자기 생각에도 착하게 되면, 돈을 들여 정성껏 동남아 여행이라도 다녀오게 되면, 목소리는 서로 다시금 붙고, 촉촉해지고, 공부 중에 사투리가 나오고, 방송국의 시작으로서 가리킴을 받는 사람이 되고 그렇다. 다시금 추락해도, 그만큼 올랐기 때문에, 시간이 더욱 걸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외국은 그렇지 않다. 일본은 자기들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항상 추락하고, 미국은 어째서 산불이나 나지 지진이 일어나지 않는 것인가? 미군들을 학대하고, 모아놓고, 튀겨도 일본처럼 지진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애초에, 드라마에, 아무런 정신적인 낙차가 없기 때문인 것이다. 겨우 의자에 올라 잠깐 전등을 만지다가 떨어졌는데, 뭐가 아무 것도 없이 죽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