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스트에서의 전광석화의 현상학
우리는 기본적으로 슬프다. 속초에서 참이슬을 먹는데, 저녁으로 오징어 순대를 먹고, 다 먹지 못한 것을 싸달라고 해서, 바닷가가 보이는, 소리가 요란한, 모텔 방안에 가져가서 참이슬과 함께 먹는데 기가 막힌 것이었다. 오랫만에 마시는 소주라서, 세 잔 이상을 마시지 못했다. 처음에는 놀랐고, 두번째는 달았고, 세번째는 슬펐다. 오징어 순대는, 식당에서는 따뜻했다가, 방에 가서 먹는데, 차가워진 것이, 도리어 맛이 있었다. 이것이 다 무엇인가? 정유미를 사랑하는 마음이 아닌가? 우리나라 드라마는 갈수록, 나를 닮아가고, 윈스턴 처칠처럼 불독이 되어 가고, 슬픔의 영겁회귀가 되어가고 그런 것 같다. 우리가 케비넷을 보고 놀라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와 같은 개인 사물함이 생각보다 나를 잘 따라오기 때문이다. 먹을 것을 넣어두면 더욱 잘 따라오고, 향수나, 책 같은 것까지 넣어두면, 완벽한 지성소가 되는 것이다. 꼭 읽지 않는 책에다가, 단풍잎 책갈피를 놓듯이, 그 어려운 파스칼의 팡세를 사다가, 읽는 듯 마는 듯,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을 때, 정유미는 한결 같이, 내가 읽는 책을 조금 빨리 읽던지, 조금 늦게 읽은 것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내게 말하는 것이다. 말을 해야, 사랑인 것처럼. 어떻게 하다가, 이와 같은 문외한이라든지, 아마추어 같은 것들이, 전통과 계보의 기성 철학과 문학을 능가하게 되었는가? 신현균의 아가멤논 같은 에세이적 현상학이라는 것이 그렇게 대단한 것인가? 드라마 프리스트는 내가 현상학이라는 스크린을 펼쳐 놓으니, 그리로 쏟아져들어온 천주교 만화처럼도 보인다. 숫자로 보면, 그것을 더욱 잘 알 수 있다. 주자가 숫자 일에 해당된다면, 그것을 잠깐 따르는 것도 일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안데스의 산맥에 불어오는, 사막에 불어오는, 새벽 습한 바람 정도는 능히 되는 것이다. 그것이 가슴이 아픈 것이다. 사람을 더욱 애통하게 하고, 애통해 하는 자는 복이 있는 것 같은 것이다. 다만 기계적인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도리어 그것이 더욱 사람을 놀라게 하고, 경찰들의 여러 생각의 카테고리들을 자극하는 것이다. 너무도 놀라운 박일도 드라마를 보고, 프리스트가 그것의 아류라고 놓는 것에 우리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하루 이틀, 그리고 오늘 사탄의 힘에 눌려, 권총 오발 사건으로 여형사가 죽기까지 한 것에 이르러서는, 도무지 그런 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다. 어쩌면 박일도 드라마의 아류라고, 조금은 편한 마음으로 탤런트들이 참가했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천주교, 그것의 기능성, 그리고 사탄과 존재의 양가성, 문학성, 사랑과 계속되는 그것의 실종 사건 같은 것은, 너무나 지난한 드라마적 자의식을 우리에게 갖게 하는 것이었다. 인간은 드라마적 존재이다. 드라마가 사람들을 장악하는 것처럼, 사랑도 사람들을 장악한다. 어쩌면 박일도 드라마를 보고, 다음 번의 작가가 그것을 캐치했던 것일 수 있다. 박일도 작가가 먼저를 쓰고, 이름을 바꿔서 프리스트 드라마까지 썼을 수도 있다. 그런 것은 우리들의 독자 반응 비평에서는 조금도 중요치 않다. 드라마가 우리를 장악하는 것처럼, 사랑이 우리를 장악할 수 있는 것이다. 장악이 우리들에게 쉬웠던 것처럼, 아름다운 자연 환경을 가진 사람들이, 그들 중의 현인 몇몇이 쉽게 드라마를 쓸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팡세를 보지 않았다. 정유미가 남다른 레고의 감각으로다가, 내가 읽고는 좋은 내용이다고 자기에게 아는 척을 할 것을 대비해서, 먼저 읽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 존재론자에게는 팡세는 일종의 슬픔의 죽염 치약 같은 것이다. 죽염을 어떻게 구해서, 유리병에 담고, 콩국수를 먹을 때, 설탕에다가도 먹고, 정유미가 소금에다 먹고 싶어하면, 그것을 꺼내 거기다가 타주는 것으로 있는 것이다. 생각하는 갈대이긴 하나, 조금더 읽으면 외래어들이 많이 등장하고,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주장은, 나와 같은 이의 존재론적 경험에 비추어 떨어질 수가 있는 것이다. 전철을 탔는데, 사람 한 명 없고, 팡세를 내가 읽고, 서울 여자 정유미가 읽고, 여자가 웃고 있어서, 가까이 다가가 말을 걸고, 수작을 거는, 그것의 거대한 매개가 되는 광주 사태는, 다름 아닌 나때문에 불가능해진 것이다. 처음 내가 고등학생일 때, 얼마나 높은 언덕처럼, 다만 아름다운 화성처럼 보였는지 모른다. 속초에서 마신 소주는, 얼마나 귀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그것을 위한 차례도 그렇고, 자동차 여행을 떠난 과정들도 그랬다. 몇 개의 지역들도 그렇다. 보통의 빈 공간에는, 방금 경험한 것들이 잔영으로 남게 된다. 우리들이 청소년들의 사랑 드라마?를 좋아하는 이유는, 학교에서 경험한 것들의 잔영들이 서로 뜻을 모르고 배회하기 때문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삼십대 중반까지만 해도 대단히 오래 있는 것이고, 한번 정도 치질에 걸리고 나면, 거기로 모두 빠져나오게 된다. 그러나 속초는 그렇지 않았다. 속초는 영원하다. 그처럼 속초에는 모든 것의 끝이라는 뜻이 있는 것인가? 술도 몇 잔 마시고, 오징어 순대도 다 먹고, 속초는, 어떻게 더 표현할 방법이 없는데, 내가 담배를 피우러 베란다로 나가면서, 그것을 고스란히 말로 전하면, 왜 그냥 문을 열고 피우지 하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와 같은 속초에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항상 그와 같은 레고 블록을, 우리는 내면의 불을 켜고 의심해야 하는 것이다. 상상의 향기가 아니라, 옷을 조금 덜 입고, 아주 뚜렷한 육체의 음성으로 말하는 것이 그렇게까지 불가능한 반도체요, 전선들이며, 전자방이라는 것인가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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