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다메 칸타빌레와 남자친구의 친한 관계
칸타빌레에는 한계가 있다. 우리가 잡지를 보는 이유는, 창조에는 대항하지 못해도, 백조가 되고, 폐허가 되고 하는 이유는, 그렇게 관계적 지식을 익히다 보면, 의식하고,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다 보면, 최소한 근사해지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근사함을 인식하고, 또한 의식하는 토대가 무엇일까 싶다. 노다메 칸타빌레는 숱한 관계가 있고, 그렇게 집성촌을 구성해 놓으니, 근사함 같은 것이 새어나온다. 하지만 관계가, 노아의 방주 이후로, 어둠 속에서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하면, 감동이 또한 사라지는 것도 정당한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감동만으로 사는가? 우리가 곳감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밥도 먹고, 고기도 먹고, 밥에 물도 말아먹고, 콩나물국도 먹고 하는 것처럼, 감동만으로 사는 것은 아닌 것이다. 노다메 칸타빌레는 오히려, 바로 그와 같은 호흡장애의 현실을 내비친 것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감동으로 사는 것이고, 또한 감동으로만 사는 것이 아닌 것을, 어쩌면 그렇게 동시에 내비쳤는지 모르겠는 것이다. 우리가 학교를 다닌 적이 없는가? 내 가족 중에 판검사가 있는 것처럼, 아주 먼 친척까지 수배하면, 비싼 음악 대학을 다니는 사람은 이젠 흔한 것인 것이다. 우리가 사진들을 많이 찍으면, 북해도 대학도 내가 직접 다닌 것처럼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최근에, 일본의 대학이 아주 근사한 피사체가 되었었다. 누군가 소설로써 믿기 힘든 높은 설산을 만들어놓으니, 어쩔 수 없이 파생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니 곰곰히 분석하면, 그 최초 원인이라는 것이 매우 값진 것인 것이다. 믿기지 않는 양을 찾는 사나이의 모험이라는 것은, 나와 같은 고급진 사람의 의식에도 오래 남고, 일본을 전혀 다른 실체로써 접근하게끔 하였다. 어쩌면 나의 단편 일본 소설도, 유키 구라모토의 음악과 함께, 하루키의 세포 깊은 대상적 실체가 아니었다면, 구성이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단순하고, 오래된, 일본의 미학도 물론 무시무시한 것일 것이다. 인간을 경쟁으로 놓는다면, 그와 같은 단편에 필적할 만한 작품이 한국에는 없고, 일본에도 없다 싶다. 그것의 증거가 재빠르게 요구되지 않은 것은, 오히려, 노벨상을 받은 일본 작가의 소설과, 하루키의 심상치 않는 국제적 열병과 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니까저니까 비슷비슷한 것인 것이다. 관념은 소중한 것이다. 그리고 매우 넓은 곳이다. 관념에 주자학만 있는 것이 아닌 것은, 그것이 너무 넓어서 양명학도, 양양명학도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관념이 무시를 받으면, 그래서 무시한 사람의 관념이 순식간에 점수 매김을 당하는 것이다. 무시를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다. 내 나라 사람들도 나를 찾아오지 않는데, 내 나라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는 것처럼, 일본 사람들도 나를 좋아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 좋은 것이다. 그것이 양명학을 선도하는 사람으로서의 기본 자세인 것이고, 참다운 주자학의 음색인 것이다. 그런데 무시를 했다고 재밌게 설정을 하면, 뜻하지 않게 중요한 사실들의 고구마 줄기를 발견할 수 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도 우스워지는 것이다. 나는 신학생으로서, 문학을 무시하는 원죄를 가지고 있다. 나도 모르게 형식이 그럴 것이고, 항상 조심하는 편이다. 하루키도 마찬가지이다. 존재의 압력이 거대했을 때, 어떻게 하루키의 글들을 한 편도 읽을 수가 없었다. 서양의 오케스트라, 요란법석한 샴페인도 일찍 터뜨리는 것도 싫었다. 하루키의 글들이, 처음에는 나와 같은, 골방의 수난자, 죽기까지의 연구자, 영원한 중앙역 같은 느낌이 있었으나, 나중에는 너무 자주 와타나베가 등장하는 것이었다. 항상 하루키의 범용적인 스콜라 철학적 문구가, 항상 별로 그런 인사를 본 적도 없는 일본 정치인들과 부딪히는 것이었다.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신기하고, 그것을 지적하는 사람들이 없다는 것이, 플라톤 철학자는 없으나, 사람들 전체가 플라톤 철학자인 것처럼, 잘못된 이데아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내가 나의 소설을 좋아하고, 사람들에게 권하고, 결국에는 그와 같은 파괴력을 갖고 있다 고백하는 이유는, 못지 않게 일본적인 사진들을 갖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추적할 방법이 없다. 한국 사람이 한국에서 성경을 읽었다고 해서, 신학자이거나, 신학생, 기독교인인 것을 무시할 수 없는 것처럼, 이웃나라 일본을 내가 많이 관심하고, 본질적이고, 진실의 방에다가 그것을 보관하고 저장해놓았다고 해서 의심할 만한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일본 전체의 양적 영혼 백의 하나를 칠십이년생인 내가 가지고 있다는 것은, 메구로 가조엔, 너무나 기이한 것이고, 정말이지 인터내셔널한 운명이라는 것이 있는 것인가, 과연 그런 것이 있는 것인가, 궁금하게 하는 것인 것이다. 나는 나의 말들이 어느 순간에는, 불완전하다는 것을 항상 의식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부정성만을 의식하지 않는다. 다른 글에서는, 생전 들어본 적 없는, 광주에서의 백향목 기둥과, 한신대학교에서의 잣나무 서까래가, 나의 문체에서 들려오기 때문이다. 그것이 나를 먼저 매혹시켰고, 차츰차츰 사람들을 매혹시켰을 것이다. 나도 처음에는 다만 문학적인 사진주의나, 문체적인 영상주의 정도로 여겼었다. 내가 너무 사진이나 영화를 좋아해서, 필연적으로 이렇게 된 것이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조금 있다 보니, 그것은 물리학적인 고민이었고, 사람들 사는 시공간과 밀도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와 같은 점이 사람들에게는 많았고, 그것의 서울대의 꽃들이, 그것이 그들의 소유이자 자유가 아니라는 것을 체험으로 알아야 했었다. 노다메 칸타빌레는 얼마나 슬픈지 모른다.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은 이제는 서양의 기독교 음악은 일절 불러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사강의 예언처럼, 브람스나 좋아해야 하고, 브람스마저도 기독교 문장이 들어있는 것은 조금도 연주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만일 그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비슷한 신학대학교 출신의 문학과 지망의 전설을 만들면 되는 것이다. 억지로 만들면 어떻게 되겠는가? 음악의 구멍에서, 뇌가 없는 아이가 기계적으로 관절 운동을 하면서 앞으로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음악의 구멍이 창피한가? 우리가 투호를 하는 것이 창피한가? 투호는 국가의 능력이고, 국가의 아름다움이자, 교육의 미래이다. 투호는 조금도 창피하지 않다. 행여 그와 같은 시도를 처음부터 하지 않는다고 하자. 그것이 우리들의 현주소인 것이다. 신학대학교를 다니면서, 문학 공부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고, 외국어 실력까지 서울대학생들보다 나은 것으로 가지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러니까 경쟁 자체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이 얼마나 아찔한 과거인가? 조선시대 정조가, 정약용의 시험을 판정할 것이 아니라, 나의 이런 말들을 한 번 조정해보았으면 좋을 것이다. 정조는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인격의 계급이 매우 높을씨지만, 내게는 그저 한갓된 지나가는 나그네 일이삼 정도 밖에 안 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보지 않는 것은, 우리들에게 선의 양명학이 참으로 거대하기 때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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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친구를 보고, 일본 사람들이 전투적인 감각으로써 반응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싫어하고, 미워하고, 혐한한다는 것이 아니라, 국화와 칼 하듯이, 생전 만나 본 적 없는 제목으로다가, 전투와 눈물 할 때의 전투를 말한다. 사람들이 나의 편을 들면, 자기들의 건물들이 죄다 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사람들이 서울대학교 편을 들면, 사탄의 지배의 인정을 얻기 위해, 주기적으로 인신공양하는 하늘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처음으로 그와 같은 우주를 만나고 있다. 보고서도 보이지 않고, 믿을 수도 없는 것이다. 요란한 오케스트라가 서양의 제국주의 행진곡을 장악했던 적이 있었다. 어떻게 하다가, 아름다운 선율로써의 러브스토리로, 미국의 대학은 끝이 났고, 일본은 무사시노 대학교, 사월이야기로 끝이 나고 말았다. 그리고 가위에 눌린 것처럼, 우리들의 바보들의 행진이 거기에 덧붙여져 있다. 어째서 바보들의 행진인 것인가? 얼마나 노다메 칸타빌레의 클래식 공연은 아름다운지 모른다. 학원에 짓눌리면, 짓눌린 대로, 우리 아이들은 소리를 내는 것이다. 드라마 남자친구는, 그렇게 음악하던 친구들을 모두 감추고 있는 것 같다. 마치 우리들의 영화가, 육이오의 키아로스큐로 속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신급의 빛을 발휘할 수 있었듯이, 적당한 구성미로써 끊임없이 졸업생들이 배출이 되는 음악학교의 지배에서 어쩌면 처음으로 벗어나 있는 것인 것이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내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것은 아닌 것이다. 저녁에 우리는 동경대학에 모일 지도 모른다. 그렇게 사람들이 이런저런 사진들로, 인과에 급급한 블랙홀로, 작아지고 사그러드는 우주 밀도를 막아내기 위해, 열심히 할 일 하고 있는 경찰들을 불러내어, 괜시리 서로 싸울 지도 모른다. 어찌나 드라마 남자친구의 음악이 클래시컬하다 못해, 쎌레스티얼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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