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에 관한 평론: 남친 5,6편을 보고
평론이 필요치 않는 것은 서울에 큰 눈 오기 전 날, 그러니까 5편을 볼 때일 것이다. 나는 새벽에 근무가 있어서, 아무래도 잘 볼 수가 없었다. 돌아와 보는데, 어째서 서울에 그렇게 눈이 내렸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우리가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자유인을 만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매우 큰 정치적 사건인 것이다. 아직 규정된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서 그것을 확실하게 보장해주는 사람도 없는 것이다. 바로 그와 같은 갈등이 사람을 고통스럽게 한다. 가장 견디기가 힘이 든다. 사랑에도 능력이 있어서, 다만 그것을 중심으로, 우리는 최선을 다해 선남선녀가 되면 되는 줄 알았다. 소설을 쓸 때 가장 죄의식이 드는 것이 그때이다. 공기마저도 소유가 있어서, 아무런 공기도 채집하여 쓸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아무렇게나 쓴 다음에, 그것들의 의미에 책임있는 간여를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구성에는 아름다움이 있고, 기쁨이 있지만, 말 그대로, 숫자 그대로, 아홉이라는 뜻이 있다. 그렇다면 구성 다음이 무엇이고, 구성을 넘어서는 것이 무엇인가? 어쩌면 아무런 평론이 필요치 않는 5편이 실은, 충분히 사랑의 구성적 단계를 넘어서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다만 그것의 필요, 그것의 존재에 대한 인지, 그것의 증거가 우리에게 없는 것일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서로 아무런 평론 없이 만날 수 있다. 아주 작은 평론이, 불평이 있다고 해도, 사랑의 원초적인 구성미를 압도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랑이 아주 크면, 한 사람이 혼신의 힘을 다해 욕쟁이 할머니가 되어도, 조금도 데미지를 입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 소설이라는 것은, 세상 크리티시즘들의 집합체인 것이다. 우리가 옛날을 생각해 봐도, 최루탄 가스를 내가 마셨다는 것은, 엉겹결에 마셨다는 것은, 매우 한국적인 사랑의 대열에 내가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하다가 호남이 먼저 나서게 되었고, 영남이 못지 않는 것이 되었다. 보통 거리에 사랑이 넘치면, 공무원들이 차 없는 날 같은 것을 지정하지 않는가? 차가 페퍼고고? 딱 한 대만 있었고, 사람들이 뛰어다녔다.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고, 사랑소설이 무엇인지 몰랐다. 필연적으로, 그리로 몰려가서, 반강제적으로 슬픔을 당하리라고는, 예상하는 사람도 있었고, 절대의 민중 다수는 조금도 예상치 못했었다. 우리가 스타일에 익숙하지 못했던 것은, 프랑스 연작 화이트 레드 블루 같은 것으로다가, 비슷하게, 우리들의 고통이 작품에 있어서 형식적인 원인이 되는 것을 목격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너무나 분명하여서, 일부러 스타일이 안으로 죽어버렸을 것이다. 많은 시간이 지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서, 피라미드를 요즘 기술로다가 하나 쯤은 지을 수 있는 시간, 그와 같은 사회적 고통이 하나의 글자, 혹은 빛깔, 보기 좋은 기다란 스타일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5편이 슬펐다. 아름다웠다. 그 모든 서울대학교 입학시험을 통과한 사람이 있을까 싶다. 시험지를 받고, 시험을 시작하는, 극단적인 피동성에서 벗어나, 문제적 인간 같은 프로그램, 스스로 원시와 고대, 육체와 같은 살아 숨쉬는 스트레스를 시험으로서 의식할 줄 아는 능력 같은 것들. 그것이 이데아 앞에서, 실크스크린처럼 찍어 내어지고, 표현될 수 있다는 사실들. 그와 같은 서울대학교 입학시험에는 실상은 응시조차 인원이 부족한 것이다.
그렇게 6편. 그런 거지 같은 기자 새끼. 너무 많은 드라마들을 만들다 보니까, 아주 확고부동한 사람의 태도가 갈수록 리얼리즘을 더해가는 것 같다. 그리고 아주머니. 우리가 드라마를 볼 때 쉽게 보는 방법이 있고, 어렵게 보는 방법이 있다. 아주머니의 남자 주인공에 대한 태도를 볼 때, 사실 불쾌감을 하늘을 찌르는 것이 정상이다. 그저 과도한 크리티시즘의 장면으로 놓기에는, 약간 우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사탄의 느낌이 있기도 하였다. 사탄이 우리에게 고통스러운 것은, 인간 모두가 천사인 것처럼, 인간 모두가 사탄이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사실 때문이다. 사탄으로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 사탄으로의 길의 첩경이다. 다만 꺼려지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많이 우리는 사탄으로부터 떨어져 있을 수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모두가 다 사탄이라는 능력과 혜택 때문에, 우리는 얼마든지 영화 텔미섬딩에서의 검은 비닐에 담겨질 수 있는 것이다. 얼마나 영화관을 나오면서, 우리는 놀랐던가? 비디오로 보다가, 티비를 껐었던가? 그와 같은 임팩트. 찰라. 드라마를 쉽게 볼 줄도 알아야 한다. 우리가 문학을 공부하고, 관념을 익히고, 때로는 다리가 긴 말을 익혀서, 광주에서 하루사이에 화순도 다녀오고, 곡성도 다녀오고 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고통 따로, 그것을 보는 것 따로, 우리가 가난한 소년소녀 시절에, 공부를 하면서, 두통을 끌어안고, 두렵고 초조한 마음을 상시로 유지한 채로 살았던 것은, 그와 같은 고통의 인과가 어떻게 진행되어 자기에게 미치는지를 아직 잘 몰라서인 것이다. 문학에는 회피 기능이 있다. 대신에 현자들은 그와 같은 회피의 형식으로써, 본질에 육박하는 길을 발견하기도 한다. 아주머니는 불쌍하고, 그녀의 저주와 크리티시즘은 싼티가 난다. 매우 한국 드라마적이면서도, 이것이 중요한데, 동시에 문학적이다. 그래서 문학을 공부하는 우리 학생들은, 어째서 그와 같은 두께가 우리에게 필요하게 되었는지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남친 5편에서는, 그것이 영화처럼 거대하고, 그것만으로는 서울에서 가장 높은 빌딩, 높다기 보다는 웅장하며 숭고한 빌딩처럼 보였으나, 다만 구성으로 그치지 않고, 십성에 육박하는 문학적 존재가 엿보였었다. 6편은 그래서 물리적 효과가, 우리들을 향한, 흥미롭고, 괜히 봤다 싶고 그런 것이다. 순전 5편의 감동과 내성을 갖고, 6편을 본 것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특히 그 기자 새끼. 아무튼 박보검은 흔들리지 않고, 드라마의 시간 마지막까지 함께 했던 것이다. 그와 같은 두께의 문학이, 그러니까 문학의 두 얼굴일텐데, 감추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드라마에 보이지 않는 것일 것이다. 감추어져 있지만, 있음에 준하는 것. 그것은 분명 사회적 능력이나 외모 면에서 등장 인물 못지 않는 여성들의 존재를 뜻할 것이다. 아름답고, 표현에 선명한 문학은, 철학에 가깝다. 철학이래도, 그것을 자꾸 시험보다 보면, 문학스럽게 된다. 그렇다면, 문학 그 자체는 무엇일까? 아주머니는 박보검을 멀리서 지켜보다가, 말을 붙여볼 시간을 호시탐탐 노리다가, 그와 같은 노고도 상당하다. 노예적으로다가 내내 기다리다가, 드디어 박보검에게 말을 건내보는 것이다. 자기에게 딸이 있다. 아들이 있는데, 재결합이 무엇이 그렇게 문제겠는가? 실은 딸이 있는 것이다. 아주머니가 그렇게 쌍스러운 말을 감추지 않았던 것은, 너무 하고자 하는 말이 눈에 뻔히 감춰져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것은, 자기 딸이 송혜교보다 예쁘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는, 송혜교가 나서려다가, 옆에서 비서가 말렸던 것이다. 문학은 어둠과 같다. 서울은 거대한 어둠과 같다. 내가 있는 곳은, 여자들이 별로 없는데, 서울은, 서울의 어느 곳은 돌아다니기만 해도 여자들이 부딪힌다. 만일 그와 같은 문학적인 딸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들의 운명에 별로 관심이 없는 여자였다면, 이름 뿐인 문학 교수였다면, 존재를 향해 그와 같은 기법을 쏟아내지 않았을 것이다. 송혜교의 전 남편도 그렇다. 그때만큼은, 자기 누나를 떠올리면서, 드라마의 주인공도 중요시하고, 자기 어머니도 돌보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도, 사탄의 지식과 일치한다. 주인공이 상대의 의도를 어찌 알겠는가? 하지만 우리가 회견장에서 소리지르던 기자를, 송혜교보다 예쁜 여동생을 둔 사람으로 여기지는 않듯이, 차수현 대표 전 남편의 어머니 정도는 그렇게 보아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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