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늘 꿈에 산다. 조덕배. 꿈에. 우리는 지금 일본의 잔잔한 두려움 속에서 산다. 우리는 대학을 나오지만, 그러니까 죽을 때까지 대학의 덕을 입고 살지만, 졸업생, 위안부, 그런 것 말고, 대학의 기억 속에서 살지만, 거울 저편의 인간은 학대를 발견하고, 학대의 연속 속에서, 대학에 어필하면서 사는 것이다. 무슨 그런 것이 있겠는가 할 것이다. 그와 같은 반응은 남자가 백퍼센트이고, 여자가 그러나 삼십퍼센트는 가질 수 없는 것이다. 그 삼십퍼센트는 스타벅스를 마시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중국 음식을 시켜먹을 수 있다. 그러나 스타벅스를 시켜먹을 수는 없지 않은가? 앞으로 우리 스타벅스에서 슬픈 사랑의 노래 메뉴를 개발했으면 좋겠다. 가격은 매우 비싸다. 삼십만원. 물론 커피는 최고급이다. 그러나 부수적인 것이, 매장 구석구석에 걸쳐, 슬픈 사랑의 노래가 울려퍼지는 것이다. 대단한 노래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대단한 노래라고도 생각한다. 한국어가 들리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이다. 외국인에게는 해당 국가로 번역된 가사를, 그와 같은 팜플렛을 선물하는 것이다. 가수는 고를 수 있다. 이소라. 박정현. 이소연. 남자 가수들은 중요치 않기 때문에. 뉴욕에 갔더니, 처음 가는 사람으로서, 기분이 쭈뼛쭈뼛하는데, 누군가 슬픈 사랑의 노래를 시킨 것이다. 사람들은 아메리칸 특유의 소머리 환호성을 지른다. 그리고 이문세의 목소리가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것이다. 그는, 혹은 그녀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뉴욕. 그러니까 지옥에 있는가? 아니면, 제국주의의 상징에 있는가? 우리의 감각은 이처럼 절절한데, 어째서 한 마디 일언반구를 할 수 없는 것인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도 있나 싶어서, 유튜브로 옛 사람들의 말들을 듣는데, 그때 그것이 통용되던 시절이 떠오르나, 내게는 그만 부도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하루키는 그와 같은 기능이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하루키를 좋아하는 이유는 단 하나이다. 그의 독특한 화성과 리듬이 너무나 한국 음악 같고, 미덕은 단 하나, 군국주의에 대해서는 죽을 듯이 항거한다는 것이다. 사탄에 항거하는 영화는 어쩔 수 없이 매우 나쁜 부도덕을 갖는데, 그것은 결국, 불에 타오르던 황룡사 구층목탑의 모습처럼, 사탄을 찬양하게 된다는 것이다. 경복궁도 그렇게 불타올랐었다. 모든 형상은 정확히, 같은 층의 사탄의 문을 열게 되는 것이다. 어린 시절에 로미오와 줄리엣 영화를 보고는, 사탄에 항거하기 위해서는, 신학과를 가야하고, 적어도 영문학과, 각종 문학과에 가야 하는 것이다. 사탄은 사람들을 집단으로 죽여놓고, 늘 언제나 그와 같은 집단 체조 같은 것을 비춰주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전자방을 통과하는 이가 드물다. 죽음과 같이, 통과할 수가 없는 것이다. 통과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일본의 아름다운 노래를 듣다보면, 옛날에는 임진왜란이나, 일제의 침략이 생각났지만, 지금은 금세, 한국 노래에 먹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한국 사람들이 부지런히, 이차대전, 한국전쟁, 비엔남 워를 지낸 다음에, 각종 문학과나, 신학과에 진출하였다는 것이고,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찬양에 성공하였다는 것일 것이다. 산타나도 그렇다. 얼마나 마음이 슬펐으면, 한국의 비상한 엔카 같은 멜로디를 따다가, 변주하고는,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자기 이름을 사탄나라고 했겠는가? 갑자기 한국 노래가 스타벅스를 장악하고, 한국어 특유의 음색과, 악보로 도저히 표기되지 않는 전진이, 신화, 우리는 짓굿게 잔진이라고 불렀지만, 그와 같은 잔진이 너무나 아름답고, 훌륭한 것이다. 그것에 나이테가 있고, 얼마전 수백살의 조개가 발견되었고, 그것을 연구하려고 열었는데, 그만 죽고 말았다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어떻게 악보로 표기가 되지 않는 것일까? 한국 사람은 그렇게 카타나, 그러니까 가타카, 가타카나와 다른 것일까? 일본어는 영원한 그런 것의 퀴즈 같은 것일까? 중국어를 기를 쓰고 부드럽게 발음하면, 영국어도 미국어처럼 변화할 수 있듯이,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기를 쓰고 노력하면, 그만큼 인위적이 된다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조개를 애써 열려고 하니, 죽고 마는 것이다. 그것으로 발음하며, 숨을 쉬고, 세상을 알고, 세상에 너밖에 없다고 신학적인 고백을 하면, 그것이 누적이 되고, 이무치치, 사계의 연속 속에서, 그것으로 사납지 않고, 갑자기 유키구라모토의 연못이나, 파리, 그리고 앙드레 가뇽의 걸작들로 진입을 하면, 정말 세상에는 한국어 밖에 없고, 그것의 성공적인 라이프, 그러니까 삵 밖에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일본군의 정신착란은 매우 유명한 것이었다. 그들은 이유가 분명하였고, 그것은 밝은 햇빛의 로고스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이 너무나 유능한 것이었다. 식민지는 유능한 것을 기반으로 하고, 그것으로 영원히 진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삐걱거렸고, 바퀴가 빠져나가, 로고스가 그만 사라지고 만 것이다.
물리학적으로 사탄과 제국주의는 일종의 극단적인 모순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커피를 맛있게 먹으면서, 그와 같은 기본적인 링 던지기 놀이조차 하지 않는 것이다.
일본으로 몰아주던 이미지 차량들이, 그만 그들의 한결 같은 선택 속에서, 마침내 군국주의적 내면처럼 못생겨진 것을 우리는 발견해야 했다. 그것은 어느새이고, 그것은 일종의 임마누엘 칸트 같은 것이다.
한국의 차량들이 그렇게 먼지를 많이 타는, 우리들이 질주하는 그저그런 도로의 환경 같이 생겼었다. 일본 사람들이 한국 차량을 하나도 사지 않는 것은, 하나의 케이스와 같아서, 선원인 남편이 일년에 한 번 아내를 만났는데, 작년에, 임신을 하여서, 그때 임신한 것으로 서로가 믿는 것과 비슷한, 그와 같은 형이상학적 절박함 같은 것이었다. 한국 차량들이 임신하기에는 늘 언제나 못생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본 사람들이 무라카미 류보다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너무나 좋아하고 사랑하듯이, 그와 같은 선진국적인 하루키의 구멍으로, 그만 한국 회사의 차량들이 눈에 띠기 시작한 것이다. 가전제품은 사고, 휴대폰은 사고, 차는 사지 않는다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었다. 한국 오토바이 회사를 보라. 기가 막힌다. 누가 한국 오토바이를 사겠는가? 어떤 일본 사람이. 비유를 들자면, 한국 오토바이 회사에서 그만, 갑자기, 혼또니, 할리데이비슨 최신의 제품을 만든 것과 비슷한 것이다. 계급이 천한, 그런 나쁜 일본 사람들도, 깨끗한 옷을 입을 때가 있다. 언제나 바다를 만나고, 언제나 후지산을 만나기 때문이다. 가전제품에서는, 대상적 절대성과 같은, 개인과 민족의 역사와는 상관 없는 미국의 좋은 팝송이 흘러나왔었다. 그들은 동양을 저주했고, 군국주의를 미워했으며, 언제나 새롭게 시작하여 시험 점수 오십점을 맞은 다음에, 저녁에 잠이 드는 것을 반복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그와 같은 규슈 속에서, 시코쿠, 군국주의를 시도하는 것은, 일종의 정신착란 같은 것이다. 한국 사람 때문이고, 중국 사람 때문인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정신의 발전이 이뤄지고 있고, 일렉트리시티, 사탄이 또한 흐름을 갖고 있어서, 정신에 속하지 못하는 이들은 어쩔 수 없이 사탄에게 솔깃하게 되는 것이다. 이스탄불 어느 멋진 스타벅스에서 갑자기, 일본 사람이, 누군가 슬픈 사랑의 노래를 주문한 것을 경험하는 것이다. 삼십만원이나 하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