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아직도 믿음이 있다. 내가 아직도 자기들처럼, 돈이 있다고 말이다. 아직기. 그것의 명예는 하늘과 같고, 그것의 달콤함은 끝이 없다.
우리는 이번 추석에 티비 실패를 맛보아야 했다. 티비는 늘 성공만 하는 것이 아니다. 류현진만 보더라도, 몇 번의 실패를 최근에 했지 않은가? 도대체 어떤 영화를 방송 삼사, 삼사관학교, 그리고 케이블 티비에서 보아야 하는 것인가? 우리가 학교에서, 작은 시끄러운 소리에도 예민하던 왕의, 왕자의 신분에서, 공주의, 벗어나, 풀을 뽑다가, 추석 연휴라고 티비를 보면, 얼마나 기쁜가? 우리는 그와 같은 때로 돌아갈 수 없다. 우리는 노예의 어머니를 두지 않고, 자유하는 사람의 아들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도대체 이문열은 누구인가? 우리가 우리들의 학생들을 보면서, 노예라고 어디에서 보았는가? 식민지? 콜레스테롤? 선생님의 식민지 같기는 했다. 나는 등단은 실패하였지만, 진학에 실패는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성공은 실패의 어머니, 실패는 성공의, 그런 것처럼, 그것이 노예는 아닌 것이다. 도대체 어디에서 식민지가 연속하는 것인가? 인도의 뉴딜 정책 같은 곳인가? 우리가 우리들의 식민지와 식인종을 인지할 때는, 감각하고, 조금은 탄식하고, 두려워할 때는, 그와 같은 피아노 소리가 들려올 때인 것이다. 들려오지 않으니, 그것을 자기가 틀고, 우리들이 식민지에 사는 것을 실감할 때인 것이다. 유튜브로서나, 우리들은 추석에 걸맞는 형이상학을 경험할 수 있었다. 서울대생과 어느 유명 피아니스트와의 대결, 그리고 백발백중 웹드라마 군생활이 너무나 어려운 우리들의 영화였던 것이다. 지금쯤이면 극한직업 같은 것이 케이비에스 정도에서 틀어줄 만 한데, 누군가의 노래처럼 벌써 일년이 아직 안 된 모양이다. 나의 상해 선택 영화는 효민이 나를 만나기 위해, 상해를 돌아다니는 것에서부터 시작하고, 그것으로 계속 되며, 쓸쓸하고, 쓸쓸하고, 쓸개즙, 옛날에 포도처럼 생긴 어떤 열매가 있었는데, 너무 작고, 그래서 이런 것들이 진화를 거듭하여 마침내 포도가 되는지 궁금한 것들이 었었드랬다, 문득 이처럼 사진에 포착되는 것에서, 피아노 소리가 터져나오는 것이다. 그렇게 쓸쓸할 수가 없다. 나와 효민이 만나,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늘 언제나 내가 좋아하는 레파토리로서의 서편제, 그러니까 서북부지역을 가는 고속열차를 타는 것이다. 처음에 가칠봉 사대대에 이르렀을 때, 바람이 거셌고, 동시에 굴뚝에서 엄청난 양의 김이 깃발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대규모의 식당에 훈련병 전원이 들어가 착석하였는데, 그렇게 구름에 앉는 것처럼 달콤할 수가 없었다. 그곳을 오르면서, 나는 무수한 사람들을 암살하였다. 여운형, 김구, 박정희. 또는 이름 모를 사람들. 그러나 모르드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눈에 보이는 건물에 반가움을 느꼈고, 간장 냄새가 쏠쏠한 곳에 앉다보니, 마치 어린 학생이 추석을 맞이한 것처럼 기쁘기도 한 것이었다.
중국 사람들의 사자놀이는 몇 년의 기간을 갖고 있을까? 여자가 비상한 인터내셔널을 갖고 있어서, 한국에 한 남자, 일본에 한 남자, 중국에 한 남자 시집살이를 해야 했다면, 일본과 중국이 좀더 잘 살고 지위가 높다고 해도, 음식이 자기의 마음을, 그것은 육체, 그것을 암살한다면 얼마나 십삼월에, 그래서 삼월이, 십사월에, 그래서 사월이, 화성의 봄날에, 그래서 춘심이, 눈물이 폭포수처럼, 교향곡처럼 쏟아졌겠는가? 인간이 음식에 죽는 것이다. 우리가 일제의 침공을 두려워하는 것은, 음식을 초월하는 문명이 인간에게는 가능하겠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한 오년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음식 냄새를 맡지 않고, 회사 내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였다고 한다. 국밥만 먹으면, 죽는 것이다. 음식은 언제나 형이상학이기 때문이다. 비구니가 고기를 먹지 않고, 그래도 은주사 같은 곳에서 살 수 있는 것은, 남자가 없어도 되고, 고기를 먹지 않아도 되지만, 영원한 반복으로서의 밥과, 된장국, 이런저런 나물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것이 차단되면, 고기를 먹게 되고, 남자를 밝히게 되는 것이다. 그와 같은 사탄 같은 지배를 고발하기 위해서, 은주사가 천불천탑, 존재의 이유를 가지는 것일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상해 선택이라는 영화에 빠져든다. 일종의 이미지즘이기도 하고, 주지주의적인 시 같기도 하고, 마음껏 그것의 속성을 남발하는, 그리고 우리들이 충분히 경험하지 못한 산문시 같기도 하는 것이다. 갑자기 시인 두 사람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여자는 항상 웨딩드레스를 입고, 웨딩케이크를 먹고, 새로운 스타일의 웨딩드레스를 입는다. 그것의 밤풍경이 그렇게 내가 언젠가 썼던 소설, 상해 종말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더더욱 한국에 집착하고, 한국에서 집을 구해야지, 웨딩드레스만을 트렁크에 가득 싣고는, 서북부 익스프레스를 타는 것인가? 오토바이를 타고, 해가 지는 히말라야을 향하는 것인가?.....
다섯 개의 영화가 엿보인다. 반찬이. 그리고
서로에게 고봉밥을 먹이는 소년 소녀......